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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핑턴포스트>에 연재되는 이범의 <나홀로 사상운동>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 새정치연합에 대한 비난은 많지만 쓸모 있는 비판은 의외로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범의 글은 일단 실용적이고 사람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부분을 짚는다. 그래서인지 <청년이 최우선이다, 불쌍해서가 아니다>는 글에 대해 반론을 쓰는 일도 나름 즐거웠다.

<청년이 최우선이다(이하 후략)>는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저출산이라 전제했다. 자, 과연 그러한가? 남의 글을 끌어다 반론으로 삼는 것은 나쁜 습관이지만 부득이하게 정희진의 저출산론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정희진은 2004년에  <'출산 파업'에 공권력 투입>이라는 글을 쓰고 같은 해 정범구 박사와 <여자들, 왜 아이 안 낳습니까?>라는 제목의 인터뷰를 했다. 정희진의 논점은 저출산이란 국가 노동력을 공급하는 기계적 행위가 아니라 문화적 실천의 선택이며 여성들이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끌어가기 위한 일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무려 11년 전에 나왔지만 아직도 저출산은 사회적 현상일 뿐,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자기 삶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선택이라는 것 조명받지 못해 안타깝다.

정희진이 주로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저출산을 짚었다면 이 글에서 나는 고령화와 이민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고령화 문제의 해답으로 흔히 출산율 높이기가 꼽히지만 출산율 높이기는 근본적인 해법이 되지 못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언젠가 청년이 되고 노인이 된다. 지금 노인이 많으니 노인을 모실 아이를 더 많이 낳으면 그 아이들도 언젠가 노인이 되고 만다. 그 노인들을 모시기 위해 더 많은 아이들을 낳아야 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를 낳는 주된 계층, 청년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어차피 태어나 봤자 노인들만 모시다 가는 인생인데 무엇하러 아이를 낳는지 자문하지 않을까. 사실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사회적 압박에 대응하는 가임기 여성들의 대응이 아니겠는가.

고령화 사회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 번째는 베이비붐 세대가 동시에 노인이 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수명 자체가 늘어나는 것이다. 지금 노인 복지관에서 환갑이란 청년 나이다. 적어도 일흔다섯은 넘겨야 한다. 지역 경로당에는 팔십대 중반은 되어야 소파에 앉을 자격이 생긴다. 농담이 아니라 경로당에 가면 팔십대 후반 할머니 할아버지가 소파에 앉아 있고, 칠십대 후반 할머니가 열심히 설거지를 하고 커피를 끓이며 노인봉양(?)을 하고 있다. 팔십된 할머니가 몸이 아프다고 불평을 했더니 옆에 있던 백살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다지 않는가. "젊은 게 왜 맨날 아프다고 해."

현재 팔십대 후반에서 구십대에 이르는 노인들도 자신이 이렇게 오래 살 줄은 몰랐을 것이다. 대략 자기 부모가 돌아간 나이에 맞추어 자신도 죽을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그 예측은 빗나갔다. 인간의 수명은 늘어나지만 자원은 부족하기에 자연스럽게 출산율이 떨어진다. 실제로 일본은 아픈 조부모를 돌보느라 결혼을 늦추는 손자녀들이 적지 않다. 1970년대 미국의 한 SF 소설을 보면 영원히 사는 인간들이 사는 사회에서는 새 아기가 태어나지 않는다.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면 여론조사가 항상 정답을 제시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정말 아기를 안 낳는 이유가 교육과 보육 때문일까? 좀 더 사태를 거시적으로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저출산과 고령화는 사실 한 가지 현상일 뿐 이름만 다른 것일 수도 있다.

반이민이 가능한가?

