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가 오면 피하지 않았죠. 모험을 계속해야 하니까요. 내 영역을 넓히려면 새로운 걸 시도해야 하니까요."

로빈 윌리엄스는 자신의 말을 진실하게 실천한 연기자였다. 그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에서 시트콤 연기자로, 다시 정극 배우로, 그리고 아카데미상 수상 배우로 끊임없이 자신을 담금질해 왔다. 우리가 기억하는 로빈 윌리엄스는 작품의 편차는 있을지언정 평균 이하의 연기만은 보여준 적이 없는 배우였다. 그리고 8월 11일은 그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 9일, EBS <세계의 눈>은 '로빈 윌리엄스' 편을 방영했다. 고 로빈 윌리엄스의 1주기 추모 방송 격이었다. 미 PBS 방송국의 < Robin Williams Remembered >를 옮겨온 이 다큐멘터리는 코미디언으로 출발한 명배우 로빈 윌리엄스의 연기 궤적을 반추했다. 과거 활동들과 생을 마감하기 전 나눈 인터뷰, 또 사후 동료들의 회고로 이뤄졌다.  

"나는 엄청나게 많은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 뱀파이어는 늘 신선한 피를 찾는데, 난 아직도 배울 게 많고 세상에는 배울만한 것들이 넘친다. 실수도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로빈 윌리엄스는 이렇게 사람을 관찰하는 것을 연기의 근간으로 삼았다. 그 철학은 스탠드업 코미디를 할 때도,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올린 시트콤 <모크 앤 민디>에서 외계인을 연기할 때도, 그리고 정극 배우로 인정을 받은 뒤에도 계속됐다. 관찰과 경청과 그리고 배움을 통해.

"남의 이야기를 듣고 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들 곁에 있는 것 자체가 힘이 돼요."

그러나 인생의 막바지,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좀 더 천착한 듯하다. 결국 우울증과 알코올중독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을 보면.

한창 힘든 시간을 보냈을 2013년 촬영한 작품 <블러바드>

 영화 <블러바드>의 한 장면

영화 <블러바드>의 한 장면 ⓒ 마운틴픽쳐스


북미에서 실사영화로는 가장 늦게 공개돼 결국 로빈 윌리엄스의 유작이 된 <블러바드>(13일 개봉)는 사실 그가 죽기 직전 작업한 영화는 아니다.

<블러바드>는 로빈 윌리엄스가 한창 힘든 시간을 보냈을 2013년 촬영한 작품으로, 그의 어떤 결단을 예견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정확히 자신과 같은 나이의 캐릭터를 연기하며, 그간의 삶과의 결별을 선언하며 새로운 대로(Boulevard)로 나아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환갑을 넘긴 놀란(로빈 윌리엄스 분)은 별일 없이 산다. 평온하고, 또 편안하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아내 조이(케이 베이커 분)는 지적이고 차분하다. 작은 은행 상담 직원으로 26년간 근속한 그는 이제 곧 지점장으로 승진도 앞뒀다. 거동이 불편하고 대화가 용이하진 않지만, 요양원에 모신 초로의 아버지도 간병인을 둘 수준은 아니다.

그런데 '잘' 사는지는 모르겠다. 왠지 따분해 보인다. 자신도 행복한지 모르는 얼굴이다. 그래 보인다. 언제나 그렇듯, 사건은 교통사고처럼 온다. 진짜 아버지를 방문하고 온 늦은 밤, 시내 가로수대로를 운전하던 놀란은 우연히 레오(로베르토 어과이어)를 자신의 차에 태우게 된다.

<블러바드>는 아마도 로빈 윌리엄스가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수입되지 못 했을 수도 있는 영화다. 완성도의 차원이 아니다. 그만큼 단출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등장인물도 제한적이고, 상영시간도 짧으며(88분), 자극적인 소재를 자랑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외형은 오롯이 로빈 윌리엄스의 연기에 집중하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짐작하다시피 로빈은 레오와의 의도치 않은 어정쩡한 관계의 연쇄를 통해 애써 외면했던 비밀을 끄집어내게 된다. 그 덕에 행복하지 못했던 자신의 삶을 머뭇거리듯 반추한다.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인생의 흐름에 몸과 마음을 맡겨 버린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에게 평생 하지 못했던 절절한 고백도 하고, 다툼이란 없을 것 같은 아내에게 상처도 준다. "사랑한다" 말하지만, 허울뿐이다. 인생이란 대로 위에서 놀란은 그렇게 방향을 선회한다.

"로빈 윌리엄스가 이런 역을 연기하리라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

스크린으로 <블러바드>를 감상하는 일은 꽤나 묘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비단 고인이 된 명배우의 유작이라서가 아니다. 속사포 코미디로 인정을 받은 뒤, <굿 윌 헌팅>의 인자한 멘토나 <스토커>와 같은 사이코를 통해 폭넓은 연기를 선보였던 그의 소품이어서도 아니다. 

<블러바드>는 평생 스스로 유폐한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음으로써 맛보지 못한 행복을 찾아 떠난 한 남자, 놀란의 인생의 짧은 단면을 담담하게 관조하는 영화다. 거기서 로빈 윌리엄스는 자신의 인생사와는 정반대의 궤적으로 살아왔을 놀란이란 인물을 읊조리듯 연기한다. 월스트리트저널로부터 "로빈 윌리엄스가 이러한 역을 연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란 평을 이끌어 낼 만하다.

그 묘한 감정은 어떤 면에서 <블러바드> 놀란의 선택이 로빈 윌리엄스의 실제 선택과 정반대의 의미로 겹친다.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는 놀란은 희미하지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로빈 윌리엄스는 생을 마감하기 전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연기를 배우던 스무 살 학생 시절부터 광대로서의 끼를 발산하며 신선한 피를 수혈해 왔던 그는 이제는 '연기 뱀파이어'로서의 삶을 전환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현실에서의 로빈 윌리엄스 또한 스스로 삶의 마지막을 선택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의 유작이 되어버린 <블러바드>는 실제 로빈 윌리엄스의 선택을 상기시키는 한편, 범인들이 인생에서 마주해야 하는 크고 작은 선택에 대해 곱씹게 하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선댄스 영화제 감독상 출신인 디토 몬티엘 감독은 섬세한 연출만큼이나 결과적으로 탁월한 감식안을 증명한 셈이 됐다.

"뜻있는 코미디언을 모아서 강렬하게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죠. 웃음도 주면서 메시지도 전하는 겁니다."

그리고 1986년부터 우피 골드버그, 빌리 크리스탈과 같은 당대를 풍미했던 연기자들과 '코믹 릴리프'라는 자선단체 활동으로 공연은 물론 수백만 달러를 기부했다는 로빈 윌리엄스. 여유가 있다면, 그리고 로빈 윌리엄스를 추억하고 싶다면 EBS <세계의 끝> '로빈 윌리엄스' 편의 시청을 권유한다. EBS 홈페이지에서 무료 다시보기 서비스 중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시트콤 코미디로 인기를 얻었던 그의 젊은 시절에 꽤 많은 분량과 화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는 그의 정극 연기가 얼마나 획기적인 변화였는지, 또 그가 얼마나 위대한 연기자였는지 되새겨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더불어 그의 1주기에 찾아 온 유작 <블라바드>를 비교해 본다면, 그의 인생역정을 상기하며 그를 추억하기에 안성맞춤인 앙상블이 되어줄 것이다.  

○ 편집ㅣ이언혁 기자


로빈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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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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