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캄보디아까지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알려진 이남이 할머니의 무덤 앞에서 두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고 있는 셋째 손녀딸 쟌니.
▲ 훈 할머니 묘 캄보디아까지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알려진 이남이 할머니의 무덤 앞에서 두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고 있는 셋째 손녀딸 쟌니.
ⓒ 박정연

관련사진보기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을 출발, 차를 타고 6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1시간 반쯤 달리니 '스꾼'이라 불리는 작은 읍내 교차로가 나타났다. 여기서 직진하면 캄퐁참주(州) 시내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가면 '앙코르와트'로 유명한 씨엠립이 나온다. 차가 교차로를 한 바퀴 돌아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조금 속도를 내더니 다시 왼편으로 꺾어 울퉁불퉁한 비포장길로 들어선다. 그렇게 5분쯤 더 달리니 이번에는 한적한 시골논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차가 더 이상 진입할 수 없는 작은 논둑길에 다다르자, 운전기사가 차 시동을 끄고는 기자를 향해 씩 웃는다. 다 왔다는 신호다. 이날 기자가 찾은 곳은 중국인들의 묘지가 모여 있다는 이 마을 공동묘지. 이름 모를 야생풀들이 흐드러지게 핀 들판을 따라 중국인 묘지가 드디어 눈앞에 나타났다. 대충 세도 100개는 넘을 듯했다. 캄보디아인들은 주로 화장을 해서 이런 큰 규모의 공동묘지를 보기 쉽지 않다.

이곳은 매장문화를 선호하는 중국화교들이 주로 묻히는 곳이다. 그런 탓에 시멘트를 발라 만든 묘비들엔 대부분 중국 한자가 페인트로 쓰여 있었다. 우선 한자로 쓰여 있는 묘비명부터 대충 훑기 시작했지만, 대부분 비슷비슷했다. 온몸에 땀이 흐르고 피로가 느껴질 무렵에서야 간신히 그분의 묘를 찾았다. 이남이. 할머니 이름 석 자가 눈에 들어왔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캄보디아에서 생을 마감한 할머니의 한국 이름이다. 묘비에는 그 분의 어린 시절 이름인 남이(南伊)라는 이름 대신 나미(那美)라는 한자어 이름과 함께 이씨묘(李氏墓)라고 쓰여 있었다. 심지어 할머니의 사망 날짜마저 잘못 표기되어 있었다. 실제 돌아가신 날짜는 2001년 2월 15일이다. 그런데 묘비에는 경진년(庚辰年), 즉 2000년 8월 17일 입(立)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나마 이 무덤이 다른 중국인의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든 것은 바로 옆 '조선(朝鮮)'이라는 글자 덕분이었다. '한국'이라는 한자도 쓸 만도 한데, 왜 조선이라고 적혀 있을까. 혹시 비슷한 묘를 잘못 찾은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함께 묘를 찾은 할머니의 손녀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묘가 맞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손녀딸들도 할머니의 사망년도가 잘못 적힌 이유에 대해선 답하지 못했다. 한자를 아는 손녀들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

손녀딸들과 매우 각별했던 훈 할머니

할머니 산소를 찾은 큰 손녀딸 시나, 둘째, 시나온, 셋째 쟌니의 모습 (왼쪽부터)
▲ 훈할머니의 손녀딸들 할머니 산소를 찾은 큰 손녀딸 시나, 둘째, 시나온, 셋째 쟌니의 모습 (왼쪽부터)
ⓒ 박정연

관련사진보기


이남이 할머니가 캄보디아에서 흔하지 않은 매장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셋째 손녀딸 쟌니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평소 유언 때문이라고 했다. 과거 할머니의 유골을 한국 고향 땅으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신문기사를 접한 적이 있지만, 이후 관련기사가 나오지 않아 할머니가 왜 캄보디아 땅에 묻힌 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할머니의 산소가 있는 곳은 생전 살던 곳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지척에서나마 고향이나 다름없던 이 마을을 보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손녀딸 쟌니가 미리 사온 과일과 향으로 간소하게 할머니 제사상을 차린다. 다른 3명의 손녀딸 첫째 시나와 둘째 시니웃, 막내 시나은도 잡풀더미를 걷어내고 할머니 묘 주변을 정리했다. 프놈펜 시내 슈퍼에서 산 한국산 소주 한잔을 올리고 우리 식으로 공손히 절을 했다.

