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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피치 미술관'을 나서니 3시를 막 넘긴 시간. 7시간 가까이 '우피치'를 헤매고 다니느라 몸 여기저기서 고통들이 아우성을 칩니다. 그래도 마음만은 구름 속을 거닐다 온 것처럼 가볍습니다. 원래 오늘은 이후 일정으로 '베키오 궁전'과 '바르젤로 국립 박물관', '단테의 집' 등을 돌아보고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피렌체의 전경을 내려다볼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다시 '팔라티나 미술관'으로 길을 잡습니다. 하루에 두 개의 미술관을, 그것도 각자 메인 테마로 잡아도 될 정도의 미술관들을 이어서 본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하지만 나는 왠지 '우피치'에서의 감동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베키오 궁전'과 반대 방향으로 길을 잡습니다. 그랬더니 '우피치'는 끝까지 나를 황홀하게 합니다. 아르노 강변으로 향하는 '우피치'의 바깥 기둥 곳곳에 그들이 있는 것입니다. 피렌체와 토스카나가 낳은 나의 영웅들, 단테, 복카치오, 마키아벨리, 지오토, 페트라르카, 그리고 갈릴레이까지. 한 명이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들의 조각상이 자꾸 내 발길을 붙잡습니다. 하지만 이래서는 정말 이후 일정이 엉망이 될 것 같아 억지로 그들을 외면하고 '베키오 다리'를 건넙니다.  

메디치 가문의 경쟁 상대였던 피티 가문의 궁전은 이후 엘레오노라에게 매각되어 메디치 가문의 소유가 됩니다. 지금은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 피티 궁전 메디치 가문의 경쟁 상대였던 피티 가문의 궁전은 이후 엘레오노라에게 매각되어 메디치 가문의 소유가 됩니다. 지금은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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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티 가문이 메디치 가문을 이겨보고자 짓기 시작했다는 거대한 '피티 궁전(Palazzo Pitti)'. 하지만 결국은 앞서 브론치노의 그림에서 만났던 코시모 1세의 부인, 엘레오노라에게 매각되어 결국 메디치 가문의 소유가 된 '피티 궁전'은 현재 여러 개의 미술관과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허락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팔라티나 미술관(Galleria Palatina)'과 '현대 미술관(Galleria d'arte Moderna)'에만 집중하려고 합니다. 

표를 사고 압도적인 느낌의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궁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화려하게 치장된 궁전 실내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미로처럼 이어진 방들엔 또 내 눈을 황홀하게 할 만한 작품들이 나타납니다. 보티첼리, 프라 필리포 리피, 조르조 바사리, 루벤스, 카라바조 등 거장들의 작품들이 '우피치' 못지않은 규모로 전시되고 있습니다(그리고 젠틸레스키에게 몹쓸 짓을 한 아고스티노 타시의 작품도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에서도 그러했듯이 궁전을 미술관이나 박물관으로 꾸민 경우에는 관람 환경이 썩 좋은 편이 못됩니다. 우선 궁전 주인들의 개인 컬렉션처럼 꾸민 전시실이다 보니 체계가 없이 벽들 전체를 작품들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림 하나하나를 확인하며 작가들까지 찾아내어 감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시실들 대부분이 커다란 창을 통해 자연광이 들어와 작품들에 반사되어 감상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폴 루벤스, '전쟁의 결과', 피렌체 팔라티나 미술관. 짧은 시간 탓에 바로크의 거장 폴 루벤스의 '전쟁의 결과' 같은 대작도 어쩔 수 없이 스쳐지나갑니다.
▲ 전쟁의 결과 폴 루벤스, '전쟁의 결과', 피렌체 팔라티나 미술관. 짧은 시간 탓에 바로크의 거장 폴 루벤스의 '전쟁의 결과' 같은 대작도 어쩔 수 없이 스쳐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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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관람 환경도 좋지 않은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겨우 3시간 남짓. 시간에 쫓겨 작품들을 제대로 볼 수나 있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괜히 일정을 바꾸었나 하는 후회도 밀려옵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마음을 다 잡고 '선택과 집중'이란 여행 선배들의 조언에 따르고자 합니다. 수많은 대가들의 작품들, 보티첼리 '시모네타의 초상', 프라 필리포 리피 '성 모자 상', 카라바조 '잠자는 큐피드', 루벤스 '전쟁의 결과', 젠틸레스키 '유디트' 등을 말 그대로 눈물을 머금고 그림과 제목만 확인하고는 휙휙 지나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내가 선택한 작가는 다시 라파엘로와 티치아노입니다. 

