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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5일 우리나라가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난 광복절입니다. 일본인들은 '종전기념일'이라고 애써 자신들의 침략을 감추고 있지만요.

그런데 광복절을 전후해서 역사적으로 살펴 보면, 지난 7월 29일은 미국과 일본이 자국의 제국주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110년 전(1905년) 태프트-카스라 밀약을 체결한 날이었습니다. 요즘 일본과 미국을 보면 한 세기가 넘게 지났지만 언제든 이처럼 불행한 밀약으로 우리나라를 예속의 구렁텅이로 빠뜨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게다가 오는 29일은 105년 전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년))를 맞아 국권을 빼앗긴 날입니다. 가장 기쁜 광복절이지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리나라에게 차꼬를 채우고 결박을 지은 날들이 역사 속에 두 눈 시퍼렇게 지워지지 않는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참담합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일본 정치권, 자민당과 아베 신타로 총리는 연일 위안부 강제 연행을 부정하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현재 2018년까지 아베의 총리직은 유지될 것으로 관망됩니다. 불보듯 뻔하게 아베 총리를 위시해 일본 극우들의 어리석은 폭주 기관차 행태는 계속된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수년 전부터 기획하고 써 온 장편 소설을 연재하려 합니다. 현재 약 90% 넘게 써서 종지부를 찍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한국의 기자 출신 작가와 일본의 한국 특파원 여기자 사이의 사랑을 중심으로 향후 일본의 광적 쇼비니즘이 자칫 독일 나치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저지른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와 같은 재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이야기의 뼈대로 삼았습니다.

결국 정치권이나 언론에게만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 없습니다. 한국이나 일본, 일본이나 한국에 살아가는 국민들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서로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이해해야만 양국의 미래가 온전해진다는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일본 극우가 일본 사회에 얼마나 퍼져있는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끔찍한 일들을 저지를 수 있는지도 살펴봤습니다.

앞으로도 이웃 나라로서 살아가야 할 한국과 일본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글을 썼고, 거의 피날레에 도달했습니다. 앞으로 극적인 긴장감과 감동을 주기 위해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부터 1화를 전해드립니다.

<제1화 Mea Culpa>

"저는 제 아이와 아내를 죽였습니다."

무겁고 낮은 목소리가 오히려 날카로운 비명으로 사람들을 자극한다. 한 성당의 지하 1층, 작은 방의 가라앉은 분위기가 잠시 술렁인다. 이내 시선이 다시 집중된다. 잠시 침묵은 이어진다. 모임의 다른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다음 이야기를 재촉한다. 집단 관음증에 걸린 사람들처럼 그의 벗은 모습을, 막장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처럼 다음 회의 파국을 궁금해 하는 눈빛이다.

면도를 하지 않은 얼굴에는 듬성듬성 콧수염과 턱수염이 불규칙하게 자라있다. 머리는 덥수룩하고 정리가 안 돼 어지럽다. 철지난 갈색 코듀로이 재킷에 넥타이까지 신경 써서 맸지만, 어딘지 모르게 강박에 사로잡힌 사람 같다. 부자연스럽고 갑갑한 차림이다. 아니 애처로운 몰골이다.

불안한 눈으로 주위 사람들을 힐끗힐끗 본다. 앞에 놓인 유리컵의 물을 한 번에 들이킨다. 그의 고백은 이어진다. 이야기가 슬로비디오처럼 흐느적거린다. 체념해서 덤덤한 것인지, 덤덤해서 체념한 것처럼 느껴졌는지 알 수 없다.

첫 직장으로 중소기업에서 웹디자이너로 일했다. 아내를 만난 것은 술자리였다. 아내 역시 술을 좋아했다. 술친구로 만나다 결혼했다. 신혼은 행복했다. 곧 아이를 가졌다. 거기까지가 그들의 행복이었다. 누가 먼저 불행을 불러들인지는 모른다. 임신 우울증에 시달린 아내의 신경은 늘 곤두섰다. 그런 아내를 두고 남편은 자꾸 밖으로 겉돌았다. 아내가 임신으로 끊었던 술에 손을 댔다. 그날은 아내와 남편 모두 술을 마셨다. 그는 회사일 때문에 '피치 못했다'고 강변했다. 아내는 혼자 힘들다며 악을 썼다.

