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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륙 최대의 담수호인 청해(靑海)호 주변을 오토바이 탄 남자가 달리고 있다. 청해를 품은 칭하이성 시닝(西寧)시에서 ‘2015 최치원 중국전’이 열렸다.
 중국 내륙 최대의 담수호인 청해(靑海)호 주변을 오토바이 탄 남자가 달리고 있다. 청해를 품은 칭하이성 시닝(西寧)시에서 ‘2015 최치원 중국전’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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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시인이자 문장가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908 이후) 선생이 중국에 돌아왔다. 그가 17년 동안 체류한 당(唐)나라를 떠나 신라로 귀국(885년)한 지 정확히 1,130년 만이다. 지난 13~16일 중국 내륙의 최대 담수호가 있는 칭하이(靑海)성의 시닝(西寧)시에서 처음으로 '2015 최치원 중국전'이 열린 것을 가리킨다.

'동국유종'(東國儒宗)이나 '동국문학의 시조'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최치원은 오히려 한국보다 중국에서 더 대접받는 '한류의 원조'다. 중국의 최치원 관련 연구 논문만도 500편이 넘는다. 그에게 제2의 고향인 중국 강소성 양주(揚州)시는 2005년 중국 외교부로부터 최치원기념관 설립을 허가받아 2007년에 개관했는데, 이는 중국 정부가 외국인 기념관 설립을 허가한 첫 사례다.

이를 계기로 지난 10년 동안 학술토론회 등 최치원을 매개로 한 한-중 교류 행사가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서예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예술의전당-한중문화우호협회-동북아최치원연구회가 공동주최한 '2015 최치원 중국전'은 한중문화우호협회가 2007년부터 주관해온 '한중연(韓中緣) 문화축제'의 일환으로 개최되었다. 서예전은 청해성을 출발해 9월 양주시, 11월 서울시에서 순회 전시를 하게 된다.

당대의 문장가 최치원을 1130년만에 호출한 시진핑 주석

최치원의 ‘정체’를 드러낸 초상화. 경남 하동 운암영당의 최치원 진영(眞影, 1793년)을 보면 근엄한 유학자의 모습(왼쪽 사진)이지만, X-레이 촬영사진(오른쪽) 속에는 서책 뒤에 숨은 동자(童子)들이 나타나 있어 그가 실제로는 도교의 신선이라는 얘기가 있다.
 최치원의 ‘정체’를 드러낸 초상화. 경남 하동 운암영당의 최치원 진영(眞影, 1793년)을 보면 근엄한 유학자의 모습(왼쪽 사진)이지만, X-레이 촬영사진(오른쪽) 속에는 서책 뒤에 숨은 동자(童子)들이 나타나 있어 그가 실제로는 도교의 신선이라는 얘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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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은 857년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태어났다. 당시 대표적인 6두품 집안이었던 경주최씨 사람들은 대체로 관료나 승려로 활동하며 유교와 불교에 관심을 가졌다.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신라에서 6두품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신라 17관등 가운데 6등위에 해당하는 아찬 이상의 벼슬에는 오를 수 없었다. 골품제의 제약 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했던 6두품들은 당나라 유학의 길을 많이 선택했다.

장일규 (사)동북아최치원연구회 이사장(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에 따르면, 당시 경주최씨는 경문왕~효공왕 때에 파견된 도당(渡唐) 유학생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다.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해 열 살 때 사서삼경을 읽었다"는 기록이 전할 만큼 총명한 최치원은 12살에 국비유학생으로 동아시아의 중심인 당(唐)에 가서, 18세에 외국인으로서는 최고의 성적으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했다. 그리고 25세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중국에서 문명을 날렸지만 28세에 신라에 귀국했다.

그는 38세에 망해가는 신라를 구하고자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를 올렸다. 그러나 골품제의 제약과 진골 세력의 견제로 개혁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52세(908년)까지 주유천하 하다가 합천 가야산에 잠적했다. 이후 신선이 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그의 사망연도가 미상인 것은 908년까지 남아있던 행적에 근거한다.