<청년이 최우선이 아니다>에 의하면 기획재정부와 고용노동부에서 정주형 이민에 대한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한국의 이민 정책은 컨트롤 타워 없이 제각기로 이루어지는 걸로 유명하다. 결혼이주여성은 여성가족부, 이주아동은 교육부, 미등록은 법무부, 통계나 정보는 행정자치부에서 거의 다 쥐고 있고, 지자체별로 따로 예산을 꾸리거나 중앙 부처에서 받아 집행하고 있다. 초기 한국의 다문화 현상을 주도했던 결혼이주여성의 증가율은 서서히 떨어지는 추세이다. 지금의 이민자의 대부분 이주노동자가 차지한다. 이들의 노동 상황은 국제앰네스티가 여러 번 보고서를 발간했으니 조금만 찾으면 읽어볼 수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보니 <청년이 최우선이 아니다>에는 재미있는 댓글이 붙어 있었다. "지난 수십년간 외국에 수백만을 보낸 한국은 얼마나 큰 죄를 지은 것이냐?" 이범은 진보진영과 청년이 연대하여 이민을 반대하고 국가 혁신을 요구하자고 주장하지만 이민은 한 국가가 완전히 독자적으로 정하고 폐할 문제가 아니다.

한국은 이민을 받기만 하는 나라가 아니다. 지금도 많이 내보낸다. 한쪽으로 자국 사정이 어렵다고 이민을 내보내면서 다른 한쪽으로 이민을 받지 않는 것은 국제적으로 용인되기 어렵다. 당장 한국으로 노동자를 보내는 동남아시아 국가들만 해도 한국 교민들이 많이 살고 있다. 한국에서 더 이상 노동자를 보내지 말라고 요구한다면 그 나라들 또한 한국 교민들을 내보내라는 여론이 일어날 수도 있다.

위 상황은 가상이 아니라 실제 벌어졌었다. 2014년 태국 정부는 한국인의 비자 클리어를 금지하여 상당수 한국인을 미등록 체류로 몰아넣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2014년 6월 12일자 오마이뉴스 <태국 공항에서 쫓겨나는 한국인들, 왜?>를 보면 태국의 한국 교민은 불법체류로 몰려 가재도구 하나 못 챙기고 쫓겨나는 사태를 걱정하기도 했다(사실 한국의 미등록 외국인에게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교민들은 태국 정부의 이러한 태도를 한국 정부가 태국인의 입국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렇듯 이민은 한 국가만의 일이 아니라 두 개, 혹은 여러 개 나라의 일이다. 마지막으로 인천에 거주하는 화교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덧붙이겠다.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 정부와 재일교포 권리 문제를 협상할 때였다. 일본 정부는 한국도 화교 권리를 보호하지 않고 있다고 반박했다. 그에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의 화교 권리도 인정할 테니, 재일교포 권리도 그에 따르라고 대응했다고 한다. 협상은 한국에 유리하게 끝났다.

다인종 이민 사회의 도래는 필연

한국 정부가 만약 정주형 이민 계획을 내놓는다면 그것은 정부의 계획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지는 흐름을 인정하는 것에 가깝다. 오랜 관찰과 연구에 따르면 원래 이주노동자는 돈만 벌고 떠나게 되지 않고 해당 지역에 정주하게 된다. 정주할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형성한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당연히 벌어지는 일이다.

지난 6월 25일 대법원은 이주노동자도 노조를 결성할 수 있다고 판결을 내렸다. 현재 이주노동자들은 노조를 결성하고 단위를 만들 뿐만 아니라 가정을 만들고 아이도 낳는다. 젊기 때문이다. 이자스민 의원은 최근 이주아동을 위한 법안을 발의했다. 사실상 무국적 상태인 이주아동을 학교에 보낼 수 있는 법안이다. 물론 본회의를 통과하진 못했다. 통계 근거는 없지만 현재 한국에서 태어나거나 이주해온 이주아동은 약 2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주노동자들이 출산율에도 조금 기여를 하는 셈이다.