손녀딸들과 할머니의 관계는 매우 각별했다. 할머니의 딸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손녀들은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할머니가 한국에 갈 때도 손녀딸들이 늘 함께 했다. 막내 손녀딸 시나은이 할머니 사진과 함께 신문기사 스크랩본도 꺼내서 보여주었다. 신문 사진 속에서 보았던 그 할머니였다.

50년 만에 찾은 할머니의 한국 이름은 '이남이'지만, 캄보디아에서는 여전히 '훈 할머니'로 통한다. 한국에서 우여곡절 끝에 피붙이를 찾기 전까진 언론들도 그렇게 불렀다. 할머니를 기억하는 교민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부른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출신이다. 17~18살로 추정되는 1943년 일본군에 붙들려 캄보디아까지 오게 됐다. 부산항을 거쳐 대만, 싱가폴 그리고 사이공을 거쳐 캄보디아까지... 힘들고 긴 여정이 있었다. 프놈펜까지 오는 과정에서 할머니가 겪었던 말로 못할 고통과 당시 처절한 삶은 이미 일부 언론과 책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할머니의 네손녀딸들은 할머니 관련 기사가 처음 나온 한국일보 기사를 비롯해 관련 기사들을 꼼꼼히 챙겨 이를 스크랩해 보관하고 있었다.
▲ 훈할머니 막내 손녀딸 시나은이 할머니 관련 기사를 들어 보이고 있다. 할머니의 네손녀딸들은 할머니 관련 기사가 처음 나온 한국일보 기사를 비롯해 관련 기사들을 꼼꼼히 챙겨 이를 스크랩해 보관하고 있었다.
ⓒ 박정연

관련사진보기


할머니의 존재가 밝혀진 것은 지난 1996년. 무역업을 하는 한국인 황아무개씨가 시장조사차 이 마을에 들렀다가 손녀딸 쟌니를 만나게 되고, 그녀의 외할머니가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할머니의 소식은 이듬해인 1997년 6월 13일 현지 영자신문 <프놈펜 포스트>를 통해 처음 보도됐고, AFP통신을 통해 전 세계에 타전되면서 <한국일보>를 통해 국내에 보도됐다. 할머니는 후원단체들과 기관의 도움으로 고국을 떠난 지 50여 년 만에 한국에 도착, 세간의 큰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고향 이름이 '진동'이었다는 사실 외에 별다른 기억이 없는 할머니는 두 달 넘도록 혈육을 찾는 데 매달렸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할머니에 대한 세간의 관심도 조금씩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모든 일이 해프닝으로 끝나나 싶었다. 할머니 역시 혈육 찾기를 포기하고 결국 캄보디아로 돌아가려던 무렵이었다.

70여 일 만인 1997년 8월 26일 경남지역 신문 <경남매일>이 훈 할머니의 혈육을 찾았다고 단독 보도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생존한 할머니의 친여동생 이순이씨와 올케 조선애씨 등 한국의 가족들을 극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유전자 검사를 통해 혈육임이 확인됐다.

할머니는 당시 법무부장관으로부터 직접 한국국적증서를 받아 무려 50여 년 만에 대한민국 국적을 되찾았다. 그해 10월 8일 할머니는 본적지 관할구청인 대구시 서구청을 찾아 '렁 훈'이라는 캄보디아 이름 대신 원래 이름 '이남이'로 국적회복 신고를 했다. 생년월일도 1924년 3월 2일로 정했다. 또 장조카 이상윤씨의 고모로 호적 입적 절차도 마쳤다. 손녀딸들도 한국에 와 가족들과 함께 살기로 했다.