'팔라티나 미술관'에서 '우피치'에서 만난 '방울새의 성모'와 '자화상'에게서 느낀 것과 비슷한 정도의 감동을 느끼게 해준 작품은 라파엘로의 '대공의 성모'와 '의자의 성모'입니다. 당시 유럽 화단에서 라파엘로의 성모에 대한 묘사는 (지금도 그렇지만) 가장 완벽한 여성의 전형으로 평가되었을 만큼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특히 '대공의 성모'는 자연스러운 인물 표현으로 우아하고 섬세한 여성의 모습을 잘 보여주죠.

라파엘로, '대공의 성모', 피렌체 팔라티나미술관. 저명한 미술사가 곰브리치는 명저 '서양미술사'에서 이 작품에 대해 최고의 평가를 남겼습니다.
▲ 대공의 성모 라파엘로, '대공의 성모', 피렌체 팔라티나미술관. 저명한 미술사가 곰브리치는 명저 '서양미술사'에서 이 작품에 대해 최고의 평가를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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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성모'란 특이한 이름은 나폴레옹에게 쫓겨난 토스카나의 대공 페르디난드 3세가 망명 중일 때 수하를 통해 이 작품을 피렌체에서 구입한 데 따라 지어진 것입니다. 페르디난드 대공은 그의 힘든 여정 동안 항상 이 작품을 지니고 다녔다고 하는데 온화한 성 모자 상이 그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겠지요.

(카라바조가 이 그림을 보고 배웠을 것 같은) 어두운 배경 위에 온화하게 묘사된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위대한 미술사가 곰브리치의 평가에 따르면 '대공의 성모'는 이해하기 쉬운 가장 단순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 단순함은 공허하지 않고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입체적으로 묘사되어 어둠 속으로 물러나 있는 것 같은 성모의 얼굴은 다빈치의 스푸마토 기법을 본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확고하고 애정 어린 자세의 어머니에게 안겨 있는 아기 예수의 동작 역시 자연스럽고 무척 편안해 보이죠. 인물들의 배치와 색채, 빛, 표정 등 모든 요소가 어우러져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곰브리치는 그의 명저 '서양미술사'에 이런 평가를 남겼습니다. 

이 구도에는 긴장감이라든지 부자연스러운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다. 이 그림은 마치 이것 이외의 다른 모습으로 보일 수 없으며 태초부터 그렇게 존재했었던 것 같이 보인다.

이제 또 다른 라파엘로의 성모상, '의자의 성모'를 봅니다. 이 작품은 반대로 나폴레옹이 피렌체를 정복한 후, 루브르로 가져갈(약탈할) 첫 번째 작품으로 삼았을 정도로 아름다운 작품입니다(참고로 '피티 궁전' 안에는 피렌체 점령 후 나폴레옹이 사용했다는 욕조도 있습니다). 작품 속의 성모는 로마 '바르베리니 국립 미술관'에서 만났던 라파엘로의 연인 라 포르나리나를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전까지의 성모상들과 달리 훨씬 더 여성의 외적 아름다움이 강조된 느낌이죠.

라파엘로, '의자의 성모', 피렌체 팔라티나미술관. 라파엘로는 자신의 연인을 모델로 이전까지의 성모상들과 달리 훨씬 더 여성의 외적 아름다움이 강조된 성모상을 그렸습니다.
▲ 의자의 성모 라파엘로, '의자의 성모', 피렌체 팔라티나미술관. 라파엘로는 자신의 연인을 모델로 이전까지의 성모상들과 달리 훨씬 더 여성의 외적 아름다움이 강조된 성모상을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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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한 이목구비에 그윽한 눈길. 어머니 같기도 하고 처녀 같기도 한 이 아름다운 여인은 성모에 대한 신성과 연인에 대한 라파엘로의 애정이 절묘하게 혼합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이 성모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다른 성모들과는 달리 관객, 아니 '라 포르나리나'와 같이 작가를 빤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 더 매혹적일 수밖에 없죠. 

