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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 그리고 10만인클럽 회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지난 6월 14일부터 23일까지 일본 순회강연을 마치고 6월 24일부터 7월 9일까지 북녘의 수양딸을 찾아 북한을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성원으로 '제17회 한겨레통일문화상'을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새 연재 '수양딸 찾아 북한으로'를 통해 그사이 있었던 일을 전하려 합니다. - 기자 말

북한기행문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왼쪽)와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이상 네잎클로바)
 북한기행문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왼쪽)와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이상 네잎클로바)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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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무시한 인권 말살, 하지만 아름다웠다

2011년 10월, 내 인생에 기적처럼 찾아온 첫 북한 여행을 통해 나는 그곳에서 우리와 같은 '일란성 쌍둥이'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떠난 북한 여행은 감동과 감격의 연속이었다. 이질감은커녕 동질감을 느끼고 돌아왔다. 뿐만 아니라 북한에 수양가족마저 생겼으니, 나 자신이 이산가족이 돼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 여러 차례 북한을 더 여행한 뒤 <오마이뉴스>에 기행문을 연재하고 두 권의 책을 출간했다.

나는 통일에 대해 문외한이다. 내가 쓴 두 권의 북한 기행문도 '통일 이야기'가 아닌, 어쩔 수 없이 헤어져 살아야만 했던 형제들을 만나 정을 주고받은 '사랑 이야기'다. '민족의 화합과 조국의 평화적 통일에 대한 나의 간절한 염원'은 북한을 여행하며 북한동포들을 사랑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일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많은 단체로부터 통일 관련 강연을 요청 받았다.

지난 2014년 여름, '6.15 남측위원회 서울본부'라는 단체로부터 9월에 예정된 '통일 토크콘서트'에 초대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그해 11월 서울에서 열릴 친조카 결혼식과 시조카 손주 돌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갈 계획을 세우던 중이었다. 게다가 이왕 서울에 가는 길에 평양까지 가서 두 수양딸(설경·설향)과 수양손자도 만나고, 최근 개장했다는 마식령 스키장에서 겨울 휴가를 보낼 계획이기도 했다.

6.15남측위 서울본부는 이런 내 일정을 고려해 통일 토크콘서트를 11월 말과 12월 초에 전국 순회 형태로 열기로 결정했다. 나는 2014년 11월 19일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당일 조계사에서 열린 첫 토크콘서트에 참석했다. 그러나 이 콘서트가 끝나기 무섭게 곧바로 '종북몰이'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종북몰이' 논란에 휩싸인 재미동포 신은미 시민기자. 사진은 지난 1월 7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지방검찰청에서 피고발인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는 모습.
 '종북몰이' 논란에 휩싸인 재미동포 신은미 시민기자. 사진은 지난 1월 7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지방검찰청에서 피고발인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는 모습.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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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북한을 '지상낙원'이라고 했다는 TV조선 그리고 <조선일보>의 허위보도에 이어 일부 언론들이 종북몰이에 일제히 가세했다. 통일 대박을 외치던 박근혜 대통령마저 토크콘서트를 '종북콘서트'라 규정 짓자 보수 단체들은 나를 고발했고, 이어 '신속한' 검·경의 조사를 받게 됐다. 결국 2015년 1월 10일, 입국금지 5년이라는 통보를 받고 강제출국을 당한 채 미국에 돌아왔다.

어이없고 무시무시한 인권 말살이었다.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신적 피해를 입었고, 그로 인해 급격히 체중이 줄어드는 한편 왼쪽 팔이 마비되는 육체적 피해까지 입었다. 그러나 더 큰 고통이 있다면, 사랑하는 내 모국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일이었다. 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이 헌법 위에 군림하고 있는 나라,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듣고도 다른 소리를 해야 하는 나라가 한국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수확도 있었다. 시련을 겪으면서도 우리 민족에게 드리운 희망을 봤기 때문이다. 민족의 화합과 조국의 평화 통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던 사람들마저도 이번 사건을 통해 통일에 대한 눈을 떴다고 알려왔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여행길이었는가!

수양딸을 그리며 보낸 시간

평양의 수양딸 설경이와 수양 사위(2013년 8월 촬영).
 평양의 수양딸 설경이와 수양 사위(2013년 8월 촬영).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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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 돌아온 나는 우선 건강 회복에 전념했다. 그리고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지난 겨울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북한 여행을 다시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들려오는 소식도 긍정적이었다. 6.15 선언 15주년과 광복 70주년 행사를 위해 남과 북 그리고 해외동포 대표들이 중국 심양에서 회동할 예정이라는 뉴스를 들었다.

그럴 즈음 난 6.15 일본측위원회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6.15공동선언 15주년을 맞아 도쿄, 요코하마, 교토, 오사카, 고베를 순회하는 일본 강연에 초청하겠다는 제안이었다.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조국에서는 남과 북, 해외의 동포들이 만나 축제를 열 테고, 나는 일본을 순회하면서 재일동포들과 함께 통일 조국을 그리리라. 이왕 일본에 가는 김에 북한여행도 다시 계획했다. 수양딸을 찾아가기 위해서….