술 취한 사람끼리 말을 섞지 말아야 했다. 말싸움은 손찌검이 됐다. 아내가 하혈했다. 병원을 찾았지만 늦었다. 사랑의 매개가 사라지고 나서 둘은 더 싸늘해졌다. 결국은 헤어졌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그는 뱃속 아이를 물리적으로, 아내를 심리적으로 죽였다. 음주로 인해 소홀히 한 회사에서 권고사직 당했다. 지금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생활한다. 과거를 후회한다. 결심이 두세 번 무너졌지만 지금은 금주한 지 두 달째다.

이렇게 몇몇 사람들의 반성과 회한이 이어졌다. 그리고 새 삶을 찾겠다는 각오, 거기에 대한 박수와 격려가 잇달았다. 그러나 K는 얘기를 들을수록 점점 지겨워진다. 판에 박힌 듯한 말과 말, 인생과 인생들. 기자 초년병 시절 경찰서를 출입했을 때 날마다 살펴봤던 흔티 흔한 사건일지나 다름없다. 다르다면 사건일지는 법과 처벌의 영역이었고, 알코올 중독자 모임은 사회와 치유의 영역이었다는 점뿐이다.

'술주정뱅이들'의 문제를 함께 풀어보자는 명분은 좋다. 익명으로 개인사를 얘기하고, 스스로 책망하고,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반복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다. 단지 소심하고 의지가 약한 사람들이 찾아 잠시 위안을 받는 곳이 알코올 중독자 모임이다. 술주정뱅이면 정신과를 찾든지 아니면 요양원으로 들어가야 맞다. 자율적으로 안 되면 약물로 처치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나와서 몇 마디 한다고 해서 술꾼이 금세 술 끊는 일은 흔치 않다. 아니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과 뒤풀이로 술 한 잔 하자는 사람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술 권하는 사회다? 직장 생활에서 불가피하다? 모두 맞는 말이지만 또한 모두 틀린 말이다.

술을 마시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술을 마시고 일어나는 일도 오롯이 개인에게 돌아간다. 핑계나 변명이 필요 없다. 술로 인해 가족에게 고통을 준다면 술 마신 당사자와 그 가정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그것이 심해져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래서 범법으로 이어진다면 그때는 당연히 법적으로 책임져야 할 사안이다. 다행히 그 전이라면 사회나 국가의 도움을 요청하면 되고. 기회를 놓쳐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사회나 국가는 법에 근거해 그에게 '제재'라는 강제력을 행사하면 된다. 술에 대해서는 단호해야 한다. 일말의 주저나 지체는 알코올 중독자에게나 사회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K의 생각일 뿐이다. 스스로를 속이려는 무의식일까. 자신 역시 술을 마시면서 자신을 학대하는 그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그렇게 초라해 보이기는 싫다, 무기력하게 보이기는 싫다는 게 은연 중 본심이다. 자신을 연민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싶은 무의식이 의식을 가장해 그렇게 배어나온다.

어쩌면 K가 자신도 기억 못하는 이른바 '블랙 아웃' 때문에 부끄러웠던 숱한 경험과 그로 인한 뜻하지 않은 결과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10여년 전 그의 하버드대학교 연수 시절 가장 친한 친구 리키를 잃은 것도 결과적으로 보면, 술 때문이었다. 리키는 시험을 마친 학기 말 기념 파티에서 술에 만취해 있었고, 그를 살해한 사람도 술에 절어 있는 홈리스였다. 경찰의 수사 결과가 발표됐을 때 석연치 않았다. 뚜렷한 살해 동기도 없었고 대학가에서 드물게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술 마신 중년의 홈리스가 리키와 다투다가 얼떨결에 과잉 자기방어를 하면서 총을 쏜 사건으로 마무리됐다. 그때 리키가 죽지 않았다면, 지금쯤 멕시코에서 유명한 저널리스트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만 K에게 앙금처럼 남아 있다.   

꼬리를 물던 잡념도 거기까지다. 엉덩이가 배기는 의자를 벗어나 슬그머니 빠져나온다. 지하에서 1층으로 뛰는 듯 걸어 올라간다. 마치 저열하고 음습한 분위기에서 벗어나려는 듯 서둘러 처연한 성당 건물을 나선다. 바깥 공기를 깊게 들이마신다. 상쾌하지 못한 기분을 숨과 함께 토해낸다. 성당 수녀님의 간청으로 오기는 왔지만 안 온 것만 못하다. 아니 괜히 왔다 싶다.

담배를 입에 문다. 불을 붙이지는 않는다. 거리에서조차 흡연이 금지된 지 오래다. 저녁시간이라 단속하는 사람도 없기는 하다. 그렇다고 눈총을 받아가며 기어이 담배를 피우고 싶지는 않다. 딱히 정해 놓은 곳은 없다. 그냥 걷는다. 목적 없이 배회한다는 말이 맞다. 늙은 말이 해 질 녘 집으로 향하듯 버스로 대여섯 정거장 떨어져 있는 '아지트'를 향하고 있다.

