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위로공단> 공식 포스터.

영화 <위로공단> 공식 포스터. ⓒ 엣나인필름


지난해, 종로 보신각 앞을 지나다닐 때면 꼭 마주하는 풍경이 있었다. 케이블 방송업체 씨앤앰(C&M)의 하청업체 해고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 지난해 7월 농성을 시작한 이들은 거의 반년 동안 해고자 복직과 고용 및 생존권 보장을 요구했다. 당시 나는 취업 준비를 보신각 근처에서 했고 (결국 취업이 되진 않았지만) 반 년 내내 그들의 투쟁을 목격했다.

부끄럽지만 고백한다. 이 땅의 노동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도 정작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좀 더 세련되고 신선한 파업의 방식은 없을까?', '저런 낡은 방식으로 대중들에게 소구할 수 있을까?', '대중들의 감성에 맞지 않는 파업이 의미가 있을까?' ...나는 혼나도 싸다. <위로공단>을 보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직접적인 답을 내리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려운 질문에 대한 어려운 답을 찾아 영화는 에두르고 또 에두른다. 연관 없는 이미지들이 노동자들의 목소리 중간중간 삽입된다. 카메라는 더덕더덕 페인트가 일어난 시멘트 위를 줄 맞춰 걸어가는 개미들을 바짝 응시한다.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까마귀 떼가 전선에 모여 앉아있다. 눈을 가린 소녀는 낡은 건물을 더듬거리듯 내려온다.

낯선 이미지들은 기묘하게 이야기를 확장한다. 예를 들어 암 진단을 받고 머리를 깎으며 울었다는 삼성반도체 노동자의 인터뷰 뒤에 가발공장의 가발과 마네킹 장면으로 이어진다. 흰 눈가리개를 한 소녀는 눈만 내놓는 흰 작업복의 삼성반도체 여성 노동자와 대비된다. 한진중공업 사태의 한가운데 있었던 김진숙씨가 대공분실을 얘기하는 장면 뒤에 새빨간 정육점의 도축된 짐승들의 화면이 나온다. 나 대신, 각인된 이미지가 그들의 목소리에 공명한다.

목소리를 '여성'으로 한정시킨 것도 '낯섦'의 연장선에 있어 보인다. '여성'이라는 한정은 '노동'의 의미를 배가시킨다. 임신과 출산 외에는 직장에서 쉴 틈 없는 각박한 삶. '여성'은 '성별'의 의미보다 '약자'와 동의어에 가깝다.

영화에서 "박근혜가 성실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는 사회라고 했는데, 난 성실히 일했는데"라고 말하는 여성노동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장면에서 '여성' 노동자의 처지는 '여성' 대통령 박근혜와는 동떨어져 보인다. 우리가 익숙하게 소비해온 생각은 '성실한 사람이 성공한다'는 말에 가깝다. 이제껏 약자의 목소리는 낮게 파묻혀왔다. 그렇기에 영화가 여성을 주목하는 부분도 사뭇 낯설게 느껴진다.

영화가 무기력을 일깨우는 방식, '낯설음'

 영화 <위로공단> 중 한 장면. 성실한 노동자도 성실함의 대가를 받기는 어렵다.

영화 <위로공단> 중 한 장면. 성실한 노동자도 성실함의 대가를 받기는 어렵다. ⓒ 엣나인필름


이 낯설음은 잔혹하고 슬픈 이야기를 듣는 중요한 접근법이다. 영화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슬픔에 대한 우리의 무기력을 일깨운다.

지난 1978년 동일방직 회사 측이 노동조합의 대의원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서 여공들에게 똥물을 끼얹은 동일방직 사태, 1979년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면서 농성을 하던 여성 노동자 중 한 명이 강제진압과정에서 사망한 YH무역 사건, 2005년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로 인해 촉발된 기륭전자 사태, 2007년 까르푸-홈에버 사태, 2011년 한진중공업 사태, 2015년 현재까지 해결되지 못한 삼성 백혈병 사태까지.

슬픔은 빼곡하다. 또한 그래서 익숙하다. 익숙해선 안 될 일이었다. 당사자들의 슬픔은 그토록 생생하고 입체적인 것이었으니 말이다.

