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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화정>.
 드라마 <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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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창대군의 누나, 정명공주의 삶을 다루는 드라마 <화정>은 광해군이 쫓겨난 이후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초반에 등장한 광해군은 퇴장하고, 요즘 방영분에서는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가 나라를 이끄는 모습이 다루어지고 있다.

드라마 속의 인조는 승자답지 않다. 그는 불안하고 초조하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정명공주다. 인조는 세력을 갖고 있는 정명공주를 항상 껄끄러워한다. 최근 방영분에서는 정명공주를 반역죄로도 몰려 했다가, 여의치 않아 실패하기도 했다.

물론 드라마 속 장면에는 과장과 허구가 많다. 인조가 정명공주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인목대비가 죽은 뒤 그 주변에서 누군가를 저주하는 데 사용된 듯한 물건이 나오면서부터다. 이때는 인조가 왕이 된 지 9년 뒤였다. 이 이전만 해도 인조는 정명공주에게 한없이 좋은 조카이자 후원자였다. 드라마에서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인조가 노골적으로 싫어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지만, 이것은 실제 사실과 거리가 있다.

하지만 인조가 의심했던 것만큼은 실제 사실과 일치한다. 인조는 정명공주가 자신을 왕위에서 몰아내려고 한다고 의심했다. 의심병이 어찌나 심했던지,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설명된 것처럼, 특별한 이유 없이 아프기라도 하면 '공주가 어디선가 나를 저주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정명공주는 광해군 시대보다도 인조시대에 훨씬 더 많은 스트레스를 겪어야 했다.

인조의 콤플렉스는 기본적으로 정통성이 취약한 데서 나왔다. 인조는 광해군보다도 정통성이 취약했다. 광해군은 임금인 선조의 서얼이라서 설움을 받았다. 인조는 서얼이 아니라 서얼의 아들이었다. 선조의 서얼인 정원군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서얼은커녕 서얼의 아들이었으니 광해군보다 정통성이 더 약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인조는 쿠데타라는 비정상적 절차를 거쳐 집권했다. 물론 '올바른 상태 즉 정(正)의 상태로 되돌린다(反)'는 뜻의 반정(反正)이란 명분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쿠데타 당시에 그는 여론의 전폭적 지원을 얻지 못했다. 이 점은 쿠데타가 벌어진 1623년에 있었던 왕실 혼사에 대한 한양 사대부들의 거부감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 해 하반기에 인조는 아들의 배우자를 구하기 위해 사대부 집안의 딸들 중에서 지원자를 받고자 했다. 그런데 사대부 집안들의 거부감이 이례적으로 심각했다. 원래부터 왕실과의 혼인을 기피하는 게 일반적인 분위기이긴 했지만, 이 해에는 그것이 너무나도 심각했다. 

인조 1년 윤10월 27일자(양력 1623년 12월 28일자) <인조실록>에 따르면, 한양 사대부들의 기피가 하도 심각해서 지금으로 치면 서울시 구청 공무원들이 사대부 집안을 일일이 뒤지면서 처녀들을 수색해야 했을 정도였다. 이때 맹인 점쟁이들까지 동원됐다. 대문 앞에서 점을 쳐서 처녀를 숨겼나 안 숨겼나를 알아낼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왕실과의 혼사에 대한 전통적인 거부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조 정권에 대한 한양 지배층의 거부감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사건이었다. 이렇게 수도 한양의 지배층한테서도 제대로 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출발했으니, 인조의 정통성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인조(김재원 분).
 인조(김재원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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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인목대비 승인 통해 합법성 획득

그렇게 정통성이 취약한 인조의 입장에서 볼 때 정명공주와 그 어머니인 인목대비(선조의 후처이자 광해군의 젊은 새엄마)는 인조 자신의 정통성을 보장해주는 버팀목 같은 존재였다. 쿠데타 당시 인조는 인목대비의 승인을 통해 합법성을 획득했다. 그래서 인조 정권은 태생적으로 인목대비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명공주는 인목대비의 딸이자 동지였다. 정명공주는 광해군 정권 하에서 어머니와 함께 덕수궁(서궁)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그는 광해군 시대의 반정부 세력 가운데서 상징적 존재 중 하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인조는 인목대비는 물론이고 정명공주한테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관심이 너무나 지나쳐져서, 정명공주가 혹시라도 배신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인조의 콤플렉스는 친아들인 소현세자를 향해서도 발산되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간 소현세자는 그곳에서 오히려 입지가 훨씬 더 좋아졌다. 그는 청나라 조정의 지지까지 얻어냈다. 그러자 인조는 청나라가 자기를 몰아내고 세자를 왕으로 세우지 않을까 해서 세자를 미워했다. 그만큼 자신감이 없었던 것이다. 끌려간 지 8년 만인 1645년에 돌아온 소현세자가 귀국 2개월 만에 독살로 의심되는 죽음을 맞이한 것도 인조에 대한 세상의 의구심을 더욱 더 짙게 만들었다.