거의 모두가 한국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재미동포 사회와는 달리 재일동포 사회는 한국을 지지하는 민단과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으로 갈라져 있다. 이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강연을 한다는 것은 마치 통일조국에서 강연을 하는 느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흔쾌히 일본 강연 요청을 받아들이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오마이뉴스>에 북한기행문 연재를 시작하면서 내게는 수많은 재일동포 독자들이 생겨났다. 그중에는 민단계 동포들도 있었고, 조총련계 동포들도 있었다. 일본 강연 소식이 알려지자 그들로부터 "기다리고 있다"라는 연락이 쇄도했다. 어떤 동포는 페이스북에 '재미동포 아줌마, 일본에 오다' '재미동포 아줌마, 가나가와에 오다' 등의 페이지를 만들어 홍보를 하기도 했다.

신은미 시민기자의 일본 순회강연을 위해 재일동포 독자들이 만든 웹자보.
 신은미 시민기자의 일본 순회강연을 위해 재일동포 독자들이 만든 웹자보.
ⓒ 가나가와에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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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을 종편이 놓칠 리 없다. 그러다 보니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종편만 들여다보는 어머님이 예상대로 전화를 주신다.

"은미야, 니 또 강연하러 다니나? 테레비(텔레비전)서 봤다. 니 서울도 올라카나? 니 서울오면 크~닐(큰일) 난다, 아나? 이제 고만 좀 하면 안되겠나?"
"어머니, 걱정마세요. 서울은 가지도 못하는 거 아시잖아요."

막상 떠날 날이 다가오자 조국으로부터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온다. 남과 북, 해외동포들이 서울에서 개최하려던 6.15 선언 15주년 기념행사가 무산됐다는 소식이다. 게다가 일본 민단은 민단계 동포들에게 '신은미의 강연에 참석하지 말라'는 공고문을 보냈다고도 한다. 역시 분단의 골은 일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주최 측에 '민단 동포들이 참석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의견을 전했다. 그러자 6.15 일본측위원회 관계자는 내게 "아무리 민단 측에서 그런다 해도 올 사람은 다 오니 걱정하지 마시라"는 회신을 보내왔다.

2015년 6월 14일, 남편과 나는 9일간의 일본여행과 15일간의 북한여행을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 집을 나섰다. 아이들이 걱정하는 눈빛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종북몰이로 그 수모를 당하고 '사제 폭발물 세례'까지 받은 엄마가 또 강연에 나서고 평양의 '수양형제'를 보러 북한에 가겠다고 하니 불안해하는 건 당연한 일. 그래도 "전혀 우리 걱정은 마시라"며 되레 나를 위로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우리가 아는 북한은 없다

버스를 기다리는 평양 시민들.
 버스를 기다리는 평양 시민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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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으로 여행을 가는 사람들의 친지·친구들은 불안한 감정에 휩싸여 걱정을 늘어놓는다. "북한에 가서 억류돼 못 돌아오면 어쩌냐" "북한에 먹을 게 없어서 고생을 하지는 않을까"라면서 말이다.

첫 북한여행을 떠난 한 재미동포의 일화가 생각난다. 미국에 사는 그의 친척이 "북한에 가면 먹을 게 없을 것"이라면서 쌀, 라면, 미숫가루 그리고 김치를 한가방 싸들고 공항에 나왔다고 한다. 처음 방북하는 그 재미동포 역시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가방을 들고 평양까지 갔단다.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해 짐 검사를 받는데 세관원이 그 물건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왜 미국서 이런 것들을 가져왔냐"고 물었단다. 그 재미동포는 얼떨결에 "혹시 먹을 것이 없을까봐서…"라고 얼버무리자 그 세관원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고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세관원은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어 무척 당황했다고 한다.

탑승을 기다리면서 내 첫 북한여행 때를 떠올려본다. 당시 옆에 앉아 탑승을 기다리던 미국인 여행객이 내게 어디를 가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내가 "북한에 간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짐짓 놀라는 표정으로 "북한?"이라며 재차 확인했다. 그리고는 걱정스러운 낯빛을 보였다. 헤어지면서 그는 "돌아올 수 없는 여행(a trip with no return)이 되지 않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그때 나도 '혹시'라는 생각을 언뜻 해봤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쓴웃음만 지어진다. 내게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은 북한이 아니라 남한에서 있을 뻔했기 때문이다.

청와대에서 대북 정책에 관여하고 지금은 대학에서 북한학을 가르치는 한 교수님께서 "우리가 아는 북한은 없다"라고 말씀하셨던 게 생각난다. 난 그분의 말씀에 백 번 동의한다.