아기 예수를 그윽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는 인자한 '대공의 성모'와 자신의 연인을 모델로 인간적 아름다움을 묘사한 '의자의 성모', 그리고 '우피치'에서 보았던 '방울새의 성모'까지. 라파엘로는 똑같은 성 모자 상도 이렇게 다른 방식의 개성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팔라티나 미술관'의 또 다른 매력은 이들 외에도 라파엘로의 작품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시라는 신체적 결함을 가감 없이 사실적으로 묘사한 '바티칸 사서 톰마소 잉기라미의 초상'이라든지 '아뇰로 도니의 초상',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현실적 버전처럼 느껴지는, 그래서 약간은 코믹하게도 느껴지는 '도니 부인의 초상', 도니 가문의 딸인 '도나의 초상', '성 가족 상', '에스겔의 비전' 등 그동안 화집에서만 접했던 라파엘로의 수많은 작품들을 이곳 '팔라티나 미술관'에서는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라파엘로 '도니 부인의 초상', '에스겔의 비전', 피렌체 팔라티나미술관. 한 자리에서 라파엘로의 명작들을 여러 편 만날 수 있는 것도 팔라티나 미술관의 매력입니다.
▲ 도니 부인의 초상, 에스겔의 비전 라파엘로 '도니 부인의 초상', '에스겔의 비전', 피렌체 팔라티나미술관. 한 자리에서 라파엘로의 명작들을 여러 편 만날 수 있는 것도 팔라티나 미술관의 매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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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내가 주목한 작품은 티치아노가 그린 '참회하는 막달레나 마리아'입니다. 이 작품은 티치아노 자신과 동료 화가들이 무수히 많이 복제한 작품입니다.

흔히 창녀로 알려진 막달레나 마리아. 그녀는 예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의 죄를 참회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눈물이 예수의 발에 닿자 향유로 그 눈물을 닦았다고 하죠. 그런데 최근의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성경 어디에도 막달레나 마리아를 '창녀'라고 묘사한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 단지 그녀의 출신지가 당시 도덕적으로 부패한 곳이라 '죄의 여자'로 서술했는데 그것을 창녀로 해석했다고 하죠. 심지어 베드로의 후계로 일컬어지는 초기 교황들이 여성 제자였던 막달레나 마리아를 고의로 폄하했다는 의혹도 제기됩니다. 하지만 근래에 막달레나 마리아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모두 지켜본 유일한 증인이기 때문에 '사도들 중의 사도'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티치아노, '막달레나 마리아', 피렌체 팔라티나미술관. 발표 당시에 성녀를 너무 관능적으로 묘사했다고 해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 작품입니다.
▲ 막달레나 마리아 티치아노, '막달레나 마리아', 피렌체 팔라티나미술관. 발표 당시에 성녀를 너무 관능적으로 묘사했다고 해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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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그 막달레나 마리아의 참회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처음 발표 당시에는 성녀를 너무 관능적으로 묘사했다고 해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때마침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으로 가톨릭 교회는 성화에서 육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누드를 금지하게 되었죠. 그래서 이후 티치아노는 '막달레나 마리아'를 누드가 아니라 옷을 입은 상태로 묘사하게 됩니다. 비록 관능적인 묘사이긴 하지만, 금세라도 쏟아질듯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눈을 보고 있자면, 눈물을 저토록 아름답게 묘사한 그림은 다신 없을 것이라 느껴집니다.

그런데 '막달레나 마리아'가 걸려 있는 반대편 벽에 내 눈을 의심할 만한 그림이 한 점 있습니다. 그것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초상'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분명 라파엘로의 그림입니다. 몇 시간 전 내가 '우피치'에서 만나고 온 그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떡하니 티치아노의 작품이라 적혀 있지 않겠습니까? 순간 혼란스러웠습니다. 이것을 어찌 이해해야 될지 막막하기도 했죠. 하는 수 없이 가까이 있는 직원에게 더듬더듬 물어봅니다.

티치아노,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초상', 피렌체 팔라티나미술관. 우피치미술관에서 만난 라파엘로의 그림을 티치아노가 모방한 그림으로 거장에 의한 거장의 오마주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초상 티치아노,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초상', 피렌체 팔라티나미술관. 우피치미술관에서 만난 라파엘로의 그림을 티치아노가 모방한 그림으로 거장에 의한 거장의 오마주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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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내가 알기로 라파엘로의 작품이다. 그런데 왜 여기에 티치아노의 작품으로 걸려 있는가?"

그러자 그 직원은 아주 천천히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친절하게도 가르쳐 줍니다.

"이 그림은 티치아노가 라파엘로의 그림을 모방한 작품이다."

그러면서 작품 아래 액자에 적혀 있는 작은 글씨를 가리킵니다. 그랬습니다. 그곳에는 "Capia da Raffaello"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직원의 말에 따르면 티치아노가 라파엘로의 그림 중 가장 좋아하는 이 그림을 모방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거장에 대한 또 다른 거장의 오마주인 셈이지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꽃 피운 거장들의 경쟁과 협력이 여기서도 느껴집니다.

