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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인클럽>은 오마이뉴스가 권력과 자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한 언론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매달 자발적으로 후원하는 유료 독자들의 모임(http://omn.kr/5gcd)입니다. 클럽은 회원들의 후원으로 '10만인리포트'를 발행하고 있는데요, 이 글은 김지영 시민기자가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자식을 잃은 어미를 만나러 갔다. 그녀는 십칠 년을 키워 온 아들을 사고로 잃었지만 입양을 통해 두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얻었다. 잃은 자식과 얻는 자식을 알고 싶어서만은 아니었다. 자식을 잃고 얻는 사이에 그녀가 겪었을 고통과 행복의 시간들을 함께 되짚어 보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서사 속에 감추어진 그녀의 복잡했던 마음들이 손에 잡힐 듯 드러나 줄 것으로 믿었다.

짐작만으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마땅한 형용사조차 찾을 수 없는 자식 잃은 부모의 비통한 심정과 입양을 통해 새로 얻은 자식들에 대한 마음의 결을 말이다. 섣부르지만 입양은 죽은 자식이 아니었으면 생각해 보지 않았을 '사건'으로 판단했다. 그렇다고 해도 굳이 입양을 선택한 이유 또한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들이 죽은 건 13년 전. 오래 전 일이긴 해도 사실, 마음이 무거웠다. 그녀를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위로의 말을 먼저 전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어떻게 처음을 시작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인터뷰 약속을 잡기 전 그녀는, 하고 많은 입양가족들 중에 왜 자기여야 하는지 설명 듣기를 원했다. 다른 인터뷰 섭외와는 다르게 나는 말의 단어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하느라 어눌해지고 쉼표가 많은 문장을 더듬고 가다듬어 다시 말로 표현하느라 애를 썼다. 전화기 너머로 그런 나를 느꼈는지 그녀는 나를 배려했다.

"있는 사실을 말하는 거니까 저는 괜찮아요.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네 번째 만남에서 결혼, 그리고 생긴 첫 아들

큰 아들을 잃고 아이 셋을 입양한 강명순씨
 큰 아들을 잃고 아이 셋을 입양한 강명순씨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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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만났다. 경기도 과천시민회관 2층 카페에서 시작된 인터뷰는 이른 영업 종료시간 때문에 회관 로비로, 다시 식당으로 장소를 옮겨 가며 긴 시간 진행됐다. 그녀는 찬찬하면서도 또박또박 말을 했다. 충분히 격정적인 대목에서도 그녀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런 그녀도 죽은 아들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비집고 나오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었다. 13년 전 딱 그만한 나이의 아들을 키우는 내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우린 잠깐, 함께 눈물을 닦아냈다.

강명순(55)씨는 남편 이관훈(60)씨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둔 전업주부다. 만일 13년 전 그 사고가 없었다면 자녀 구성은 1남 1녀로 그쳤을 것이다. 결혼해서 이듬해 낳은 아들 도윤이와 2년 터울인 큰 딸 경희씨. 경희씨는 28살 회사원이 됐다.

도윤이가 죽고 21일 만에 입양을 해서 얻은 아들 창윤이는 현재 열네 살이다. 생후 4개월이었을 때 집으로 데려왔다. 창윤이를 입양하고 2년 뒤 같은 기관을 통해 생후 6개월의 왕윤이를 입양했다. 그의 나이 현재 열두 살이다. 열한 살 선현이는 또 그로부터 2년 뒤 역시 같은 기관을 통해 입양한 막내딸이다. 선현이가 집으로 왔을 때는 이미 생후 23개월이었다.

강씨는 평생을 공직자로 계셨던 선친 덕에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외동딸이었다. 하지만 강씨 나이 열여덟에 폐암으로 어머니를 잃은 후 집안 살림을 책임져야 했다.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았지만 오빠를 뒷바라지하고 남동생을 돌보고 혈압이 높은 아버지의 건강을 챙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 하나 허투루 하지 않았고 잘 해냈다.

강씨는 남편 이씨를 중매로 만났다. 데이트라고는 세 번을 했고, 네 번째 만남은 결혼식장에서였다. 1985년이었다. 같은 날 오후, 마흔 아홉에 아내를 잃고 딸을 염려해 재혼을 미루고 있었던 아버지도 사별 후 8년 만에 재혼식을 치렀다. 이듬해 강씨는 도윤이를 낳았다. 강씨 부부에게 첫 아들이었고 집안에서도 귀한 남자 아이였다. 그로부터 2년 뒤 딸 경희가 태어났다.

