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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리스본 여행 당시 한 호스텔에 묵었다. 높디높은 언덕을 오르고 올라 당도한 호스텔에선 까무잡잡한 피부에 환한 미소를 가진 여직원 로파(가명)가 우리를 반겼다. 간단한 예약 정보를 확인하던 로파는 "나도 한국에 있었어"라고 하며 '안녕하세요, 좋아요, 사랑해요, 싫어요, 김밥천국' 등 짧은 한국어를 선보였다.

로파는 포르투갈 인이 아니었다. 포르투갈에서 외국인 근로자로 일하는 인도인이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외국인 근로자로 일했다고 한다. 어떤 일을 했는지 자세히 물어보진 않았지만 한국어를 한 뒤 보인 씁쓸한 미소에서 쉽지 않았던 한국 생활이었으리라 유추해본다.

한국서 일한 지 10년, 라울은 왜 연락이 없을까

2박 3일간 묵기로 돼 있었던 숙소에서의 마지막 날. 로파가 눈물이 가득한 채 우리의 방을 찾아왔다.

"한국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곳에 묵는 한국인이 너희 밖에 없다. 제발 나를 좀 도와달라."

그가 울먹이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한국에서 일하는 친구의 남편이 한 달 동안이나 가족과 연락이 안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로파의 친구는 인도에 있지만 친구의 남편은 한국에서 외국인 근로자로 일하고 있었다. 매주 한 번씩은 꼭 짧게나마 인도로 전화를 걸었는데, 한 달이나 연락이 되지 않으니 무슨 일이 생긴 것이라 직감한 것이다.

남자의 이름은 '라울'(가명)이었다. 2004년 첫 실시된 고용허가제를 통해 3년 간 유효한 취업 비자를 받고 한국에 들어온 라울은 올해로 한국에서 일한 지 10여 년이 됐단다. 미등록 외국인 근로자 신분인 것이다. '한국 경찰에 신고해보라'는 조언이 무색해졌다. 로파가 보여준 라울의 페이스북에는 한국인들과 삼겹살을 먹는 사진, 축구를 하는 사진 등이 있었다. 한국어로 게시물을 올릴 만큼 한국어에도 능숙한 듯 했다.

로파에게서 건네받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031'로 시작하는 번호였다. 사장인 듯 한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여기 포르투갈인데요, 혹시 거기 라울있나요? 제가 지금 묵고 있는 호스텔의 직원과 아는 사이인데 가족과 연락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자 그는 "도망갔어요"라며 뚝 끊어버렸다. 수화기너머 잠시 뜸을 들이며 받은 대답에서 무언가 감추고 있다고 느껴졌다. 일단 그가 도망갔다는 이야기를 전하자 로파는 그럴리 없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전 사업장에서 갖은 학대를 견디다 못해 도망쳤는데, 그때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회사이름을 포털사이트에 검색했다. 경기도 소재의 도장 공사 전문 업체였다. 홈페이지에 있는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같은 목소리였다. 다시 한번 라울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자 "아 도망갔다니까요! 이제 여기 없어요! 전화하지 마세요!"라고 호통을 치고는 끊어버렸다. 역시나 석연치 않은 답변이었다. 회사에서 사고를 당한 것은 아닌가, 출입국 관리소의 단속에 적발된 것은 아닐까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로파는 나에게 다른 부탁을 했다. 한국에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 이 회사에 가서 확인해줄 순 없냐는 것이다. 그들에겐 절박한 부탁이었겠지만 나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산골짜기 낯선 공장에 불법 외국인 근로자를 찾으러 가달라는 부탁은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머나먼 한국까지 와 10년 동안이나 일하며 고생했을 라울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우리나라에서 자행되고 있는 이주노동자자의 노동착취 사례가 떠올라 조금이나마 더 도움을 주고 싶었다.

이번엔 나 대신 한국에 있는 어머니가 전화를 걸었다. 마지막 시도였다. 다시 라울의 안부를 묻자 "그쪽은 어디신데요 자꾸 전화하세요. 혹시 시민단체인가요? 출입국관리소와 관련 있나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니라며, 단지 라울의 안부만 알려 달라며 간곡히 요청하자 그는 또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잘 있어요"라고 답했다.