그러나 고향이 그리운 할머니는 결국 수년 후 캄보디아로 다시 돌아갔다. 반 세기 넘게 살아온 캄보디아도 할머니에게는 또 다른 정든 고향이었고, 그곳에도 소중한 가족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지병인 당뇨병을 고치기 위해 그 후로 몇 차례 한국을 다녀간 적이 있지만, 할머니는 약 3년 후인 2001년 2월 15일 한 많은 삶을 뒤로 한 채 세상을 떠났다. 

한국행이 결정된 1997년 무렵 할머니는 손녀딸들과 살던 스꾼마을의 이 집을 팔고 한국으로 떠났다.
▲ 훈 할머니가 살던 스꾼 옛집 한국행이 결정된 1997년 무렵 할머니는 손녀딸들과 살던 스꾼마을의 이 집을 팔고 한국으로 떠났다.
ⓒ 박정연

관련사진보기


이날 성묘를 마치고 잠시 할머니와 손녀들이 살던 스꾼 마을 옛집에 들렀다. 집은 도로변에 인접해 있어 찾기 어렵지 않았다. 할머니가 살던 집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허름한 목조로 된 2층 집은 누군가 사는지 인기척이 들렸다. 허름한 오토바이들도 여럿 있는 것으로 보아 가정집 대신 사무실 용도로 사용되는 듯했다. 할머니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함께 이 집을 찾은 손녀딸들의 얼굴을 보니 옛 고향집에 대한 짙은 향수가 밀려오는 듯했다.

할머니는 손녀딸들과 함께 캄퐁참 수꾼 마을의 작은 집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의지할 곳조차 없던 할머니에게 손녀딸들은 할머니의 유일한 친구였다. 아무에게도 자신이 한국인이며 일본군에 의해 여기까지 끌려왔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 기자들이 몰려들자 할머니의 과거에 대한 소문은 온 동네에 퍼지고 말았다.

아들을 킬링필드 때, 큰 딸은 병으로 먼저 보내

캄보디아는 여성의 정조관념에 상당히 민감하다. 캄보디아 속담이 이런 말이 있다. '남자는 금이요 여자는 천이다'. 금은 땅에 떨어져도 물로 씻으면 되지만, 흰 천은 한번 땅에 더렵혀지면 다시 깨끗해지기 어렵다는 말이다. 여성의 정조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런 정조관념 때문에 할머니는 자신의 과거 삶을 오랫동안 비밀에 부쳐왔다. 하지만, 기자들이 찾아들기 시작하고 할머니에 대한 소문이 온 마을에 퍼지자 더 이상 그 작은 마을에선 살 수 없었다. 한국에 다녀온 후 한국에서 살기로 마음을 굳힌 뒤 할머니와 손녀들은 그 집을 팔고 마을을 떠났다.

다시 차를 타고 할머니의 손녀딸들이 사는 프놈펜으로 갔다. 그곳에선 손녀 넷이 함께 작은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한쪽 벽에 낯익은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산소에서 보여준 사진과 같은 사진이었다. 손녀딸은 1995년쯤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할머니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기 전에 찍은 사진이었다. 그리고 할머니 사진 위로 피부가 하얀 노신사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할머니의 첫 번째 남편이었다.