31년을 헌신한 회사에서 퇴직하고 현재는 그룹 고문으로 있는 강씨의 남편은 그룹 공채 신입사원으로 출발해 훗날 그룹 대표이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로열 패밀리도 아닌 신분에서 그룹 대표이사까지 오를 정도라면 강씨의 남편이 회사에 바친 열정과 헌신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신혼시절부터 강씨에게 남편 이씨는 집에는 없고 회사에만 있는 사람이었다.

"아이들이 아빠를 모르고 컸어요. 늘 회사 생활이었죠. 열심히 했죠. 남편은 항상 부재 중이에요. 주말에도요. 항상 새벽별 보고 나가서 새벽별 보고 들어왔어요. 거의 없었다고 보시면 돼요."

"그래서 사십대 초반에 임원이 되셨겠죠?"라는 기자의 물음에 그녀는 답했다.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그 뒷감당을 제가 다 했다고 보면 되죠. 그러다 보니까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큰 애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배낭여행을 다녔어요. 아이들한테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키워줘야 되겠다, 이 생각이 들더라고요. 남편은 열심히 돈 벌지만 나는 집 늘릴 생각보다 아이들 잘 키우는 게 나한테 주어진 일로 생각했어요."

방학이면 떠났던 배낭여행, 그리고 마지막 여행

강명순씨에게 아들과 사별의 슬픔은 슬픔일 뿐 불행은 아니었다.
 강명순씨에게 아들과 사별의 슬픔은 슬픔일 뿐 불행은 아니었다.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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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해외로 배낭여행을 시작한 게 강씨 나이 삼십대 후반이었다. 일반적으로 그 정도 나이에 일찍 회사 임원에 오른 남편을 두었다면 아파트 평수 늘리고 아이들 학원 보내고 과외 시키며 엘리트 코스를 밟게 했겠지만, 강씨는 그 마땅한 길을 처음부터 들어서지 않았다.

그렇게 해마다 여름방학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세계 곳곳을 걸어서 누볐다. 아이들과 함께 고생하고 부대끼며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여행이 하면 할수록 좋았다.

초등학교 때만 해도 공부에 흥미도 없고 성적도 좋지 않았던 도윤이는 중학생이 돼서는 엄마와의 여행을 통해 목표의식이 생겼고, 스스로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는 시험 쳐서 들어가는 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다.

"도윤이가 베이징에다 여행사를 차리겠대요. 그때는 중국 문이 열리기 전이었어요. 하필이면 왜 중국이냐고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보내주겠다고 했죠. 싫대요. 자기가 여러 나라를 돌아 봤는데 중국이 가장 마음에 들고 베이징에 여행사를 꼭 차리고 싶다는 거예요."

고등학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강씨와 남편은 아들의 결정을 허락했다. 강씨가 먼저 베이징으로 날아가 도윤이가 공부할 학교를 물색했다. 일반대학에서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어학연수 코스가 없었다. 수소문 끝에 베이징사범대학으로 진로를 정했고 기숙사에 자리까지 마련해 놓고 돌아왔다. 곧 도윤이는 중국으로 떠났다.

"가는 날은 공항에도 안 나가 봤지만 엄마 (마음이) 어디 그래요. 제가 한 달에 한 번씩 아들 찾아 베이징을 오고 갔어요. 참 유학생활 잘했어요. 인정도 받고. 주말이면 기숙사에서 나와 머물던 집이 있었어요. 그 집 아들이 도윤이와 동갑이에요. 그 친구랑 같이 교회에 갔는데 간 첫 날 만난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 그 여자 친구가 도윤이에게 굉장히 적극적이었고요. 도윤이가 키도 크고 인물도 좋았어요. 그 집 아빠가 도윤이 가디언(후견인)인 셈인데 걱정이 되었나 봐요. 도윤이가 중국에 머무는 동안은 가디언으로서의 책임도 있는 건데 신경이 많이 쓰였던 모양이에요."

강씨보다 한 살이 많은 여자 친구의 엄마는 베이징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유학생 신분이었다. 전화 통화를 했고 방학을 맞아 귀국하는 대로 만나기로 했다.

"코엑스에 있는 호텔 식당에서 만나기로 하고 기다리는데 제가 그 엄마한테 정말 반했어요. 남편과 함께 나왔는데 (남편이) 중풍인 거예요. 도윤이 여자 친구의 아빠인 거죠. 젊은 나이에. 저 같으면 자존심 상해서 남편을 집에 두고 오죠. 얼마나 심하게 아픈지 입구에서 걸어오는 데 한 십 분은 넘게 걸리는 것 같아요. 남 일에 상관 안 하는 남편이 가서 부축을 해 올 정도였어요.

