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수업'은 미국 최초로 경구 피임약 노개스티메이트를 발견·개발한 재미과학자 한도원(84) 박사의 일대기입니다. 그의 삶은 험난한 시대를 살아온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의 삶이면서 귀중한 현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녘에서 보낸 소년기, 혈혈단신 탈출해 남녘에서 보낸 청년기 그리고 1955년 '8달러'로 시작한 미국 유학 생활 등에서 삶의 고비들을 극적으로 통과해온 그의 일생은 한 편의 잘 꾸며진 드라마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박사는 2002년 은퇴해 미국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제공한 자료들과 구술을 토대로 기자가 스토리를 재구성합니다. 이 기사는 1인칭으로 서술됩니다. - 기자 말입학식을 무사히 마치고 등교가 시작되었으나 걸리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미 숙식을 제공받고 있고 첫학기 등록금까지 마련해준 의사 아저씨 부부에게 더 이상 부탁을 한다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었다. 당장 머리카락이 길어도 이발소에 갈 돈도 없었고, 신발에 구멍이 나서 발가락이 삐져 나올 정도가 되었어도 새 신발을 살 수도 없었다.
다른 친구들은 전차표를 끊어서 아무런 거리낌없이 학교를 오갈 때에도 걸어서 등교를 해야 했다. 나는 어느날부터 길을 오가면서 길바닥을 유심히 살펴보며 걷기 시작했다. 혹 누군가가 잃어버린 전차표를 줍는 행운이 오지 않을까 해서였다.
수업 시간이든 쉬는 시간이든 나는 어떻게 하면 돈을 마련할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으나 딱히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부잣집 장남으로 부러울 것 없이 대접만 받고 자라온 처지였으니 돈이라는 것이 어디서 어떻게 흘러가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느날 우연히 급우가 자기 친한 친구가 떡장사를 해서 학교에 다닌다는 것을 흘려 말하는 걸 듣고는 귀가 번쩍 띄였다.
나는 그 친구에게 나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 친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게 무슨 사정이 있느냐고 물었다. 곱상하게 생긴 내 외모를 보아서는 그 같은 일을 할 처지가 아닌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북에서 탈출해 온 저간의 사정을 말하자 그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경복고등학교에 다니는 대부분의 급우들은 부잣집이나 유력한 집안의 자제들이었고, 나도 그들 가운데 하나로 보인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단어 '찹쌀떡'
다음날 수업을 마치고 떡장사를 한다는 친구를 만났다. 그는 어느 골목길로 나를 안내하더니 키가 크고 인상이 좋아 보이는 다른 소년을 소개시켜 주었다. 나보다 약간 어린 듯 보였으나 여유있고 눈이 번쩍거리는 것으로 보아 떡장사에 이력이 붙은 친구 같아 보였다. 그는 당장 내가 떡장사를 시작할 수 있으나, 떡을 판 대금의 25%만 내가 갖고 나머지는 자기에게 주어야 한다고 했다.
엄청난 폭리였으나, 선불 보증금을 요구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땡전 한 푼 없는 처지에서 뭔가 돈이 되는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 기쁘기만 했다. 그는 첫날이니 조금만 팔아 보라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떡더미에서 몇 개를 부지런히 조그만 나무 상자에 담아 주었다. 나는 면끈이 달린 나무상자를 목에 매고 용감하게 서울 시내 한 복판으로 나섰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 저녁의 악몽을 나는 뚜렷이 기억한다. 첫날 나의 비즈니스는 처참했다. 그 친구 말대로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을지로 육정목 번화가에 가기는 했으나 그처럼 쉽게만 보이던 "찹쌀떠~억!"이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가 않았던 것이다. 초저녁부터 찹쌀떡 상자를 매고 이리 저리 왔다 갔다만 할 뿐 소리를 질러대지 못했다. 오히려 누군가가 내 모습을 볼라치면 떡상자를 얼른 감추는 동작이 나도 모르게 나올 지경이었다. 결국 밤 11시까지 단 한 개도 팔지 못하고 낙심한 채 집에 돌아와야 했다.
둘째날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북아현동 의사 아저씨 집에서 을지로 육정목 부근까지 걸어가서는 떡판을 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만 했을 뿐 '찹쌀떡'이라는 세 마디 단어를 외칠 수가 없었다. 세상에 그 단어만큼 어려운 단어가 또 있을까 싶었다.
집에 돌아와 웃목에 떡판을 내려 놓고 쉬다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 목구멍 하나 스스로 챙기지 못할 정도로 용기가 없는 자신이 갑자기 부끄러워 졌다. 이처럼 어려운 처지에서조차 부유한 집안의 장남 티를 내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내일은 용기를 내리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수업이 끝나자 마자 미리 마음 먹은 대로 '떡장사 연습'을 하기로 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한도원, 네 장래는 아주 간단하게 '찹쌀떡'이라는 단어를 외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어. 그래야만 등록금도 벌 수 있고 이발도 할 수 있고 신발도 살 수 있단 말야!"
