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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계유정난을 소재로 다룬 <공주의 남자> 왼쪽부터 수양대군, 수양대군 딸, 김종서 아들, 김종서
▲ 덕수궁 계유정난을 소재로 다룬 <공주의 남자> 왼쪽부터 수양대군, 수양대군 딸, 김종서 아들, 김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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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 사저로만 알려진 덕수궁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버린 계유정난의 산실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조선 초기,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있을 때 덕수궁 권역이 명례궁으로 불렸습니다. 그 표지석이 덕수궁 돌담 밖에 세워져 있습니다.

한데, '세조의 잠저는 니현에 있었다'라는 야사를 내세우며 아니라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야사에는 진고개(니현, 泥峴)라는 말이 무수히 나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개 이름으로 붙이기 좋아하는 명칭이 진고개, 여우고개, 박석고개입니다.

지금이야 도로 포장률이 높지만, 포장이란 개념마저 없던 시절. 구릉에 지하수가 노출되면 진고개가 되고 그 진고개에 돌을 깔면 박석고개가 되었습니다.

명례궁터 표지석 덕수궁 돌담 밖 성공회 성당 언저리에 있다
▲ 명례궁터 표지석 덕수궁 돌담 밖 성공회 성당 언저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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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연성도 있습니다. 옛 기록에는 오늘날의 <조선일보> 사옥 근처를 '황토현'이라고 했습니다. 황토는 마사토(굵은 모래)가 아닙니다. 습기를 머금고 있는 무른 흙입니다. 황토현과 연결된 곳에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능이 있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이 능을 파헤쳐 석물은 광통교 건설에 쓰고 유골은 사한리 계곡에 버리다시피 했습니다. 정릉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묘를 파헤친 곳은 별로 다듬지 않습니다. 하물며 왕이 버린 묘 터를 누가 감히 손대겠습니까. 진흙탕 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개연성 가지고 성립이 안 됩니다.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을 침묵시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습니다. 영조 45년 11월 2일. '임금이 황화방 명례궁에 거동하였다. 명례궁은 인조가 계해년에 즉위한 곳으로 본명은 경운궁이다.'(上幸皇華坊明禮宮。宮卽仁祖癸亥卽位之所, 本名慶運宮)

시작된 권력 암투... 명례궁에서 작성된 살생부

명례궁 도원군과 인수대비 한씨의 신혼시절 드라마<인수대비> 중에서
▲ 명례궁 도원군과 인수대비 한씨의 신혼시절 드라마<인수대비> 중에서
ⓒ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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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맏아들(훗날 문종)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혼인한 왕자들은 궐 밖으로 나가 살아야 했습니다. 왕실의 법도입니다. 이때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명례궁으로 나왔고 셋째 아들 안평대군은 옥인동으로 나왔습니다. 수양이 아버지 세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집이 오늘날의 덕수궁입니다.

문종이 죽고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권력 암투가 벌어집니다. 경덕궁지기 한명회가 권남의 천거로 명례궁에 드나들면서 야심 많은 수양대군의 권력욕에 불을 지핍니다. 계유정난을 기획하고 살생부를 작성한 곳이 명례궁입니다.

명례궁에서 출발하여 돈의문밖에 살던 김종서를 습격하고 돌아온 수양대군은 왕명을 빌어 대신들을 창덕궁 옆 시좌소로 불러들입니다. 여기에서 살생부에 등재된 황보인과 조극관을 척살한 정란 세력은 정권을 접수하고 단종을 영월로 귀양 보내 죽게 합니다.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은 자신의 맏아들 도원군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도원군의 부인 한씨는 당연히 세자빈이 되었습니다. 세자빈의 영광도 잠시, 남편(의경세자)이 요절하자 동서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고 두 아들 월산대군과 자산군을 데리고 세조가 예전에 살았던 집으로 나왔습니다. 맏며느리이기 때문에 시아버지 쓰던 집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명례궁입니다.

