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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개마을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고택으로 TV 등에 자주 등장하여 널리 알려진 집이다.
 한개마을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고택으로 TV 등에 자주 등장하여 널리 알려진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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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전체가 나라의 중요민속자료 255호로 지정을 받은 경북 성주 '한개마을'은 성산 이씨 집성촌이다. 한개마을의 '한'은 한가위 등에 쓰이는 순우리말로 '크다'는 뜻이다. '개'는 개울을 뜻한다. 이는 큰 개울 백천이 동네 앞을 유유히 흐르고 있는 한개마을의 땅 모양에서 동명을 따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실제로 아주 옛날에는 이곳에 큰 나루가 있어서 지명이 '대포(大浦)'였다고 전해진다. 한글 이름 '한개'와 한자명 '대포'는 소리만 다를 뿐 그 의미가 같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이 마을을 개척한 사람은 세종 때 진주 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였다. 본래 이곳은 뒷산에 신라 고찰 감응사만 외로이 남아 있던 한적한 외지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우는 단숨에 길지(吉地)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는 남쪽으로 백천이 흘러 들판이 조성되어 있고, 북쪽으로 해발 322m의 영취산이 아늑하게 땅을 감싸 안고 있는 이곳의 좌청룡 우백호 지형을 꿰뚫어보았다. 이곳에선 과거 합격자가 연이어 탄생했고, 특히 이원조, 이진상 등 이름난 유학자와 이승희 등 독립운동가들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한개마을에는 조상들의 터전을 지키고 가꾸며 성산이씨 후손들이 560년 이상 살아가고 있다.

좌우 산세가 아늑하게 감싼 마을

한개마을은 75호의 전통가옥들이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있다. 이 중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도 10곳에 이른다. 따라서 한개마을은 답사 동선을 잘 잡을 필요가 있다. 특히 뒤로 산을 끼고 있는 산골 마을이라는 특징을 만끽할 수 있는 여정을 준비해야 한다.

가능하면 영취산을 걸어올라 감응사에서 한개마을 전경을 한번 내려다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멀리 백천이 흐르고 좌우로 산세가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한복판에 집들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을 가운데를 지나 감응사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고, 사찰까지 닿는 데는 30분가량 걸린다. 걷기가 어렵다면 한개마을 조금 서쪽에 개설된 감응사행 차도를 이용할 수도 있다.

감응사에 다녀올 계획이 없는 일반 방문객은 한개마을 문화해설사의 집을 찾으면 된다. 이곳에 방문객을 위한 주차장이 설치되어 있다. 차에서 내리면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직선의 길이 눈에 들어온다. 첫째 삼거리가 시야에 잡힐 만큼 가까운 지점에 있다.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접어드는 것이 좋다. 이 길을 추천하는 까닭은 교리댁, 응와 고택, 월곡댁이 오르막에 연이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교리댁은 한개마을로 들어가 처음 나오는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접어들었을 때 처음 만나는 고택이다. 길에서 대문으로 가는 오르막이 특히 인상적이다.
 교리댁은 한개마을로 들어가 처음 나오는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접어들었을 때 처음 만나는 고택이다. 길에서 대문으로 가는 오르막이 특히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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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댁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43호로 1760년대 주택이다. 집을 지은 이는 이석구로 영해부사, 사간원 사간, 사헌부 집의 등을 역임했다. 그 후 후손 이귀상이 홍문관 교리를 역임했는데 택호는 거기에 유래했다. 2000여㎡의 대지 위에 대문채, 사랑채, 서재, 중문채, 안채, 사당 등 6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교리댁은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찍은 사진들이 유명하다. 경사를 잘 활용하여 집으로 들어가는 길을 내었는데, 길 좌우로 단아한 담을 높게 쌓은 덕분에 저절로 중후한 분위기가 넘쳐흐른다. 오랜 세월의 무게를 뽐내는 고목이 휘영청 그늘을 만들어주는 아래로 위엄있게 세워져 있는 대문채를 쳐다보노라면 방문객은 나도 모르게 집주인이 궁금해진다.