영화는 슬픔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방식조차 낯설다. 영화 대부분은 인터뷰가 차지한다. 인터뷰로 영화는 '사건'도, '노동자'도 아닌 어느 '사람'을 만나게 한다.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인터뷰이의 볼, 턱, 눈을 차례로 비추거나 뒷모습을 담는다. 공간과 사람을 겹쳐 흐릿하게 하는 식이다. 그들의 성실함, 모멸감, 슬픔, 절망, 회사에 대한 애정 같은 복합적인 감정이 목소리의 떨림, 입매, 눈빛들로 구성된다. 마침내 영상은 정보를 전달하는 대신 감정을 실어낸다.

"부모님한테 다달이 용돈을 10만 원이라도 정기적으로 드리고 싶은데 그게 어려워요. 열심히 일하면서 가정과 부모, 이런 사회의 어떤 부분들을 책임지면서 살아가고 싶은데 그게 안 된다는 거요."

이런 목소리가 담기는 순간, 영화를 보는 관객은 울컥해진다. 인터뷰를 했던 다산 콜센터120의 여성 노동자는 조끼를 입은 채 지하철역 앞에서 구호를 외친다. 떨림은 영상을 타고 전해져온다. 마이크를 타고 전해지는 그들의 말소리는 마이크를 꼭 잡은 두 손처럼 바들바들 떨린다. 저 사람이 저 자리에 서고 싶었을까.

사람 된 도리를 하기 힘든 이들은 투쟁의 장으로 떠밀린다. 노동운동에 관심은 없었으나 사회가 그들을 노동운동으로 내몰았다는 낡은 서사. 아무런 나레이션 없는 그 장면으로도 영화는 새로웠다.

달마다 10만 원이라도 부모님께 부쳐드리고, 아이가 다니고 싶다는 학원에 보내고, 혹시나 모를 노년의 질병에 대비하고. 그런 꿈을 꾸는 것이 너무도 벅찬 이들. 그래서 투쟁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이젠 공장 대신 마트와 콜센터, 비행기에 상존한다. 영화가 뼈아픈 지점은 우리가 이 수많은 엄마를, 이모를, 누나를, 그리고 '나'를 외면해왔다는 것이다.

'선택할 수 없는 싸움'이 멈추기를

 <위로공단>은 여성 노동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카메라 앞에서 말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위로공단>은 여성 노동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카메라 앞에서 말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 엣나인필름


욕망이랄 수도 없는 평범한 꿈들을 목소리로 내기까지 그들은, 기실 '우리'는 얼마나 곤란한 세월을 겪어야 했는가. 중년이 된 대우 어패럴의 여성 노동자는 스물 남짓한 여공 시절 "나이키(운동화)가 신고 싶었다"고 까르르 웃는다. 어느 노동자는 첫차를 타는 이들은 모두 노동자라고 한다. 그들은 그토록 성실했다.

그 성실한 노동으로 나이키 운동화 한 켤레 신을 수 없는 사회 구조가 과연 정당한가. 또한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요구하는 그들의 절박한 목소리가 공명하고 있는 사회인가. 이 물음들은 영화 내내 머릿속을 메운다. 문제는 '그렇다'고 답하기는 쉽지 않다는 점이다.

"선택할 수 있는 삶이 아니었어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며 한진중공업 부산 영도조선소 35m 높이의 85호 크레인에 올랐던 김진숙씨는 말했다. '좀 더 세련된 파업의 방식은 없을까?', '저런 낡은 방식으로 대중들의 감성에 소구할 수 있을까?', '대중들의 감성에 소구되지 않는 파업이 의미가 있을까?' 글 앞에서 던졌던 질문에 영화가 답이 됐다. 영화는 '선택할 수 없는 싸움'이라는 답을 에둘러 전한다.

지난 17일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노동개혁 안 하면 선진국 될 수 없다"고 말했다. 부디 정부가 내놓은 '노동 구조 개혁'이 '선택할 수 없는 싸움'을 멈추는 방안이길 바란다. 부총리가 말하는 '선진국'이 '선택할 수 없는 싸움'이 없는 나라이길 바란다.

위로공단 임흥순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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