그렇게 자리에 앉았는데 딸 둘을 다 데리고 나왔어요. 우리도 도윤이하고 우리 딸하고 이렇게 넷이고 저 쪽도 딸 둘에 엄마 아빠까지 넷이에요. 참, 상견례지 그게. 고등학교 일 학년짜리 아들딸들이 서로 사귄다고 양쪽에서 온 가족이 출동을 한 거예요. 제가 그랬죠. 우리 아들 잘 봐 달라고. 그 엄마 하시는 말씀이 그냥 전화만 해도 되는데, 아이들끼리 친구하는 건데 이렇게 정중하게 불러서 비싼 식당에서 밥 사줘서 고맙다고. 그때 제가 딱 부러지게 얘기했어요. 너희 둘이 친구 해도 돼.

그때부터 한 가족처럼 지냈어요. 그 집에는 아들이 없으니까. 그 집에 일이 있으면 우리 아들이 가서 다 해 주고. 그렇게 일 년을 지냈어요. 그리고 그 해 여름 방학 때, 그러니까 고등학교 2학년 때 사고가 났어요. 그 전에 딸도 오빠처럼 중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어 하고 그래서 보내기로 결정했어요. 중국은 9월에 개학이에요.

여름 방학을 맞아서 한국에 온 도윤이가 하는 말이 '엄마 우리 둘 다 보내 놓고 엄마는 뭐 할 거'냐고 물어요. 그래 '난 너희들 보러 가야지. 한 달에 한 번씩 가는 게 내 일이니까.' 그랬더니 아들이 엄마 그러지 말고, 입양을 하면 어때? 라고 말했어요. 이게 참 무서운 이야기인데... 아... 아들이 굉장히 애들을 예뻐했어요. 그래도 그때는 그런 생각 꿈에도 안 했죠. 내가 무슨 입양을 해. 입양은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건 줄 알았지요."

강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도윤이의 사고 이야기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도윤이가 방학 때 한국에 왔다가 돌아갔는데 그 여자친구 가족들이 베이징에서 열차로 하루 걸리는 계림이란 곳으로 여행을 갔어요. 다른 가족하고 도윤이도 데리고 갔죠. 그런데 거기서 사고가 난 거예요. 계림에 도착해서 여행사에서 내준 미니버스를 타고 가는데 도윤이가 키가 크니까 제일 뒤에 창가에 앉아서 졸았어요. 머리를 기울이고. 버스가 방향을 틀 때 옆에 큰 트럭이 한 대 서 있었대요. 버스가 회전하면서 트럭 백미러를 탁 쳤는데 부딪힌 곳이 졸고 있던 도윤이 머리 쪽이었어요. 차 유리가 깨지면서 머리에 박혔어요. 다른 사람은 손도 하나 안 다쳤죠. 계림에 있는 병원에 데려다 놓고 바로 연락이 왔어요. 애가 다쳤다고..."

사고같지 않은 사고, 그리고 떠나 간 아들

- 그때 아이는 어떤 상태였나요?
"사고 나는 순간 바로 뇌사 상태였어요. 저는 처음 연락 받았을 때는 우리 애가 팔이나 다리가 다친 줄 알았어요. 연락이 왔을 때 그냥 애가 다쳤다고만 말을 했거든요. 하루 만에 비자 받고 다음 날 중국으로 우리 세 식구가 갔어요. 갔는데 병원에서 뇌사 상태라는 거예요. 근데... 이 (여자친구) 엄마가 나를 보더니... 아직도 그 표정을 잊어 버릴 수가 없어요.

죽을 죄 지은 그런 죄인 같은 얼굴 있죠? 나도 내가 어떻게 그랬는지 몰라요. 저 사람이 왜 죄인이어야 하나. 내 애를 좋아하고 사랑해서 여행을 데리고 갔는데. 괜찮다고 내가 왔으니까 괜찮다고. 어젯밤에 잠 못 자고 그랬으니까 가서 자라고 이제는 내가 왔으니까 가서 쉬라고 말했어요. 그러고 애를 만났어요. 근데 곧 깨어날 것 같은 거예요. 아무 상처도 없고 머리에만 유리가 박힌 거죠. 애를 데리고 한국에 가야 되겠다 싶더라고요."

가족들은 도윤이를 한국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 당시에는 세계에 몇 대 밖에 없던 에어앰뷸런스를 수소문했다. 마침 중국인이 기장으로 있던 에어앰뷸런스가 베이징에 있다는 정보를 얻었고 도윤이를 실을 수 있었다. 에어앰뷸런스에 도윤이를 싣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렸다. 비행기 한 번 띄우는 비용이 5천 만 원이었지만 돈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도윤이를 한국으로 데려오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비행기 정원은 다섯 명이었다. 기장과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환자. 보호자는 한 명 만 탈 수 있었다.

