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협녀, 칼의 기억> 포스터.

영화 <협녀, 칼의 기억> 포스터. ⓒ 영화 홈페이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고 말한 게 소설가 황석영이었던가? 아니면, 그 이전 시대 어느 철학자였던가?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예술 분야에서만은 그렇지 않다. 그 안에서 사람들에게 '새로움'을 보여주고자 하는 열망을 삭제한다면 '예술'이란 존재 자체가 무용한 게 아닐까.

인상주의시대 화가들은 그 시대의 주류 화풍을 뛰어넘기 위해, 자연주의시대 작가들은 사실주의 혹은, 근대적 모더니즘으로 한걸음 더 나가기 위해 악전고투를 펼쳤다. 자고로 '좋은 예술'이란 대세를 이룬 기존질서에 대한 반역에 다름 아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구태를 답습하거나, 남의 것을 유사하게 옮겨오는 모방을 예술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건, 모조품이거나 복제품이다. 예술의 한 장르임에 분명한 '영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위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질문 하나를 던져본다. 최근 개봉한 <협녀, 칼의 기억>은 진품일까? 아니면 모조품이나 복제품일까? 영화를 연출한 박흥식은 전작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인어공주> <사랑해, 말순씨> 등을 통해 일상에서 포착되는 삶의 미세한 연결고리를 물기 어린 섬세함으로 표현하는 재주를 보여준 감독이다.

그런데, 일상이 아닌 거대 역사, 미시적 감정이 아닌 장대한 스케일에 주눅이 든 탓일까. <협녀, 칼의 기억>에선 15년이 넘는 장편영화 연출경력이 무색하도록 길을 못 찾고 헤매는 것 같다. 영화라는 '요리'를 주도해야 할 주방장이 아닌, 기본적인 칼질조차 서툰 초짜 주방보조의 모습이다.

감독은 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까?

고려왕조는 한때 무인들이 지배했다. 다들 알다시피 그 시절엔 유약한 문신(文臣)을 온전히 제압한 무신(武臣)들이 국가권력의 핵심으로 자리한 때다.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최충헌 등으로 대표되는 무신들은 그 출신성분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힘과 배짱 하나로 왕과 문신들을 허수아비로 앉힌 채 실권자가 돼 기세등등했다.

사실 힘이 곧 정의가 되고 권력이 됐던 건 고려의 무인정권 시절만이 아니다. 중국의 고대왕조 은나라의 주왕은 맨손으로 집채만 한 호랑이를 잡아 가죽을 벗겨내던 당대 최고의 완력가였다. '가장 힘센 사람=왕'이란 등식이 성립되던 시절. <협녀, 칼의 기억>은 바로 이 '힘이 곧 권력이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뜻을 세우고 칼을 들어 부정한 국가권력으로부터 백성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세 명의 청년. 그들 사이의 사랑과 우정, 배신과 증오를 그려내고, 여기에 '살부(殺父) 콤플렉스'와 숨겨놓은 반전 코드까지를 보여주고 싶은 열망에 들뜬 영화 <협녀, 칼의 기억>. 그러나, 어디선가 이미 본 듯한 엉성한 스토리라인과 집중력 잃은 연출은 이런 감독의 열망을 배신한다.

 완력과 담대함을 무기로 최고 권력자에 오르는 무인의 역할을 맡은 이병헌.

완력과 담대함을 무기로 최고 권력자에 오르는 무인의 역할을 맡은 이병헌. ⓒ 영화 홈페이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공을 갈고닦아, 결국엔 그 원수 앞에 훌쩍 자란 모습으로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마흔다섯 살인 내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봐오던 무협영화의 기둥 줄거리였다. <협녀, 칼의 기억>의 줄거리는 거기서 단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 흔하디흔한 스토리를 뛰어넘는 새롭고 실험적인 장면 연출이라도 있어야 했다. 그런데, 감독은 그 기대마저도 배반한다.

화려하고 풍성한 고전 복식을 차려입고 느리게 촬영된 화면 속에서 서로의 무술 실력을 겨루는 장면은 장예모의 <영웅>에서 이미 봤던 것이고, 타악기 연주를 등에 지고 칼과 칼이 부딪치는 장면은 '이안이 연출한 <와호장룡>의 조악한 복제판'이란 비판을 피해가기 힘들 듯하다. <협녀, 칼의 기억>의 클라이맥스라 할 흩뿌리는 눈발 아래 칼춤 추듯 결투를 이어가는 이병헌, 전도연, 김고은의 모습 역시 누가 봐도 왕가위의 <일대종사> 중 '기차역 결투신'과 판박이다.

고루한 스토리라인이 배우들의 힘까지 빼버린 게 아닐지

뻔한 이야기에 돌올한 복선 하나 없이 진행되는 영화의 흐름 탓일까. 배우들의 연기에서도 역동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스캔들을 별개로 하고, 객관적으로 보자면 이병헌은 보통 이상의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다. 전도연 또한 해외영화제에서의 수상경력 등으로 연기력을 검증받은 사람.

그럼에도, 둘을 함께 등장시킨 화면에서 매끄러움보다 잘못 맞물린 톱니바퀴의 어색한 삐걱거림을 느낀 건 나만일까? 특히 영화가 상영되는 시간 내내 젖은 눈망울을 한 채 감상적인 대사만으로 일관하던 전도연은 보기에 측은할 정도였다. 배우들이 능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이유는 뭐였을까. 에둘러 이렇게 말해보자. '좋은 배우'를 만드는 건 절반이 '좋은 시나리오'고 나머지 절반은 '좋은 연출'이다.

 <협녀, 칼의 기억>에선 전도연의 연기력이 100% 발휘되지 못한 듯하다.

<협녀, 칼의 기억>에선 전도연의 연기력이 100% 발휘되지 못한 듯하다. ⓒ 영화 홈페이지


조연을 맡은 이경영의 캐릭터는 또 어떤가. 등장의 이유조차 불분명한 그를 두고 1980년대 성룡이 주연한 코믹 무협영화에서나 보던 '빨간 코 술주정뱅이 사부'의 추억을 돌려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까?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협녀, 칼의 기억>의 '배우 사용 스킬'은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을 동네 뒷산에다 쏘아대는 격이다.    

감독과 배우와 여러 스태프들이 돈과 시간, 에너지를 쏟아 나름으론 최선을 다해 만들었을 영화를 두고 힐난이 과했다. 그러니, 각설하고.

'한국영화는 발전의 길을 걷고 있다'는 명제를 부정하는 관객은 갈수록 줄고 있다. 그러나, 그 '길'에 깔리고 있는 보도블록 속에는 모조품과 복제품도 어쩔 수 없이 섞이기 마련인 모양이다. 하기야, 인간이 사는 세상 어떤 공간이 진품만으로 휘황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세상과 영화는 닮은꼴'이라 말해온 것일지도.

○ 편집ㅣ이준호 기자


협녀 이병헌 전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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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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