일단 어두운 골목을 찾아 들었다. 그리고는 "찹쌀 떠~억!" 이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목소리로 하다가 나중에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큰 소리로 외쳤다. 몇 번 외치고 나니 속이 후련해 지면서 조금은 자신감이 생겼다. 대로변을 향해 걸으면서는 입으로는 연신 찹쌀떡을 되뇌었다.
드디어 을지로 육정목을 한참 지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거리가 나타나자 눈을 질끈 감고 큰 목소리로 "찹쌀떠~억!" 하고 외쳤다. 길가던 아저씨가 고함 소리에 깜짝 놀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금방 효과가 나타났다. 이틀 동안 거의 팔지 못했던 찹쌀떡이 신기하리만치 잘 팔려 나갔다.
얼마 되지 않아 떡판의 바닥이 드러나고 호주머니에 부풀어 오르는 돈의 감촉이 느껴지자 침침하던 세상이 갑자기 밝아 보였다. 내가 돈을 벌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장사가 짭잘하게 잘 되어 신이 났다. 며칠을 그렇게 하고 나니 어느덧 여느 소년 떡장사처럼 여유가 생기고 요령도 늘었다. 이제 됐다 싶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이름, 서갑록 선생님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날도 밤 늦게까지 찹쌀떡 상자를 매고 장사를 하다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전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내 등을 가볍게 툭툭 치는 것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다 보니 어떤 남성이 말없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우리 학교 선생님이셨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지면서 당황스런 표정을 지어 보이자 놀라지 말라는 듯 장난하듯 어깨를 다시 툭툭 치셨다. 조용하고 근엄한 모습의 선생님이었던 그는 "네가 이런 일을 해야만 하는 학생인 줄 몰랐다"며 다소 놀라운 표정을 짓고는 "나도 일본에서 공부를 하면서 너처럼 밤에 일을 해야만 했던 고달픈 시절이 있었다"며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여 주셨다.
그는 내가 무척 어려운 처지라는 걸 금세 눈치 챈 듯 언제라도 좋으니 자기 집에 들러 식사를 함께 하자고 했다. 그 뒤로도 그는 진심어린 말투로 자기 집에 함께 가자고 했고, 나는 그때마다 염치없이 선생님 집을 방문하여 따뜻하게 식사 대접을 받았다.
여러 달 동안 굶기를 밥먹듯 하여 영양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몸으로 느끼고 있던 당시에 그 선생님이 차려 준 밥상은 이제껏 먹어본 음식 중에서 최고였다. 아마도 따뜻한 마음으로 받은 대접이어서 인지 맛도 좋았고 먹고 나면 힘이 솟는 것 같았다. 그 선생님 이름은 서 갑 록. 나는 아직까지도 그 선생님 이름과 얼굴을 떠올리면 감사하는 마음이 솟고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낀다.
서갑록 선생님은 다른 면으로도 나에게 잊을 수 없는 도움을 주셨다. 그는 학교 측에 나의 처지를 상세히 알리고 다음 학기 등록을 위해 장학금 혜택을 받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두번째 학기 등록금이 해결되어 얼마나 감사했던지! 평소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나는 이때부터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돕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일생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반드시 천사 같은 분들의 도움으로 '기적'을 체험하곤 했다. 서갑록 선생님이야 말로 나로 하여금 기적을 체험하게 했을 뿐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해야 겠다'는 마음을 처음으로 갖게 한 분이다. 서갑록 선생님은 이후로도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다.
제법 떡장사에 이력이 붙고 수입이 좋아지기는 했으나 다른 문제가 생겼다. 의사 아저씨 집에 머물며 밤늦게 들어 오니 식모의 눈치와 보이지 않는 구박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대문을 놔두고 식모 방에서 가까운 쪽문으로 들락거려야 했는데, 어떤 때는 30분 이상을 밖에서 문을 두드려야 문을 열어주곤 했다.
특히 추운 겨울 눈을 맞아가며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손을 비비여만 하는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식모 아가씨는 의사 부인에게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밤 늦게 들어올 수밖에 없는 사정을 털어 놓았으나, 의사 부인은 내게 조금 일찍 들어오면 좋겠다고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의사 아저씨 집안의 분위기도 나를 대하는 태도가 전과 같이 따뜻해 보이지는 않았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교인들이 방문하여 이런 저런 잔치를 벌이는 분위기에서도 나의 존재는 눈에 띄지 않는 듯 보였다. 그렇찮아도 몇 달 동안 신세를 지고 첫학기 등록금까지 마련해 준 분들인데, 더 이상은 폐를 끼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마스와 정월이 지난 어느날, 나는 의사 아저씨와 그의 부인에게 깍듯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담요 하나와 간단한 짐을 꾸려 집을 나왔다. 그리고는 길거리에 장사를 하다 만난 친구와 함께 을지로 삼정목에 작은 셋방을 얻어 함께 기거하기로 했다. 마음이 편하기는 했으나 당장 방세를 내야하고 먹고 쓰는 데 상당히 많은 돈이 들어가게 되니 자연 다른 여러 장사를 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찹쌀떡 장사는 겨울에는 제법 잘 되었지만, 다른 계절에는 그다지 수입이 좋지 않았다. 철에 따라 군고구마, 군밤, 땅콩 등 이런 저런 장사를 닥치는대로 했는데, 그중 땅콩 장사가 수입이 짭짤한 데다 따뜻한 철에 제격이었다. 하지만 여러 곳을 자주 들락거리며 팔아야 한다는 것이 좀 힘들기는 했다.