시동생 해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고 동서가 왕비가 되자 경복궁을 바라보며 절치부심 칼을 갑니다.

"그 자리가 누구 자린데..."

예종이 즉위 13개월 만에 죽자 민심이 흉흉했습니다.

"잘 뒈졌다."
"속이 시원하다."
"단종의 생모가 데려갔다."

독살설도 가세했습니다.

"인수대비가 자기 아들을 왕 만들기 위하여 시동생을 죽였다."

설은 설이고 일단 권력 공백 상태가 벌어집니다. 법통은 해양대군의 맏아들 제안대군. 하지만, 왕위는 방향을 잃고 표류합니다. 이때, 인수대비의 두뇌가 회전하기 시작합니다.

'잃어버린 왕좌(王座)를 되찾아 오려면 권신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그 좌장이 누구냐? 한명회? 그렇다면 맏아들 월산대군 카드를 버려야 한다.'

둘째 아들 자산군이 한명회의 막내사위기 때문입니다. 한명회와 손잡은 인수대비는 자기 아들 자산군을 왕위에 밀어 올립니다. 더불어 한명회도 자신의 사위가 왕이 됩니다. 성종입니다.

피난에서 돌아온 왕, 궁은 불타고 없었다

경릉 서오릉에 잠들어 있는 덕종(우)과 소혜왕후(좌). 의경세자 신분으로 세상을 떠난 덕종 릉은 무인석도 없이 조촐하지만 소혜왕후 릉은 무인석도 있고 석물이 웅장하다. 똑같이 추존왕과 추존 왕비이지만 사후 추종세력에 따라 능 조영이 달라졌다.
▲ 경릉 서오릉에 잠들어 있는 덕종(우)과 소혜왕후(좌). 의경세자 신분으로 세상을 떠난 덕종 릉은 무인석도 없이 조촐하지만 소혜왕후 릉은 무인석도 있고 석물이 웅장하다. 똑같이 추존왕과 추존 왕비이지만 사후 추종세력에 따라 능 조영이 달라졌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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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권좌에 앉힌 인수대비는 세자시절에 유명을 달리한 자신의 남편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고 자신은 소혜왕후가 됩니다. 세자빈으로 머무른 자신의 위상을 업그레이드시킨 것입니다. 집념의 결정체입니다.

둘째를 왕위에 앉혔으나 첫째가 문제입니다. 이때, 철의 여인 인수대비가 그녀의 맏아들 월산대군에게 명합니다.

"명례궁에 나가 살아라."

월산대군은 할아버지 수양이 살았던 집 명례궁에서 여생을 마감합니다. 이로 인하여 덕수궁이 월산대군 사저로 각인되기에 이릅니다.

한명회 묘 폐비윤씨 사건에 연루되어 묘가 파헤쳐지고 유골이 토막 처져 길거리에 내걸리는 부관참시를 당했다. 충남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에 있다.
▲ 한명회 묘 폐비윤씨 사건에 연루되어 묘가 파헤쳐지고 유골이 토막 처져 길거리에 내걸리는 부관참시를 당했다. 충남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에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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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간 선조가 돌아왔는데 들어갈 궁이 없었습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다 불탔기 때문입니다. 일본군이 쳐들어와 불 지른 것이 아니라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니까 분노한 백성들이 불 질러버린 것입니다. 민심이 천심입니다.

의주로 도망가 아차 하면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가려 했던 임금. 조선 역대 왕 중에서 용렬한 왕을 꼽으라면 인조와 선조가 순위 1, 2위를 다툴 것입니다. 인조는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광해를 몰아내고 왕위를 탈취한 후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했습니다.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갔습니다. 둘은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입니다.