인조의 콤플렉스는 귀양 중인 광해군에 대해서도 발산됐다. 인조는 광해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낸 뒤에도 항상 그를 의식하며 살아야 했다. 집권 2년차인 1624년에 이괄의 난이 터졌을 때는, 반란군이 혹시라도 광해군을 추대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광해군의 유배지를 일시적으로 충청도 태안으로 옮기기도 했다. 한양에서 조금이라도 더 먼 곳에 둬야만 광해군의 한양 귀환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뒤 세월이 흘러 명나라가 약해지고 여진족의 위세가 등등해지자, 인조는 광해군의 유배지를 강화도 서쪽에 있는 교동도로 옮겼다. 여진족에게 항복한 병자호란 뒤에는 유배지를 저 멀리 제주도로 옮겨버렸다. 여진족과의 화친을 도모했던 광해군이 혹시라도 정치적으로 부활할까봐 무서웠던 것이다. 이렇게 인조는 평민 죄인으로 전락한 광해군에 대해서도 콤플렉스를 느끼며 살아야 했다. 쫓아낸 자가 정신적 고통을 느끼며 살았던 것이다. 

 광해군(차승원 분).
 광해군(차승원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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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증으로 고생한 광해군, 인조보다 오래 살다

반면에 광해군은 상대적으로 홀가분한 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권좌를 빼앗겼다는 상실감, 쿠데타 직후에 부인과 아들 부부를 잃었다는 상실감은 컸지만,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도 무려 18년간을 더 살았다. 임금으로 살았던 기간보다 3년을 더 살다가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조가 55세에 죽은 것과 대비된다. 모진 고통과 압박을 받으면서도 그 정도로 살았다는 것은, 광해군이 유배 기간 중에 정신적으로 강인하기도 하고 초연하기도 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광해군은 본래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이었다. 특히 정신건강이 불안했었다. 광해군 2년 4월 23일자(1610년 6월 14일자) <광해군 일기>에 따르면, 그는 한음 이덕형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어려서부터 열이 많아 화증이나 울열증으로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툭하면 화를 내는 증상과 몸속 열로 인해 속이 답답하고 괴로운 증상으로 시달렸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정신적으로 편치 못한 생활을 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툭하면 화를 내고 가슴이 울컥울컥했던 유배 이전의 삶과 비교하면, 유배 이후 광해군의 삶에서는 좀 의외의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 예전 같으면 참을 수 없었을 일들을 용케도 잘 참곤 했던 것이다. 광해군 시대에 청년기를 살았던 조극선이란 관리의 문집인 <야곡삼관기>에 따르면, 강화도 유배 시절에 광해군은 경비 군관들이 큰방을 차지하고 자신은 작은 방으로 내몰리는 수모를 겪었다.

또 인조의 손녀사위인 정재륜이 궁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공사견문록>에 따르면, 제주 유배 시절에는 시녀가 "영감이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등등을 운운하며 고함을 치고 자신을 모욕하는 것까지 감내했다. 그럴 때도 광해군은 고개를 숙인 채 탄식만 했다고 한다.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18년간이나 살았다는 것은, 유배 시절의 광해군이 정신적으로 좀 편해진 상태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마음의 상처가 지워지지는 않았지만, 이전과 비교하면 정신적으로 나아진 게 분명했다. 화증이나 울열증으로 고생했던 예전과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었다. 쫓아낸 자가 정신적 고통을 느끼는 동안에, 쫓겨난 자는 상대적으로 편한 심리적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인조는 광해군이 혈맹인 명나라를 배반하고 계모를 유폐시켰다는 이유로 광해군 정권을 전복시켰지만, 그 뒤로 각종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남은 생을 보내야 했다. 인조는 국제질서가 광해군의 예견대로 흘러가는 것까지 목도해야 했다. 혈맹인 명나라가 서편으로 기울고 여진족이 신흥 강자가 되어 동편에서 떠오르는 것을 목격하면서, 광해군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나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인조는 더욱 더 괴로웠을 것이다.

반면에 광해군은 강화도·교동도·제주도의 바다 바람을 쐬며 세상을 등진 채 비교적 편한 마음으로 유배 생활을 했다. 물론 상처가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지만, 세자 시절이나 임금 시절과 비교하면 정신적으로는 분명히 편한 삶이었다. 쫓아낸 자가 우는 동안에 쫓겨난 자는 웃으며 여생을 보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 편집ㅣ장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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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 못하나,발해고(4권본,역서),패권 쟁탈의 한국사,신라 왕실의 비밀,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상고사(역서),조선 노비들,왕의 여자,철의 제국 가야,최숙빈,한국사 인물통찰,동아시아 패권전쟁 등. www.kimjongs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