칭하이(靑海)성의 한 소수민족 주민이 한중연 문화축제 알림판을 보고 있다. 중국 중서부 지역에 위치한 청해성은 황하강의 발원지이자, 티베트족 등 다양한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청정지역이다.
 칭하이(靑海)성의 한 소수민족 주민이 한중연 문화축제 알림판을 보고 있다. 중국 중서부 지역에 위치한 청해성은 황하강의 발원지이자, 티베트족 등 다양한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청정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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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을 1,130년만에 호출한 것은 뜻밖에도 시진핑(習近平)이다. 시진핑 주석은 올해 초 서울에서 열린 '2015 중국 방문의 해' 개막식 축하메시지에서 "동쪽 나라의 화개동은 호리병 속의 별천지네"[東國花開洞 壺中別有天]라는 최치원의 시 '호중별천'(壺中別天)을 직접 인용해 한국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다. 화개동은 경남 하동의 지리산 쌍계사와 칠불사 계곡 일대를 말한다.

시 주석은 2013년 6월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국빈방문 때도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니 긴 바람이 만리를 통하네"[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라는 최치원의 시 '범해'(泛海)를 인용해 한-중 우호의 전통을 강조했다. 이 시는 최치원이 당에서 신라로 귀국하는 배 안에서 읊은 것으로 전해진다. 시 주석은 이 시구를 통해 새로운 한-중 관계를 천년 전의 인연으로 불러낸 것이다.

서예전의 주제는 '장심풍월'(壯心風月)

최치원중국전 및 한중연문화축제 개막전에는 자오샤오화(?少?) 중국국가예술기금위원회 이사장, 최재천 의원, 하오펑(?鵬) 청해성 인민정부 성장, 취환(曲歡) (사)한중문화우호협회 회장, 션홍씽(申??) 청해성 문화신문출판청장(사진 왼쪽부터) 등이 참석했다.
 최치원중국전 및 한중연문화축제 개막전에는 자오샤오화(?少?) 중국국가예술기금위원회 이사장, 최재천 의원, 하오펑(?鵬) 청해성 인민정부 성장, 취환(曲歡) (사)한중문화우호협회 회장, 션홍씽(申??) 청해성 문화신문출판청장(사진 왼쪽부터) 등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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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주석의 각별한 관심 탓인지 최치원중국전과 한중연문화축제 개막전에는 하오펑(郝鵬) 청해성 인민정부 성장을 필두로, 바오이즈 청해성 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션홍씽(申红兴) 청해성 문화신문출판청장, 자오샤오화(赵少华) 중국국가예술기금위원회 이사장 등이 대거 참석했다.

이번 서예전의 주제는 '장심풍월'(壯心風月)이다. 최치원이 지은 '양섬 수재의 송별시에 답하다'라는 시에 나오는 "우리 마음 변하지 말고 뒤에 만나서, 광릉의 풍월 속에 술잔을 나누세"[好把壯心謨後會 廣陵風月待銜杯]라는 시구에서 따왔다. 최치원은 당나라를 떠나면서 지인들에게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서예전은 최치원이 1,130년 전에 남긴 약속을 이루는 행사인 셈이다.

장 교수에 따르면, 신라와 당의 유교와 불교, 도교를 모두 이해한 사상가였던 최치원은 28권의 시문집을 비롯해 한국 고대의 인물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의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그는 귀국 후에 신라 고유의 '풍류'(風流)를 중심으로 유(儒)-불(佛)-도(道) 3교의 사상적 융합을 꾀했다. 이번 서예전 또한 한-중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최치원의 시를 재해석해 풍류를 필묵으로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고 한다.

서예전을 기획한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는 "사상가로서 최치원은 무(巫)를 바탕으로 유-불-선(仙) 3교 회통의 우리사상 전형을 '풍류'로 처음 정의해낸 인물이자 그 자신의 생애실존과 사상 모두가 유가와 도교의 회통체인 '풍류도인'"이라고 규정했다. 후세인들이 그를 해동문종(海東文宗)이나 해동유종(海東儒宗)으로 추앙하고, 전국 30여곳의 영당(影堂) 사우(祠宇)에 모신 것이 이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물론 퇴계 이황(李滉, 1501~1571)과 같은 조선의 유학자는 '최치원은 불교에 아첨한 사람인데 외람되게 문묘에 배향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할 정도로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의 대문호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저서에서 "고운 최치원은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처음 해낸) 천황(天荒)을 깨치는 큰 공이 있었으므로 우리나라 학자들이 모두 종장으로 삼았다"고 밝혔다.