한참 학업과 장사에 재미를 붙이던 어느날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장사를 마치고 밤 늦게 돌아와서 골아떨어졌는데, 느닷없이 셋집 주인 아저씨가 술에 취해 나타나서는 당장 나가라고 고함을 치는 것이었다. 방세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황당한 일이었다. 분명 룸메이트 친구에게 내 몫의 비용을 꼬박꼬박 주었는데, 그가 다 써버렸다는 걸 주인 아저씨가 나타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준 돈을 어디에 썼는지 친구에게 물었지만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하며 밝히지 않았다.
극한의 굶주림… 난생 처음 '하늘님'께 기도하다한겨울 새벽에 내쫓겨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던 을지로 삼정목 거리에는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담요로 몸을 감쌌으나 차가운 눈발이 얼굴을 스치고 목더미로 내려 앉기 시작했다. 이러다 얼어 죽는 게 아니냐며 친구에게 원망스런 투로 말하니 그는 근처의 을지로 오정목에 친구 4명이 거주한다며 그곳으로 가보자고 했다.
나는 친구와 함께 새벽 3시경에 그들이 거주한다는 셋집에 찾아가 재워줄 것을 요청했더니 마지 못해 우리를 맞아 들였다. 이렇듯 나의 초기 학창시절은 집도 절도 없이 동가식 서가숙 하며 이리 저리 떠돌아 다니는 생활을 해야 했다. 오늘 좀 괜찮아 지는가 싶으면, 다음날 위기가 또 찾아와서 어쩔 줄 모르게 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아무에게도 곤궁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자존심이 강한 평안도 부잣집의 장남 장손이었다. 비루하지 않게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일찍부터 후창강가에서 문학전집에 빠져 미지의 세계를 그리며 남아의 기상을 키워 왔다. 압록강 건너 중국 대륙을 오가며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의 늠름한 모습을 눈에 익혔던 내가 아니던가.
학교 수업 시간에 너무 배가 고파 거의 실신 지경에 이른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이를 악물고 물배를 채우며 공부에 열중하려 애썼다. 모두가 점심을 먹는 시간에는 한쪽 구석으로 비껴 앉아 조용히 책을 읽었다. 친구들 어느 누구도 내가 그 시간에 책을 읽고 있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친구들은 그런 나에게 '부처'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어느날인가 서갑록 선생님이 나의 안색을 보더니 심상치가 않다며 병원에 가보자고 했다. 나는 괜찮다며 호의를 넌지시 거절했다. 그러자 그는 자기의 친한 친구가 의사이니 병원비는 걱정말라며 끝내 나를 병원으로 안내하여 진찰을 받게 했다. 심한 영양실조라는 판정과 함께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과 함께 종종 고기를 먹고 매일 식사를 거르지 말라고 당부했다. 겁이 더럭 났다.
평소 나는 배고픔을 정신력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것으로 여겼고, 나 스스로도 이걸 실험해 보고 싶은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고향에서 책에 빠져 있을 때 언뜻 어렵게 읽었던 '마음과 육체(Mind and Body)의 분리' 라는 주제가 떠오르기도 했다. 배가 고플 대로 고파 어느 한계점을 넘어서면 어느덧 배고픈 것이 사라지던 경험들을 여러번 했고, 마음과 육체의 분리가 어느 정도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 속에서는 구라파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꼬르륵 거렸으나 맑은 머리로 책을 읽어내려야만 했던 기억들. 16세 한창 나이의 당시를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해 온다.
"죽을 수도 있다"는 의사를 말을 듣고 집에 돌아온 그날. 나는 난생 처음으로 책상에 앉아 손을 모으고 '하늘님'에게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종교가 없던 처지였으나, 기적적으로 험로를 거쳐온 것을 생각하며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돕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해 왔었던 터였다.
"하늘님, 저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있겠지요. 천애 고아와 같은 처지의 저를 살려 주시면 당신의 뜻을 헤아려서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고 나니 왠지 시원한 느낌이 들었고 힘이 솟는 듯했다. 그 당시의 절박한 상황과 기도의 기억이 아직도 선연하다.
그러던 어느날 휴교령이 내려졌다.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히 기억하건데, 그 전염병이 돌고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나의 북한 탈출과 고학 스토리를 쓰기로 했고, 그 스토리가 학교 잡지에 실리고 나자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