걸어가면서 사람들의 표정을 읽는다. 사냥을 하기 위한 조심스러운 암사자의 시선은 아니다. 범인을 잡기 위한 셜록 홈즈의 날카로운 눈빛도 아니다. 그냥 온전히 버릇처럼 관찰하는 것이다. 즐거운 사람보다 심각한 사람이 더 많다. 즐거워 보이는 사람은 과연 진정 행복할까. 심각한 사람은 무엇 때문에 그리 심각할까. 어울려 보이지 않는 커플들은 지금 서로에게 충실할까. 누군가를 기다리는 남자에게, 혹은 여자에게 그의 연인 혹은 지인은 과연 올까.

어쩌면 K가 사람들을 관찰하듯 사람들 또한 K를 관찰하는지도 모른다. 캐주얼한 옷차림에 청년이라기에는 나이가 많은 듯하고, 중년이라고 하기에는 젊은 사람이다.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사람들을 살피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호기심 많은 듯한 모습이 사람들 눈에 비친 K의 모습이다. 살아가는 동안 사람들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끊임없이 관찰자가 되는 동시에 관찰 대상이 된다. 하다못해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 속에서조차 마찬가지다. 익명에 숨어서 어떤 특정인이나 특정사건에 대해 '악플'을 달고 자신은 어둠속에서 음험하게 낄낄거리더라도 IP라는 자신의 '신분증명서'로 알게 모르게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게 된다. 물론 IP조차 속이려 들면, 한 꺼풀 더 가면을 쓰고 있는 셈이지만 그것은 프로들의 얘기다. '절대적'이라는 것은 신학에서나 나올 법한 수사다. 삶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더 어렵다.

하릴없는 관찰은 중단된다. 무심코 하얀 아까시 꽃향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 향이 수컷이나 암컷을 유혹하려는 인공적인 것이든, 근처 야산에서 스멀스멀 퍼져온 자연의 것이든 상관없다. 잠시 멈춰서 눈을 감는다. 숨을 깊이 들이킨다. 야성을 드러내는 거대도시의 비릿한 저녁 냄새와 순백의 아까시 꽃내음이 서로를 은밀하게 품고 통정한다. 5월의 현란한 봄날, 아니 이미 성큼 다가온 듯한 초여름 저녁 도심에서 갖는, 흔치 않은 사치를 누려 본다. 그 사치에 늘 익숙해졌으면 하고 헛되이 소망한다.

집이 언제나 그 자리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듯 2층짜리 살림집을 개조해 만든 카페 'live'는 상수동과 합정동 사이, 넓어진 홍대 앞, 아는 사람만 찾을 수 있는 주택가 후미진 막다른 골목에 있다. '아직도 이런 골목이 남아있을까'할 정도로 미로처럼 엉켜진 곳에 숨어 있어 수차례 헤매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카페 이름 때문에 라이브공연을 하는 곳으로 착각하기 십상이지만 공연은 없다. 단지 '살아있는', 그래서 '삶을 소중히 여기자'는 카페라는 뜻이란다. 누군가는 그랬다. '살다' 혹은 '살아있는'의 뜻 영어 'live'라는 단어는 거꾸로 읽으면 '사악한'이나 '악랄한'이라는 뜻의 'evil'이 된다고. 하기는 사악해야, 혹은 악랄해야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삶이기도 하다.

K가 이곳을 찾은지도 5년째다. 처음에는 지인의 소개로 왔지만 이제는 그가 더 단골이다. 혼자 갈 수 있고, 술 마시고, 말장난하기에 좋고, 집에서도 가깝기 때문이다. 여러 부류 사람들이 곧잘 어울리는 분위기도 마음에 든다. 더욱이 K 나이만큼 오래된 수 천 장 LP판들이 그의 젊은 날 하루하루처럼 꽂혀있어 꺼내보기 쉽기 때문이다. 

아직 이른 시간과 어울리지 않게 벌써부터 끈적끈적한 블루스가 흐르는 바에는 K 혼자다. 노트북을 켜고는 지난 한 주간 쌓인 이메일을 확인한다. 늘 그렇듯 대부분 쓸데없는 것들이다. 아직 미키로부터는 전화든 이메일이든 연락이 없다. 일과 관련된 몇몇 이메일에 대해 답장한다. 한 방송국에서 온 영화 평론, 딱히 평론이라기보다 영화 소개 기사를 마무리한다.