최치원 모신 전국의 사우-서원 30곳, 한류 문화콘텐츠로 부활 

최치원은 당나라를 떠나면서 지인들에게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서예전은 최치원이 1,130년 전에 남긴 약속을 이루는 행사인 셈이다.
 최치원은 당나라를 떠나면서 지인들에게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서예전은 최치원이 1,130년 전에 남긴 약속을 이루는 행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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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현재 남아있는 최치원 관련 사우(祠宇)-서원(書院)은 전국에 걸쳐 30여곳이나 된다. 조선중기의 무성서원(1484, 전북 정읍)과 서악서원(1561, 경북 경주)을 비롯해 조선후기의 지산영당(1737, 광주 대촌)과 아산영당(1888, 경북 울진), 그리고 근대의 부성사(1907, 충남 서산), 농산정(1930, 경남 합천), 가야서당(1940, 경남 합천), 문창서원(1969, 전북 군산)에 이르기까지.

이동국 큐레이터에 따르면, 이렇게 조선조를 거쳐 일제 식민기와 근대에 들어도 활발하게 사우와 사당이 만들어진 것은 시대가 지날수록 사람들이 최치원을 존숭해왔다는 증좌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1,130여 년 전의 세계인 최치원이 중국과 한국 문화교류의 상징적 인물로 새롭게 뜨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의 결과인 셈이다.

최치원의 무(巫)에 바탕한 유불선 통합사상을 숭모한 사우와 서원 그리고 진영(眞影)이 있는 곳은 중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문화한류의 거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최치원이 발자취를 남긴 지방자치단체들 사이에선 그를 문화한류 브랜드로 활용하기 위한 경쟁이 뜨겁다. 창원시는 최치원 유적지를 탐방하는 '최치원의 길'을 조성했고, 하남시는 지난해 11월 최치원 도서관을 개관했다. 함양군은 최치원 역사공원 조성을 추진 중이다.

특히 경주시는 지난 7월 최치원 유적지가 있는 전국 8개 지자체와 '고운 최치원 인문관광도시연합 협의회'를 구성하고 상호교류를 통해 관광 상품화하는 데 힘을 모으기로 발표했다. 그러자 협의회에서 배제된 충남 홍성군의 최씨 종친회 및 기념사업회에서 8월초 보도자료를 발표해 반발하기도 했다. 한-중 우호와 문화교류의 시조인 최치원이 1,130년만에 중국인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한류 문화콘텐츠로 새롭게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바오이즈 청해성 정치협상회의 부주석(사진 앞)이 최재천 의원과 함께 한-중 문화축제에 참가한 청해성 예술단원들을 격려하고 있다.
 바오이즈 청해성 정치협상회의 부주석(사진 앞)이 최재천 의원과 함께 한-중 문화축제에 참가한 청해성 예술단원들을 격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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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청해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한중연 문화축제는 ▲한국 국악방송예술단의 연주 ▲중국 청해예술단의 '아름다운 아가씨' 공연 ▲한국 국가대표 태권도 시범공연단의 시범 공연 ▲청해예술단의 중국 소수민족 민속의상 쇼 ▲한국 난타공연단의 난타 등 공연 프로그램과 ▲충청남도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등의 전시관이 운영되어 호평을 받았다.

올해와 내년은 한-중 양국에 각각 '중국 관광의 해'와 '한국 관광의 해'이다. 한중연문화축제를 주관해온 취환(曲歡) (사)한중문화우호협회 회장은 "한중연 문화축제는 앞으로도 한-중 인문교류와 양국 국민들의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태그:#최치원, #한국연 문화축제, #칭하이(靑海), #시닝(西寧), #최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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