"오른발로 이 땅을 먼저 디딜까"

탑승을 앞두고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하며.
 탑승을 앞두고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하며.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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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일본 국적 항공사(ANA)를 이용한다. 남한 항공사를 이용하려고 보니 인천국제공항에서 갈아타야 한단다. 인천에서 출국 수속 없이 공항 안에만 머무르다가 비행기를 갈아타면 되기 때문에 '입국 금지 조치'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모국 공항에서 맞닥뜨리게 될 쓰라린 기억을 피하고 싶어 일본 항공기를 타기로 했다. 비행기 안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본다. 하지만 강제추방 당시의 아픔이 되살아나 쉽사리 잠이 들지 않는다.

나리타 공항에 도착하자 '재미동포 아줌마, 일본에 오다'라는 푯말을 들고 있는 청년이 눈에 들어온다. 또 나를 소재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한 감독도 게이트 앞에서 나를 발견하더니 카메라를 들이민다.

나리타 공항 내 안내 표지판에 한글이 병기돼 있는 것을 본 남편이 깜짝 놀란다. 남편은 "마지막으로 일본을 여행한 게 30년 전인데, 그때는 한글 안내 표지판을 상상도 못했다"라면서 "한국의 발전을 일본에서 느낀다"라고 말했다. 남편은 두리번거리느라 바쁘다.

우리는 우에노에 있는 한 호텔에 여장을 풀고 주최 측이 마련한 저녁 식사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이날 저녁 모임에는 내가 아는 분이 참석할 예정이라고 한다. 바로 배안 선생이다.

배안 선생과 우에노에 있는 한 식당에서.
 배안 선생과 우에노에 있는 한 식당에서.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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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도 다녀온 적이 있는 그녀는 북한을 방문한 뒤 <통일뉴스>라는 인터넷 신문에 방북기를 비롯해 여러 편의 글을 게재했다. 내가 도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요코하마에서 오고 있는 중이란다. 나는 그녀의 기행문을 감명 깊게 읽어서 SNS를 통해 약간의 대화를 나누곤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배안 선생이 약속 장소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마치 오랜 세월 떨어져 살아왔던 보고픈 친구를 만난 것처럼 서로를 끌어 안았다.

역시 배안 선생은 글만큼이나 감동을 선사하는 분이었다. 일본 내 조선학교에서 공부해 대학까지 수학했다는 배 선생은 '조국' 그리고 '민족'이라는 말에 눈물을 글썽이는 그런 분이었다. 배 선생과 나는 이 세상을 살아가며 만날 일이 전혀 없을 것만 같은,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을 배회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민족과 조국이라는 종착점에서 우리는 이렇게 만나고야 말았다.

배안 선생이 구사하는 우리말에는 일본어의 억양이 배어 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분이 어떻게 조국을 이렇게도 사랑할 수 있을까. 식사를 하는 내내 이런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언젠가 재일동포 독자 한 분이 내게 메일을 보내온 적이 있다. 그 안에는 그분이 고등학생 시절 니가타항에서 만경봉호를 타고 북한 수학여행 갔을 때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배에서 내리면서 꿈에 그리던 조국 땅을 처음 밟기 전 재일동포 학생들의 심정을 표현한 글이었다.

재일동포 학생들의 이야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우리학교> 중 한 장면. 조선학교 학생들이 북한으로 수학여행을 가고 있는 모습이다.
 재일동포 학생들의 이야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우리학교> 중 한 장면. 조선학교 학생들이 북한으로 수학여행을 가고 있는 모습이다.
ⓒ 스튜디오 느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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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선생님, 재일동포 아이들의 노래 속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오른발로 이 땅을 먼저 디딜까 
왼발로 이 땅을 먼저 밟을까
조국아 목 메여 찾고 찾으니
눈물이 나보다 먼저 내려요

저희 동창생들은 거의 량발(양발)로 내렸습니다. 오른발과 왼발을 고르지 못했지요. 모두 구두와 양말을 벗어서 맨발이었습니다. 얼굴은 하나같이 눈물에 젖어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순간 내 두 뺨에도 하염없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호기심만 갖고, 내키지 않는 마음 속에 다소 교만하고 냉소적인 자세로 북녘땅에 첫발을 내디딘 내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감정이다. 아마도 자라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일 게다. 그들의 조국이 남이든 북이든 간에, 재일동포들이 조국을 그리는 마음은 그 어느 해외동포들 보다 애절하다.

헤어지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음날 일정을 위해 호텔로 돌아왔다.

○ 편집ㅣ김지현 기자



태그:#신은미, #북한, #일본, #통일, #재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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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음대 졸업.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 음악박사. 전직 성악교수 이며 크리스찬 입니다. 국적은 미국이며 현재 켈리포니아에 살고 있습니다. 2011년 10월 첫 북한여행 이후 모두 9차례에 걸쳐 약 120여 일간 북한 전역을 여행하며 느끼고 경험한 것들 그리고 북한여행 중 찍은 수만 장의 사진들을 오마이뉴스와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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