맨 위쪽에 걸린 사진은 할머니의 첫남편  다다쿠마 쓰토무씨의 모습이다. 손녀딸들은 지난 1997년 무렵 일본인 할아버지와 처음이자 마지막 통화를 했다고 전했다.
▲ 할머니를 모신 작은 제단 앞에서 기도를 올리는 셋째 손녀딸 쟌니의 모습 맨 위쪽에 걸린 사진은 할머니의 첫남편 다다쿠마 쓰토무씨의 모습이다. 손녀딸들은 지난 1997년 무렵 일본인 할아버지와 처음이자 마지막 통화를 했다고 전했다.
ⓒ 박정연

관련사진보기


그는 1943년 캄보디아에 온 후 일본군 장교로 재직했는데, 훈 할머니와는 2년간 동거했으며, 둘 사이에 외동딸 카오를 뒀다. 할머니가 한국말보다 일본말을 더 잘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후 여러 이유로 둘은 헤어졌고, 1953년 일본인 남편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훈 할머니는 일본인 남편이 도와주지 않아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며 원망했다고 한다.

그 뒤 캄보디아 남자와 만나 재혼한 훈 할머니는 세 자녀를 낳았다. 지독할 술주정뱅이였던 캄보디아인 남편과의 결혼 생활도 오래가지 않았다. 1970년대 캄보디아를 휩쓴 암울한 역사를 할머니도 피하지 못했다. 캄보디아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크메르 루주'에 잡혀 캄보디아 부거쪽 파일린으로 잡혀갔는데, 이후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일본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딸 카오 역시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가지 못했다. 남편의 외도로 혼자서 아이들 다섯을 기르다 병을 얻어 세상을 일찍 떠난 것이다. 할머니는 또 다시 인생의 힘든 시기를 경험해야 했다.

자신을 버린 일본인 남편에 대한 훈 할머니의 원망이 적지 않았을 텐데, 손녀들이 일본인 외할아버지 사진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소 의아했다. 하지만 큰 손녀딸 시나는 "그래도 우리 혈육이기 때문이니까..."라는 말로 대신했다.

손녀딸 쟌니는 1997년 무렵 일본인 할아버지와 단 한 번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군 전역 후 당시 아시아태평양 국회의원연합 일본의원단 사무국장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수화기를 타고 들려온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반가움 대신 냉랭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지금 바쁘니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그것이 할아버지가 한 마지막 인사말이었다고 한다. 그 후 손녀딸들은 프놈펜 주재 일본대사관을 통해 일본인 할아버지와의 연락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첫째 손녀딸 시나는 "아마도 지금쯤이면 100세 넘어 분명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할머니가 살아 있는 동안엔 한국정부로부터 대락 500달러의 생활비를 지원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할머니가 캄보디아로 돌아온 지 불과 3년 만에 돌아가시자 이마저도 끊겼다. 셋째 손녀딸 쟌니는 "할머니가 그리고 가고 싶어 하던 고국을 찾고 친동생 등 가족들을 만난 사실은 기쁘지만, 그 과정에서 말로 표현하지 못할 여러 가지 힘든 일이 많았다"고 말했다.

한국을 오가는 과정에서 후원회와 일부 독지가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할머니 당뇨병 치료차 한국과 캄보디아를 오가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어려워져 결국 캄보디아에선 힘든 생활을 이어가야만 했다고. 그나마 좋은 남편들을 만나 프놈펜에 집을 얻고 미용실을 운영해 자매들이 함께 돈을 벌고 의지하며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 아이에게 한국인의 피도 섞여 있는 만큼 할머니의 조국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요... 그럴 기회를 누군가 제공해준다면 좋겠어요."

셋째 손녀딸 쟌니가 말했다. 해질 무렵이 돼서야 손녀딸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할머니와도 마지막 인사를 했다. 차에 시동을 거는 순간 다시 먹구름이 갑자기 몰아쳤다. 그리고는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할머니와 남아있는 손녀딸 가족들의 모습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현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정부에 등록된 사람은 238명, 생존해 있는 할머니는 모두 47명이다. 남은 피해자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분들의 원한이 풀리기를 소망해본다. 그리고 이남이 할머니같은 개인적 비극도 이 땅에 다시는 없기를 바란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태그:#캄보디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훈할머니, #이남이, #LENG HUN
댓글5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라이프 캄보디아 뉴스 편집인 겸 재외동포신문 기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