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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1년이라는 시간을 돌아간다. 담임선생님이 아니라 체육 전담 선생님으로 여덟 반의 아이들을 만나고 있을 때였다. 아이들과의 1학기 마지막 체육 시간, 한 학기를 정리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에 나는 아이들에게 정말 간단한 물음을 던졌다.

"얘들아, 우리 한 학기 동안 어떤 체육 활동했는지 기억나지?"

아주 간단할 줄만 알았던 이 물음은 순간, 체육 경시대회 물음으로 변했다. 아이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대답을 못했다. 그때, 정적을 깨는 대답. 축구요! 나 이것 참,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나. 한 학기 동안 난 축구를 해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하하. 그래, 이 반만 기억이 나지 않는 거겠지.

하지만, 1반부터 8반까지... 모두 거짓말처럼 기억을 잃은 모양이다. 나는 아이들과 서로 기억을 공유하려고 했는데, 이건 뭐 나만 애틋한 기분이다. 이런 저런 일들이 있었다고 설명을 해야 하는 판이라니 참 섭섭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아이들에게 기억을 강요하는 내 모습이 슬프기도 했다.

난 일방적인 짝사랑을 또다시 반복하지 않고 싶었다. 내가 아이들의 초상권 타령을 견뎌가면서 사진을 찍은 이유였다. 두근두근 긴장감과 어색함의 3월, 아이들과 가장 힘들었던 4월, 가족과 함께해서 행복했던 5월, 아이들끼리의 미묘한 감정으로 복잡했던 6월 그리고 어느새 한 학기를 정리하고 있는 7월까지. 1200여 장에 달하는 사진들은 우리의 시간들을 대변하는 매개였다.

400여장의 기억들
 400여장의 기억들
ⓒ 고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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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하루가 다르게 더워지던 지난 7월, 어느새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여름방학을 앞둔 시간. 우리 반은 지금까지의 기억을 공유할 시간을 갖기로 했다. 우리 반 교실 바닥에 잠시 잊힌 기억들을 꺼내줄 400여 장의 인화된 사진들을 뿌렸다. 짝사랑이 아닌 온 쪽의 사랑을 바라면서.

첫 번째 시간, 기억 더듬기

"자, 이제 여기에 뿌려진 우리 반의 사진들을 보면서 그동안 우리 반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기억해볼 거야. 나에게 의미가 있는 사진들도 있을 테고, 다른 친구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진도 있을 거야. 기억을 꺼내는 이 시간은 자유야. 서로 사진을 보여줘도 괜찮고 혼자 사진을 바라보고 있어도 괜찮아. 서로를 놀리려는 것이 아니라면, 기억을 꺼내기 위한 것이라면 뭐든 괜찮아."

400장의 수많은 사진 속에서 아이들은 저마다의 기억을 찾기 시작했다.

"선생님! 우리 겨울 옷 입을 때도 만났었어요!"
"그럼, 우리 처음 만났을 때는 목도리도 했었지."

"야! 너 반장 선거 나갔을 때다. 이때 나는 너 뽑았다."
"아. 이때 괜히 나갔어. 나 2학기에 반장할 거야."

"유언장 쓸 때다! 이때 너 진짜 많이 울었었는데."
"야, 너는 안 울었냐! 그때, 다 울었지 뭐."

"이게 우리 반이 했던 첫 실험이야. 아직도 기억나. 우리만 망했거든."
"이야, 그걸 다 기억해? 대박."

먼지가 쌓여가던 기억들이 활력을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400여 장의 기억들을 들여다보며 서로 웃고 떠들고, 친구들에게 보여주면서 나에게 쪼르르 가져오면서 그동안의 기억들을 다 같이 이야기하는 모습들이 참 좋았다. 은근슬쩍 나도 바닥에 앉아 사진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봤다.

두 번째 시간, 기억의 조각보 만들기

"이제까지 기억을 찾는 시간이었다면, 이젠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기억들을 골라보는 시간이야. 이 많은 사진들 중에서 자기가 생각하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진을 네 장만 골라서 가지고 올 거야. 그리고 그 네 장의 사진은 우리가 이제 만들 기억의 조각보의 재료가 될 거야."

시작! 이라고 외친 순간, 마치 급식실로 달려가는 중고등학생들처럼 아이들이 사진으로 쪼르르 달려들었다. 네 장의 기억들은 기억의 조각보 재료로 쓰일 계획이었다. 자신이 고른 기억들을 한 손에 꼭 쥐고 있는 모습이 참 귀엽다. 나를 마지막으로 우리 반의 모든 친구들이 기억을 골랐다.

밀어두었던 책상들을 다시 원위치로 옮기고서 아이들은 자신들이 직접 고른 네 장의 사진들로 기억의 조각보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실, 조각보가 거창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저 네 조각의 사진들을 이어붙이면 그만이다. 하지만 자신이 고른 기억들을 하나로 이어보는 활동이 한 학기 동안의 기억들을 더 짙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내 기억의 조각보 밑에는 내 편지 대신 아이들 편지가 쓰여 있다.
 내 기억의 조각보 밑에는 내 편지 대신 아이들 편지가 쓰여 있다.
ⓒ 고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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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조각보는 방학식 날에, 아이들과 악수를 하며 하나하나 돌려주었다. 조각보의 밑에는 아이들에게 보내는 나의 작은 편지글도 담겨있었다. 자신들의 조각보를 보며 미소 짓는 모습을 보니 아마 이번에는 다행히도 짝사랑이 아닌 듯싶다.

'조각보 만들 때 우리 반 단체 사진을 네 개나 골랐다. 무슨 사진을 고를까 고민했는데 그냥 우리 반이 좋아서 단체 사진을 네 개나 골랐다. 재밌었던 것 같았다.'
'선생님이 맨날 사진 찍어서 그런지 선생님 사진이 없었다. 방학 동안 선생님 얼굴 까먹으면 어떡해요?'
'기억의 조각보라는 걸 만들었는데 그동안 이렇게나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게 놀라우면서도 헤어진다는 생각에 좀 섭섭하다.' - 방학식날 아침 한 줄 글쓰기 중에서

○ 편집ㅣ박순옥 기자

덧붙이는 글 | 2015년 3월 2일부터 시작된 신규교사의 생존기를 그리는 이야기입니다.



태그:#초등학교,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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