구이도 레니, '클레오파트라', 피렌체 팔라티나미술관. 구이도 레니 특유의 인물 묘사에 죽음과 관능이 함께 표현되어 있습니다.
▲ 클레오파트라 구이도 레니, '클레오파트라', 피렌체 팔라티나미술관. 구이도 레니 특유의 인물 묘사에 죽음과 관능이 함께 표현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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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의 작품과 같은 방에는 구이도 레니의 명작 '클레오파트라'도 있습니다. 구이도 레니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운 얼굴로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데 이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이도 레니는 이 작품 이외에도 독사에게 가슴을 물려 사망하는 클레오파트라를 여러 편 남겼습니다. 과감한 사선 구도로 타나토스와 에로스, 즉 죽음과 관능을 함께 묘사한 구이도 레니. 그는 어쩌면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을 빙자해 성적 황홀경을 묘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약간은 부끄러운 상상을 해 봅니다.

구이도 레니의 그림을 끝으로 서둘러 '팔라티나 미술관'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팔라티나 미술관'은 다시 '현대 미술관(Galleria d'arte Moderna)'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주로 이탈리아 근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현대 미술관'에도 하나하나 시선을 끄는 명작들이 이어졌지만 벌써 폐관 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습니다.

휙휙 명작들을 스쳐지나가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작품 앞에서 나는 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안토니오 시세리의 명작, '에케 호모!(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 때문이었다. 나는 이 극적인 장면의 작품을 여기서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안토니오 시세리, '에케 호모(이 사람을 보라)', 피렌체 현대미술관. 온갖 정치적 계산을 하고 있는 빌라도, 그리고 그 앞에 가시관을 쓴 채 한 없이 고독한 예수의 모습이 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 에케 호모 안토니오 시세리, '에케 호모(이 사람을 보라)', 피렌체 현대미술관. 온갖 정치적 계산을 하고 있는 빌라도, 그리고 그 앞에 가시관을 쓴 채 한 없이 고독한 예수의 모습이 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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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 앞에서 비스듬히 서서 재판을 받고 있는 예수. 로마 총독 빌라도는 아래에 모인 군중들을 향해 소리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 빌라도는 이른바 인민재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갖 정치적 계산을 하고 있는 빌라도, 그리고 그 앞에 가시관을 쓴 채 한 없이 고독한 예수의 모습. 빌라도의 말 "이 사람을 보라!"는 정말 많은 함의를 담고 있는 극적인 대사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애초에 예수에게 죄가 없음을 안 빌라도는 그를 벌 줄 생각이 없었죠. 하지만 유대 성직자들과 권력자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빌라도. 그래서 그는 예수에게 찢어진 망토를 입히고 가시관을 씌워 로마 병사들로 하여금 '유대인의 왕'이라 조롱하게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않고 군중들에게 "이 사람을 보라!"라고 외친 것입니다.

빌라도의 속마음은 이런 것이었죠. '이 사람이 무슨 죄가 있는지 나는 모르겠으니 살리든 죽이든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 그런데, 유대인 권력자들에게 선동당한 군중의 대답은 "십자가에 매달라!"였습니다. 신 이전에 인간인 예수, 그의 정면이 아닌 뒷모습만으로도 이토록 극적인 장면이 있었던가? 이전까지 나는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시 온 몸에 소름이 돋습니다.

'에케 호모'를 끝으로 '피티 궁전'을 나옵니다. '우피치 미술관'과 '팔라티나 미술관'. 하루 사이에 두 개의 미술관 관람이라는 무지막지한 일정을 마치고 나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습니다. 두 개의 미술관을 이어주는 '베키오 다리'를 건너는데 발바닥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허청허청 내 의지가 아닌 발길이 나를 이끌어 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왜일까요? 화려하지만 따뜻함이 숨어있는 피렌체의 야경 속에서 나는 그저 행복하기만 합니다.

'우피치'와 '팔라티나'. 하루에 두 개의 미술관 관람이란 무지막지한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아름다운 피렌체의 야경 속을 걸었습니다.
▲ 베키오 궁전의 야경 '우피치'와 '팔라티나'. 하루에 두 개의 미술관 관람이란 무지막지한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아름다운 피렌체의 야경 속을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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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편. 시에나편으로 이어집니다.)

○ 편집ㅣ박순옥 기자



태그:#팔라티나미술관, #피티궁전, #라파엘로, #대공의성모, #이탈리아미술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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