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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여름, 유다정과 양수빈은 인턴으로 평화네트워크의 식구가 되었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둔 둘은 대표님의 우연한 제안으로 '해방·평화 70년 기념 평화 기행'에 합류하게되었습니다. 2015 평화기행은 참여연대, 역사문제연구소, 인권재단 사람, 한반도 문제를 걱정하는 학자 모임 ASCK (Alliance of Scholars Concerned about Korea)등의 시민단체, 학술단체가 주최했습니다. 8월 8일 학술행사를 시작으로, 총 3일 간 안산, 서울, 철원, 양주 등지를 돌며 한반도의 해방과 분단 이후 70년, 질곡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번 평화기행은 두 새내기 인턴들이 평화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또한 앞으로 이어질 2편의 기사를 통해 다른 시민들과 이 경험을 나누고자 합니다.  - 기자 말

2015 평화기행의 2~3일차, 화천·철원·동두천 일대를 탐방했다. 화천과 철원, 동두천에는 아직도 곳곳에 분단과 전쟁의 파편들이 도사리고 있고, 여전히 대규모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냉전의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다.

월남파병용사 만남의 장
 월남파병용사 만남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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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0일 일정은 화천 월남파병용사 만남의 장에서 시작했다. 원래 이곳은 베트남전쟁에 본격적으로 투입하기 전 장병들을 교육하던 곳이었다. 주월한국군사령부를 비롯한 7개부대가 이곳을 훈련장으로 활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부대별로 방명록을 배치하다보니, 그 양이 엄청나다고 한다.

'안보관광'에 꼭 들어가는 월남파병용사 만남의 장. 강원도 등은 이 곳이 '참전군인에게 마음의 고향'이 될 것이라 자부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베트남전에 대해 아픈 기억을 가진 이들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또한 이 만남의 장은 국가정신을 보수적으로 재생산하고, 당시 정권을 미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만남의 장에는 무릎을 꿇고 있는 베트남인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의 모형이 세워져 있었 적이 있었지만, 적절하지 않다는 반발에 따라, 없앴다. 이외에도 평화수호참전기념탑 위에 독수리를 밟고 비둘기를 날리는 남녀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보수 평론가 지만원씨를 비롯한 베트남참전전우회, 우익단체 등의 문제제기로 인해 2015년 초에 철거되었다. 밟혀진 독수리가 미국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이유였다.

위의 조형물(왼쪽)이 없어진 평화수호참전기념탑의 모습(오른쪽)
 위의 조형물(왼쪽)이 없어진 평화수호참전기념탑의 모습(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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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파병이 60년대 중반 한국경제에 이바지 한 점, 그리고 용사들의 노고를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2015년 현재, 평화로 대변되는 가치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3사단 멸공 OP(관측소, 철원군 백골부대)

3사단 멸공OP
 3사단 멸공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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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사단 멸공 OP가 위치한 곳은 '철의 삼각지'(김화·철원·평강)의 중심지역이다. 이 관측소에서는 북한군의 초소와 선전마을, 오성산, 백마고지와 저격능선 등을 눈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오성산은 한국전쟁 당시 김일성이 한국군 군번줄을 세 트럭으로 갖다줘도 맞바꾸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로 전략적 요충지다. 북한 정부가 한국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자부하는 것은 이 오성산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관측소에서 본 DMZ(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은 너무나 아름답고 조용해 보였다. 하지만 보이는 곳곳이 지형능선 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장소였다. 또한 백골부대 홍보영상에서 본 백골 구호 "부관참시 김일성 능지처참 김정은" 등은 이곳이 한반도의 최전방이라는 것, 그리고 아직도 냉전시대에 머물러 있음을 상기시킨다.

대마리 지뢰피해자와의 만남

지뢰피해자 김호식씨가 발언 중이다.
 지뢰피해자 김호식씨가 발언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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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대마리두루미평화관에서 지뢰 피해자를 만났다. 대마리는 민통선 인접지역에 위치한, 박정희 정권이 건설한 대규모 재건촌(전략마을, 대북선전마을)이다. 국방력 강화와 대공 심리전, 식량증산 등이 목적이었다. 당시 정부가 집과 식량까지 지원해 주겠다고 하여 지원자만 300명이 넘었다. 정부는 몸과 사상이 건강한 자들을 선별했고, 1967년 철원·연천 지역 제대군인 150명이 입주하기 시작했다.

대마리 또한 한국전쟁 격전지로 사방에 지뢰가 깔린 위험지역이었다. 2000년대까지 총 23건의 지뢰사고가 발생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입주 당시 정부 책임을 물지않겠다는 각서를 썼기 때문에 지뢰 피해나 기타 사고에 어떠한 보상이나 생활보조를 받지 못했다. 지뢰피해자 김호식씨는 "(지뢰가 터지면)굵은 덩어리들만 주워 장사지냈고 장례비로 막걸리 한 말 못 받았다"고 말했다.

설상가상으로, 지뢰를 감수하며 농사를 짓기 시작하자 도망갔던 지주들이 찾아와 땅의 소유를 주장했다. 하지만 입주민들을 보호하는 법은 없었다. 김호식씨는 또한 "법원에서는 땅을 사고파는 것으로 합의를 보게 했고, 여태 소작인 노릇을 하기도 한다"라고 전했다.

또 다른 지뢰피해자 김문빈씨는 이에 그동안의 소득을 요구했더니,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불한당 소리를 들었다"며 "(2011년도에 평화나눔 등) 여러 성금이 많이 모아졌지만 피해자 의료복지 '사업'에만 쓰고, 생계보조 등으로는 단 10원의 보상도 못 받았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대한민국이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화천·철원, 그리고 이곳 사람들은 아직도 전쟁을 기억하고, 또 겪고 있다. 평화기행 3일차는 평화라는 거대 담론 속에서 잊히고 있는 전쟁 피해자들, 그리고 국가의 역할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봤던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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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평화네트워크 홈페이지(http://www.peacekorea.org)에도 게재됩니다.



태그:#2015 평화기행, #DMZ, #철원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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