교리댁 바로 뒤에 응와(凝窩) 고택이 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44호인 응와 고택은 1721년(경종 1)에 지어졌다. 창건주 이이신은 성산이씨가 한개마을에 입향할 당시 종택이 들어섰던 자리를 집터로 잡았다. 그런데 응와 고택은 북비 고택이라는 별칭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된다.

사도세자의 호위 무사였던 이석문은 집에 북문을 내고 늘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며 충의롭게 살았다. 사진은 북비고택의 일부
 사도세자의 호위 무사였던 이석문은 집에 북문을 내고 늘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며 충의롭게 살았다. 사진은 북비고택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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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비고택의 북쪽으로 나 있는 좁은 문.
 북비고택의 북쪽으로 나 있는 좁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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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이 북비 고택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 것은 이이신의 아들 이석문과 관련이 있다. 이석문은 억울하게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제사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북쪽으로 문을 내고는 늘 북향 재배하였다. 사도세자의 호위 무관이었던 이석문은 임금이 아들인 세자를 죽일 만큼 혹독한 당파 싸움의 살벌함 속에서도 변함없는 충의를 실천했다.

북비 고택은 많은 인물을 배출한 집으로도 유명하다. 사도세자에게 충의를 다한 이석문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이규진도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손자인 응와 이원조는 한성판윤과 공조판서를 역임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대학자로도 추앙을 받았다. 그 결과 1899년(고종 36) 솟을대문을 증축하여 대감댁의 면모를 지니게 되었고, 1910년(순종 4) 사당도 증축하여 위용을 갖추었다.

언덕처럼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 북비 고택의 대문에서 아래로 내려와 길에 선다. 영취산 쪽을 바라보면 월곡댁 대문이 버티고 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46호인 월곡댁은 교리댁과 북비 고택에 비해 한참 후대 가옥으로 1911년 이전희가 처음 건립했다. 이 집은 20세기 가옥답게 음악회를 여는 등 가장 개방적으로 열려 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마당 가득 장독이 놓여 있는 것과, 집 안에 길이 있을 정도로 땅이 넓고 규모가 큰 데 놀란다.

눈길 사로잡는 담장... 기와 위에 얹힌 하늘

20세기에 들어서서 지어진 가옥으로 음악회 등 행사를 열기도 하는 개방적인 월곡댁.
 20세기에 들어서서 지어진 가옥으로 음악회 등 행사를 열기도 하는 개방적인 월곡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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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댁 대문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산길을 오르면 한주종택까지 이어지는 멋진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이 담장길은 감응사 등산로(맨 오른쪽 사진)와 마주친다.
 월곡댁 대문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산길을 오르면 한주종택까지 이어지는 멋진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이 담장길은 감응사 등산로(맨 오른쪽 사진)와 마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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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댁의 담장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기와가 얹힌 담장이 높게 오르막을 따라 영취산까지 치솟아 이어지고 있다.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담장 옆으로 난 좁은 산길을 걷지 않을 수 없다. 마침 담장 옆을 따라 걸어서 내려오는 젊은 연인과 마주친다. "길이 있습니까?"라는 우문에 "아주 멋집니다, 걸어보세요"라는 현답이 돌아온다.

길은 오른쪽에 담장, 왼쪽에 산을 거느리고 있다. 담장 위에 얹힌 기와 위로는 다시 하늘이 얹혀 있다. 월곡댁의 지붕이 가끔 푸른 하늘빛을 받으며 담장 위쪽에서 반짝이기도 하고, 가끔은 뿌리를 산에 둔 거목들이 흩날리는 잎사귀가 사람의 어깨에 내려와 앉는다. 그늘이 시원하고 바람은 선선하다. 바람과 그늘은 마치 "지금까지 땡볕을 받으며 고택들을 답사하느라 수고가 많았구려"하며 귓속말을 속삭이는 듯하다.