"그런데 왜 가족한테 연락을 하지 않는대요?"
"몰라요, 자꾸 돈만 달라고 하니까 안하나보죠."
"연락안한지 한 달이나 됐다던데요"
"그만 물어요. 끊습니다."

더 이상 전화통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사장은 미등록 외국인 고용 적발시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것 같았다.

로파에게 이 소식을 전하니 연신 '땡큐! 땡큐!'하며 나를 꽉 안았다. 그리고 곧장 친구에게 전화해 눈물을 쏟아냈다. 하지만 여전히 의구심은 남는다. 그의 가족들은 돈을 요구하는 독촉 전화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잘 있다'는 한마디를 들었으니 됐다 싶었다.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설립, 가능하다

25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주노동자의 노동 3권을 인정해야 한다며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주노조)가 서울지방노동청을 상대로 한 노조설립신고서 반려처분취소소송에서 원고 승소를 확정지었다. 판결을 듣고 나온 이주노조 관계자들은 소송을 시작한 지 10년만에 나온 결과에 환호하며 만세를 외쳤다.
 25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주노동자의 노동 3권을 인정해야 한다며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주노조)가 서울지방노동청을 상대로 한 노조설립신고서 반려처분취소소송에서 원고 승소를 확정지었다. 판결을 듣고 나온 이주노조 관계자들은 소송을 시작한 지 10년만에 나온 결과에 환호하며 만세를 외쳤다.
ⓒ 박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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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기준 우리나라 미등록 외국인 근로자 수는 4만여 명에 달한다. 이들의 실상은 열악하다. 아파도 쉽게 병원에 갈 수 없고 노동법에 맞는 근로조건도 요구하기 힘들다. 미등록 외국인 근로자라도 산재처리가 가능하지만 산재처리가 끝난 즉시 본국으로 떠나야 한다. 라울처럼 생사가 불분명할 경우 가족들은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다. 혹시나 경찰에 신고해 생사를 알게 되더라도 그 즉시 불법체류자 신분이 드러나 한국을 떠나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가족들의 생계는 장담할 수 없다.

지난 6월 25일, 대법원은 이주노동자도 노동조합 설립이 가능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여기엔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도 포함 돼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조합(서울경기인천이주노조) 노동조합 설립신고서를 제출했으나 반려됐다. 첨부한 노동조합 규약에서 '이주노동자 합법화'와 '노동허가제 쟁취' 등이 정치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정하라는 지시였다.

현행법상 5년 이상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은 영주권 신청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주노동자의 체류가능 기간은 최대 4년 10개월에 지나지 않는다. 이주노동자는 영주권 신청 자체가 불가능 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유럽 등에선 10년에 한 번 정도 미등록 외국인들에게 영주권을 발급한다. 업무 숙련도가 높은 미등록 외국인들을 선별해 산업 발전을 꾀하는 것이다. 중소기업 인력난이 극심해지고 3D 산업 기피현상이 두드러지는 현실에서 해당 분야 업무에 능숙한 미등록 외국인 근로자들은 역할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지난달 19일, 24년 동안 최장기 미등록 외국인이었던 필리핀 출신 '로저'가 추방됐다. 마석가구공단에서 일하며 이주노동자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 교통사고로 불이 난 차량에 홀로 뛰어들어 한국인들을 구하기도 했으며, 화재 진압에 나섰다 담벼락에 깔린 소방관을 구해내기도 했지만 그는 그저 미등록 외국인에 지나지 않았다.

지난달 27일엔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선 서울경기인천이주노조와 민주노총 서울본부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이주노조를 상대로 한 노조설립필증 보완통보 요구 규탄 시위'가 열렸다. 로저와 라울이 떠올랐다. 언젠가 라울도 단속에 걸리게 된다면 한국의 생활을 접고 인도로 돌아가야 하리라. 그가 10여 년 간 열정을 바친 한국은 그에게 '추방'만을 선물할 것이다.


태그:#미등록외국인근로자, #이주노조합법화, #이주노동자, #불법체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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