현재 이범이 청년 세대와 충돌하리라 예상하는 저숙련 노동자만이 이민의 전부는 아니다. 현재 외신에는 한국 기업에서 근무한 백인 노동자의 이야기가 자주 올라온다. 이러한 기사가 왜 실리겠는가? 전세계적으로 불황이 휩쓸기에 한국은 백인 화이트칼라 노동자에게도 매력적인 취업지로 떠오르고 있다. 물론 중국을 거쳐가는 단계일 수도 있다. 허나 최근 이태원에서는 백인 이주민들이 만든 영화를 모아 상영하는 이주영화제가 열렸다. 이민의 정주화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막는다고 막아지지 않는다. 더 꽁꽁 막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그러나 이민 장벽이 높을수록 이민자의 질이 떨어진다는 보고도 있다. 왜? 이민자들도 나라를 고르기 때문이다.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양질의 노동력을 받아들이는 나라와 무조건 막아놓고 뒷문으로 들어가는 나라가 있다. 그렇다면 질 높은 노동자들은 당연히 전자의 나라로, 질 낮고 갈 데 없는 노동자들은 후자의 나라로 향할 것이다. 즉 한 나라의 이민 장벽이 높으면 그 나라 말고는 달리 선택지가 없는 사람들이 몰리게 된다.

청년에게 중동 가서 돈 벌어오라는 개념 없는 정권을 뽑아놓고 살고는 있지만, 한편 이민이란 개념 없는 나라를 정신차리게 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 중 하나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지만 중들이 죄다 떠난 절이 망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저임금과 인권 착취의 나라

나는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저출산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삶을 선택하지 못하게 하는 문화경제적 구조라고 생각한다. 이범의 말대로 반이민 산업구조 고도화가 성공해서 청년들이 결혼하고 아이 낳고 취업해서 산다고 치자. 그러나 그것이 과연 행복일까? 지금 청년들은 질문하고 있다. 설령 취업-결혼-육아가 성공한다 해도 남들이 깔아놓은 컨베이어 벨트 위를 순항하는 삶이 과연 멋진 삶일까?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만났던,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면서 자식 때문이라고 한탄하는 바보 같은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이와 맞물려 중소기업은 늘 인력난을 호소한다. 옆에서는 청년 실업의 문제는 국가와 기업이 노동력 매치에 실한했다는 코멘트를 남긴다. 이른바 미스매치론이다. 나는 이들에게 청년들이 이용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가 보라고 권하고 싶다. 청년들이 회사를 욕할 때 과연 저임금을 욕하는지. 아니다. 다들 어려운 거 알고 임금 조금 주는 것 욕하지 않는다. 욕할 것은 따로 있다. 왜 근로계약서대로 노동시간을 지키지 않는지. 점심시간에 밥도 못 먹게 하고 왜 따로 불러내어 일을 시키는지. 왜 상사의 집안일을 해줘야 하는지. 왜 반말을 하고 욕을 하고 때리고 항의하면 "어디서 어린 게"라고 소리를 지르는지.

이건 저임금 문제가 아니다. 나 또한 수많은 비정규직을 거쳤지만 임금이 적다고 불만을 가진 적이 없다(불만의 주원인은 야근이었다). 임금은 적게 줘도 인격적으로 존중하면서 업계 스킬을 습득하도록 이끄는 직장에 대해서는 추호도 불만 가진 적이 없다.

반론을 펼쳤지만 <청년이 최우선이 아니다>의 모든 내용을 반박하는 것은 아니다. 반론이라면 저출산은 여성이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는 것과 이민, 그리고 고령화에 대한 짧은 코멘트 정도이다. 전반적으로 한국의 야당-새정치연합과 군소 진보정당-이 산업정책에 무식하다는 것에는 100% 동의한다. 산업정책에 대한 정밀한 연구가 있어야 야당이 여당되고 여당이 야당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럼에도 동시에 출산과 노동은 산업이나 경제가 아니라 인간 삶의 본질적인 부분과 깊숙히 관계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싶다. 그렇기에 저출산과 노동 문제는 인문학적이기도 하다.


태그:#이민, #이주노동, #저출산, #고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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