의주로 도망간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왔지만, 궁궐은 모조리 불타 그가 살 곳이 없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찍어낸 곳이 명례궁이었습니다. 평화롭게 살고 있던 월산대군 후손을 몰아내고 선조가 들어갔습니다. 선조가 죽자, 그의 아들 광해가 명례궁을 경운궁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건청궁 명성황후가 일본인 자객에 의해 시해되던 당시에 걸려있던 건청궁 현판
▲ 건청궁 명성황후가 일본인 자객에 의해 시해되던 당시에 걸려있던 건청궁 현판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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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 명성황후가 건청궁에서 일본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자 경복궁에 환멸을 느낀 고종황제가 덕수궁으로 옮겨왔습니다. 정치의 중심이 덕수궁으로 옮겨오자 대한제국을 호시탐탐 노리던 열강들이 덕수궁 주변에 포진합니다.

러시아 공사관, 영국 공사관, 미국공사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때문에 덕수궁이 갈가리 찢기면서 옛 모습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중명전이 정동극장 뒤편에 있고 하비브 하우스 앞에 아스팔트 길이 있는 것도 역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경운궁이 덕수궁으로 바뀌게 된 것도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고종이 덕수궁으로 이어한 후, 일본으로부터 퇴위압박을 받습니다. 견디지 못한 고종이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게 됩니다. 마지못해 황위를 계승한 순종이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아버지에게 덕수(德壽)라는 호를 내리게 됩니다. 무거운 짐 내려놓으시고 덕을 베풀며 장수하시라고.

YS와 DJ가 한국 정치를 쥐락펴락하던 시절. 김영삼을 칭할 때 상도동이라 했고 김대중을 칭할 때 동교동이라고 했습니다.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고 물러나 있을 때는 상왕(上王)이라고 당당히 호칭했습니다. 일본이 눈알을 부라리고 있던 그 시절에는 감히 상왕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고종을 칭할 때 덕수궁이라고 했습니다.

초라하게 바뀌고 사라진 궁터, 안타깝다

경운궁 편액. 국립고궁 박물관 소장
▲ 경운궁 편액. 국립고궁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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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를 탐하던 수양대군이 권력을 획득한 곳. 왕세자 신랑을 잃고 사가로 쫓겨난 인수대비가 꿈을 이룬 곳. 서궁에 유폐되었던 인목대비가 반정군에 끌려와 무릎 꿇은 광해에게 그 죄를 물었던 곳. 그래서 덕수궁을 소망이 이루어진 곳으로 회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충족되어야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물(水). 바로 그것입니다. 서울의 5대 궁궐에는 입구를 들어서면 다리가 있습니다. 돈화문을 지나면 창덕궁 금천교(錦川橋), 홍화문을 지나면 창경궁 옥천교, 흥례문을 지나면 경복궁 영제교, 대한문을 지나면 덕수궁 금천교(禁川橋), 흥화문을 지나면 경희궁 금천교(禁川橋)가 그것입니다.

덕수궁 금천교. 물이 흘러야할 곳에 자갈만 있습니다
▲ 덕수궁 금천교. 물이 흘러야할 곳에 자갈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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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시대. 왕을 찾아뵙기 위해 입궁한 신하는 흐르는 물에 마음을 씻어(洗心) 충(忠)의 의미를 되새기고 다리를 건너 궐 밖으로 나가는 임금은 흐르는 물에 마음을 씻어(洗心) 백성들을 어여삐 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의 깊은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한데, 현재 물이 흐르는 곳은 창경궁 옥천교밖에 없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덕수궁 인화문 현판.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덕수궁 인화문 현판.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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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5대 궁궐 정문 이름은 화(化)자 돌림입니다. 경복궁 광화문(光化門). 덕수궁 인화문(仁化門). 창덕궁 돈화문(敦化門). 창경궁 홍화문(弘化門). 경희궁 흥화문(興化門). 헌데 덕수궁 인화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현판만 박물관 수장고에 낮잠 자고 있습니다.

덕수궁 대안문과 대한문
▲ 덕수궁 대안문과 대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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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덕수궁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 대한문은 원래 대안문(大安門)이었습니다. 그런데 명쾌한 설명 없이 대한문(大漢門)으로 바뀌었습니다. 대한(大韓)도 아니고 대한(大漢)으로.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규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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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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