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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작 <둑>

우리 소대 행군대열이 일산 시가지를 벗어나자 가을걷이가 끝난 텅 빈 들판이 아득하게 펼쳐졌다. 삼거리 지점에서 장 하사는 상황판을 펴 들고 행군로를 점검하고 좁은 논길로 인도했다. 거기서부터는 행군 대열이 이열 종대에서 일렬종대로 바뀌었다.

그 사이 비는 멎었지만 논길은 진 죽이 돼 꽤 미끄러웠다. 자연 행군 속도가 늦어지자 선두 장 하사는 뒤돌아보며 '속보'라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도록 지쳤고, 워낙 진흙길이라 더 이상의 속보는 불가능했다.

마침내 들판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 뿌연 안개비 속으로 길고도 큰 강둑이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장 하사는 행군을 잠시 멈춘 채 상황판을 보고, 그 강은 한강으로 그 둑이 끝나는 지점이 우리들의 'RP(도착지)' 점이라고 했다. 우리는 도착지점을 알게 되자 이상하게도 새로운 기운이 솟았다. 점차 둑에 가까이 이르자 북녘에서 스피커 소리가 가늘게 들려 왔다. 귀를 기울이자 그 소리는 대남 방송이었다.

서부전선 한강 하류 부대에 근무할 때 소대원들과 함께 방한복을 입은 기념으로(1969년 12. 강 건너 산이 보이는 곳이 북한이다. 왼쪽에서 네번째 모자 쓴이가 필자다.)
 서부전선 한강 하류 부대에 근무할 때 소대원들과 함께 방한복을 입은 기념으로(1969년 12. 강 건너 산이 보이는 곳이 북한이다. 왼쪽에서 네번째 모자 쓴이가 필자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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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뭣이냐 하면 우리 소대원을 환영한다는 소리인 겨."

장 하사가 한 소리를 하자 조 상병이 거들었다.

"오메 잡것들, 우리가 오는 걸 귀신 같이 아는구먼."
"아무렴, 이 궂은 날씨에 우리가 오는 게 뵈기나 하겠어. 저들은 그저 시도 때도 없이 무시로 개 닭보고 짖듯 뱉는 걸 테지."

최 일병이 그 말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소대원들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나도 그 동안 소문으로만 듣던 대남 방송을 직접 내 귀로 듣자 소름이 돋았다. 우리 소대원의 군화와 바지는 너나없이 진흙이 튀겨 엉망진창이었다. 조 상병의 얽은 얼굴은 흙탕물로 눈만 빠끔했지만 어느 누구도 농담을 하거나 그를 쳐다보고 웃지도 않았다. 이따금 들려오는 대남 방송은 우리들의 입담을 막아 버렸다. 둑이 가까워질수록 대남 방송 소리가 점차 커졌다.

"… 우리 민족의 … 위대한 …  다음과 … 교시하셨습니다. …"

바람 탓인지 방송은 끊어졌다가 이내 다시 이어지곤 했다.

1950. 7. 대전근교의 민간인 학살 현장
 1950. 7. 대전근교의 민간인 학살 현장
ⓒ NARA/ 고 이도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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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장파장

위의 글은 나의 졸작 단편소설 <둑>이라는 작품의 한 대목이다. 이 작품은 나의 군복무시절의 체험을 그대로 그린 작품으로 우리 부대가 전방  ㅇㅇ사단의 예비대로 서울 외곽 경계를 담당하다가 겨울에 접어들기 전 최전방부대를 지키던 부대와 임무교대를 위해 행군 이동하는 대목이다.

그때가 1969년 11월 초순 무렵으로, 우리 부대는 거기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 가을까지 약 1년을 주둔했다. 부대 막사는 서부전선 최전방 부대로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강을 건너면 바로 북한 지역으로, 이편에서 빤히 보이는 곳이었다. 우리 부대가 그곳에 근무하는 기간 중, 가장 짜증나는 것은 대남방송이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수색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대남삐라(전단)를 수거하는 일이었다. 

우리 속담에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고 했는데, 날마다 무시로 반복되는 대남방송은 짜증의 한계를 넘어 정신 착란증을 유발케 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수색을 나가면 1개 소대 당 마대 한 자루 이상 수거하는 북에서 날아온 삐라 역시 몹시 짜증나게 했다.

그런데 이런 대남방송이나 대남 삐라는 일방으로 북에서만 내려 보내지는 않았다. 남쪽에서도 그에 상응하게 대북방송을 했고, 또 대북 삐라도 살포했다.

그야말로 이런 일은 '피장파장'으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유치한 논쟁의 형국이었다. 이는 북으로 날려 보낸 대북 삐라가 풍향의 돌연변이로 이편에 떨어져 우리 손으로 여러 번 수거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런 유치한 심리전이 남쪽이나 북쪽 일방이 아님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었다.

함흥, 300여 명의 정치범이 동굴에 불법 감금되어 질식해 죽었다. 유엔군이 점령한 뒤 이 시신들을 꺼내 유족에게 확인시키고 있다(1950. 10.).
 함흥, 300여 명의 정치범이 동굴에 불법 감금되어 질식해 죽었다. 유엔군이 점령한 뒤 이 시신들을 꺼내 유족에게 확인시키고 있다(1950. 10.).
ⓒ NARA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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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을 기다리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이요, 또한 분단 70주년이다. 내가 어렸을 때 일제강점기와 해방 혼란기, 한국전쟁을 몸소 체험하신 할아버지는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씀하셨다.

"네가 군에 갈 나이가 될 때까지는 아마도 통일이 될 거다."

그 손자가 군에 다녀왔고, 이즈음 나의 손자뻘 들이 군 복무를 하고 있다. 하지만 남북의 대치상황은 그제나 이제나 한 발자국 전진이 없다.

나는 2004년부터 세 차례 방미하여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한국전쟁 사진들과 그 무렵 전후방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진들을 눈물을 글썽이며 숱하게 봤다. 도대체 우리 남북 겨레들을 누가 이렇게 잔인무도하게 만들었을까? 왜 우리 겨레는 이런 짐승보다 못한 동족상잔의 전쟁 놀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가?

그동안 남북관계의 화해 무드로 대남대북 방송도 사라지고, 내남대북 삐라도 종적을 감춘 듯했다. 그런데 그 언제부턴가 슬며시 등장하여 뜻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더니 곧 서로 총질 대포질로 살벌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는 분명 조국의 평화통일을 반대하는 분단 세력들과 국제무기상들의 농간과 남북 극우 극좌들의 놀음에게 놀아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인다.

이번의 이 남북대치 상황도 끝나면 슬그머니 신형 무기가 도입될 테다. 그저 남북의 백성들의 등골만 이래저래 휘어질 뿐이다. 남북 분단을 해결해 줄 '초인'은 그 어디 있는가? 강원산골의 한 선비가 목 놓아 그 영웅을 기다린다. 그만이 나라와 겨레를 살릴 것이다.

함흥 덕산 광산, 늘려져 있는 400여 구의 시신 가운데 아들을 찾는 어느 아버지(1950. 11. 14.).
 함흥 덕산 광산, 늘려져 있는 400여 구의 시신 가운데 아들을 찾는 어느 아버지(1950. 11. 14.).
ⓒ NARA/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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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분단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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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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