한개마을에 와서 이 길을 걸어보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참으로 아쉬워할 일이다. 한참이나 이어지는 담장의 길고 긴 규모가 자연스레 월곡댁의 규모를 증언해주지만, 특히 담장 중간쯤에 있는 산으로 낸 작은 문 하나가 더욱 그런 실감을 느끼게 해준다. 더는 집도 없는데 이 작은 문은 왜 내었을까. 산에서 땔감을 지고 내려오는 하인을 위한 배려이지 않았을까. 작은 문 앞에서 기분이 유쾌해진다. 담장에 손을 짚은 채 저 아래로 마을 풍경과 백천 너머 들판을 한가로이 바라본다.

담장이 오른쪽으로 굽어 도는 지점에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타난다. 감응사로 가는 등산로와 마주치는 지점이다. 요즘은 차를 탄 채 감응사 턱밑까지 갈 수 있지만, 옛날 불신도들은 모두 이 길을 걸어서 법당에 이르렀을 것이다. 즉, 지금은 이 길을 두고 쉽사리 "등산로"라 부르지만, 예전에는 누구나 "기도하러 가는 길"이라 했을 것이다.

북비고택으로 많이 알려진 응와고택 대문 앞 길 건너편에 있는 이석문 신도비.
 북비고택으로 많이 알려진 응와고택 대문 앞 길 건너편에 있는 이석문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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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꺾는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내리막길이다. 금세 경상북도 민속자료 45호인 한주(寒洲) 종택에 닿는다. 한주 종택은 한개마을에서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고택이다. 본래 1767년(영조 43)에 이민검이 창건했지만 1866년(고종 3)에 한주 이진상이 중수했다 하여 그런 택호가 붙여졌다. 근래에는 현 소유자의 할머니가 상주 동곽에서 시집을 왔다고 하여 "동곽댁"이라는 새 별칭도 얻었다.

한주 종택 또한 북비 고택처럼 많은 인재를 배출한 집이다. 이 집에서 태어나 성장한 이진상은 조선 말기의 대표적 유학자로 널리 알려졌고, 이진상의 아들이자 제자인 이승희와 손자 이기원, 이기인은 일제의 침탈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세 부자가 모두 건국훈장을 받은 한주 종택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뚜렷한 사적이라 할 만하다.

한주 종택을 나와서 내려오면 골목 오른쪽에 도동댁(경상북도 민속자료 132호), 왼쪽에 극와 고택(경상북도 민속자료 177호)이 바로 나타난다. 극와 고택과 골목을 거의 마주한 자리에는 하회댁(경상북도 민속자료 176호)도 터를 잡고 있다.

안동 하회에서 시집을 온 안주인의 고향에 유래하여 하회댁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고택으로 한주종택 앞에 있다.
 안동 하회에서 시집을 온 안주인의 고향에 유래하여 하회댁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고택으로 한주종택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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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한복판 길을 곧장 내려오면 어느덧 북비 고택 쪽으로 올라갈 때 지나쳤던 삼거리가 보이고, 오른쪽에는 담장에 한개마을의 경치를 두루 담은 사진들을 붙여둔 집이 나타난다. 혹 못 본 고택이나 풍경이 있나 생각하면서 사진들을 감상한다. 누구인지 모르는 집주인에게 마음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이제 마지막으로 진사댁(경상북도 민속자료 124호)를 둘러본다.

이 집이 진사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현 소유주의 선조인 이국희가 1894년 조선 왕조의 '마지막 시험'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개마을의 진사댁이라는 택호에는 우리 역사의 슬픔이 그렇게 깃들어 있다.

하지만 한개마을은 그 슬픔을 딛기 위해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도저히 낫지 않던 신라 왕자의 난치병도 이 마을 뒷산의 감응사에서는 완쾌되었다고 전해진다. 앞으로 또 이곳에서 큰 학자, 나라를 구할 위대한 운동가가 태어나기를 기원하면서, 가을이 되면 한개마을의 또 다른 빛깔을 보기 위해 다시 찾아올 것이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태그:#한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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