- 보호자는 어떤 분이 타셨어요?
"도윤이가 한 번도 아빠하고 여행을 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아빠가 탔죠. 마지막 여행으로..."

아들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여행. 나는 잠시 지금 내 아들과 딱 같은 나이의 누워 잠든 도윤이와 그 아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먹먹함의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아비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지켜보느라 질문을 멈춰야 했다. 서울에 도착한 도윤이는 S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하루에 면회가 오전 20분, 오후 20분이었어요. 근데 참 감사한 게요. 슬프고 뭐 아프고, 눈물 나고, 안타깝고 속상하는 마음이 별로 없었어요."

- 저는 제 아들 같으면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데요?
"그냥 살 거 같았어요. 상처도 없었고 표정도 편안하고. 그냥 그러고 있다 일어날 것 같았어요. 그게 은혜였죠. 그런 게 은혜인 것 같아. 그렇게 있다가 갔죠. 8월 28일 날 사고 나고 9월 30일 날 갔나?"

- 장치를 뺀 건가요?
"아니요. 생명이 다할 때까지... 울음은 많이 나오더라고요. 그때 제가 하나님을 만난 거 같아요."

- 그렇게 도윤이 보내신 건가요?
"10월 3일 날 장례식이 끝나고 누웠는데 그때부터 진짜  도윤이가 없는 거예요. 장례식 날까지는 없는 줄 몰랐죠. 근데 이제 딸이 걱정이더라고요. 오빠 사고가 8월 28일 났는데 그 날 아침 열 시에 유학 간다고 자퇴서를 냈어요. 오후 2시에 도윤이 사고 나고. 딸은 자퇴서를 냈으니까 학교에 안 가겠다고. 오빠를 다 아는데 어떻게 학교를 가느냐고. 안 간대요. 오빠가 그 중학교를 다녔으니까."

인터뷰 시간 내내 차분하고 담담했던 강씨가 아들의 사고 이야기를 하는 순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계속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에어앰뷸런스 이야기에서는 나도 감정이 흔들렸고 눈물이 흘렀다. 잠시 대화를 멈춰야 했다.

- 본인은 유학을 가고 싶어하고요?
"너무 가고 싶어 했어요. 근데 저는요. 뭘 결정하려면요. 다른 사람들하고 조금 달라요. 결혼할 때도 그랬고요.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저는 항상 메모를 해요. 할 수 있다, 없다를요. 눈으로 확인해야 해요."

- 딸 유학 문제도 그렇게 하셨나요?
"저는 늘 그렇게 해요. 근데 아빠가 못 보내겠다니까 못 가는 거죠.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되지? 그래 사실은 먼저 간 아들도 보고 싶었고요. 어떡하면 애를 내가 만날 수 있지? 만나야 되고, 보고 싶었고, 자존심도 상했어요."

- 자존심은 왜 상하셨어요?
"내가 아들이 있었는데. 그런데 이제 없잖아요. 처음부터 없었으면 관계없는 일이에요. 어떻게 하면 내가 충족할 수 있을까 하며 메모를 들여다 봤죠. 예를 들어 일번 공부한다. 예스, 노. 그렇게 51% 예스하면 긍정이에요. 할 수 있다죠. 그렇게 쭉 할 수 있는 일들을 써서 예스 노를 했어요.

근데 다 할 수 없었어요. 마지막에 아들이 방학 때 와서 했던 말이 쓰여 있었죠. 우리 둘 다 유학가면 엄마 뭐해? 그럼 입양해서 애들이나 키우지? 다 못해, 못해, 못해 인데 아이 키우는 거, 이거는 할 수 있을 거 같은 거예요. 그 전에도 아이를 키웠고. 내 직업이 아이 키우는 건데, 보니까 예스더라고요. 그래서 입양신청을 했어요."

- 도윤이 보내고 얼마 만에 결정을 하신 거예요?
"삼 일 만이죠. 궁리하다가. 그래서 입양 신청을 했죠."

어이없는 사고로 아들과 사별한 후 머리 풀고 누웠다가 아들의 유언 아닌 유언이 되었던 말을 떠올리며 입양을 결심했던 강명순씨. 아들이 죽은 지 21일 만에 입양을 통해 새 아들을 집으로 맞이하게 된다.

☞ 2편으로 이어집니다.

○ 편집ㅣ장지혜 기자




태그:#입양, #공개입양, #입양을인터뷰하다, #시별입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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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을 거쳤다가 서울에 다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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