…유대계로서 자신의 어머니가 아우슈비츠에서 죽었고, 자신도 어릴 적 독일군의 사격 연습 표적이 됐던 끔찍한 과거를 가진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유명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은 연주하던 방송국이 독일의 폭격을 맞은 이후 유대인 집단 거주지 '게토'에서 생활한다. 그러다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본격화할 무렵, 가족들을 수용소로 떠나보내는 죽음의 행렬에서 우연히 같은 유대인 공안원의 도움을 받아 겨우 탈출한다.

폭격에 폐허가 된 게토 구역 한 건물에서 숨어살게 된 스필만은 자신을 도와주던 다른 유대인들마저 모두 떠난 이후 홀로 남아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겨우 생명만 연장하는 비참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추운 겨울 어느 날 너무나도 배고팠던 스필만은 먹을 것을 구하려고 건물을 뒤지다가 통조림을 발견한다.

그러나 통조림 따개가 없어 쇠막대기로 통조림을 따려다가 떨어뜨린다. 어렵게 찾은 통조림이 바닥에 구르면서 내용물을 쏟아내고, 허기진 스필만은 필사적으로 통조림을 잡기 위해 허둥댄다. 그 순간 독일군 장교의 군화가 보이고, 스필만은 얼어붙는다. 다행히 '착한 사마리아인'이었다. 그 장교가 스필만에게 직업이 뭐냐고 묻는다. 스필만은 '나는 피아니스트였다'라고 말한다. 이미 피아니스트였던 것은 과거니까.

스필만의 쇼팽의 '발라드 1번' 연주를 들어본 장교는 감동을 받고, 호의적이 된다. 그가 가져다 준 음식으로 연명하면서 살아간다. 시간은 흐르고, 나치는 퇴각하고, 그는 다시 바르샤바 방송국에서 말끔한 차림으로 연주한다. 자신과 관계없는 전쟁에서 유대인이라는 것만으로 예술의 모든 열정과 재능을 잃고, 오로지 생존만을 위해 살아야 했던 한 피아니스트. 비겁하게라도 살아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벤자민 프랭클린이 얘기한 대로 '선한 전쟁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의무 때문이 아니었을까.'라고…

전쟁이라는 사건 앞에서 예술가의 무기력을 절실히 보여주는 영화다. K는 자신도 그런 상황에 마주친다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을 안다. 현실적으로 겪고 있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이런 짧은 글들이라도 쓰는 이유는 그것이 밥벌이이기 때문이다. 기자 생활을 접고 나서 그가 정기적인 월급이나 연봉을 얘기해 본 지도 오래된다. 그때 그때 들어오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해야 하는 게, 그래서 일상을 살아가는 게 그의 지금 삶이자 그가 살아가는 이유다. 그래도 대부분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배우 로베르토 베니니가 열연했던 '귀도'처럼 그렇게 여겨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내 주인장 동갑내기 강 박사는 K가 늘 마시는 에일 맥주 한 잔에 곁들여 데킬라 더블 한 잔을 내놓는다.

"옐로 서브마린 K, 그렇지 않아도 김형기 실장이 당신을 집 나간 딸 찾듯  애타게 찾았어. 전화도 안 된다면서. 일 때문이라던데 연락 한 번 해봐. 그리고 제발 잠수를 타더라도 전화는 꺼놓지 말고."
김형기 실장에게 전화한다. 연결음은 계절을 잊고, 아직 비발디의 '4계' 중 겨울이다.

"K, 이따가 전화할 게."

급하게 답하고는 전화를 끊는다. 용건이 궁금해진다. '10년 지기' 언론계 선배인 김 실장은 잘나가는 A그룹 오너의 핵심인사이고, 현재 이사급 대외협력실장을 맡고 있다. 김 실장과는 같은 대학 동문이고 술친구라 친한 편이다. 하지만 그것 이외 삶이나 일에 대해서 별반 연관성이 없다. A그룹과 K도 관계없기는 마찬가지다.

덧붙이는 글 | 웹소설 사이트 '문피아(http://www.munpia.com/)에 일반연재로 올려놓았습니다. 여러가지 부족하지만 감히 용기를 내보았습니다. 시간 나는 대로 한번 들려서 응원해 주세요. 문피아 대문에서 검색창에서 작가명(체리보이)나 아니면 작품명(Another Holocaust)를 입력하면, 제 글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또 직접 들어오시려면 제 문피아 블로그( https://blog.munpia.com/donkey9)를 방문하셔도 되고요..



태그:#DONKEY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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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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