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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어느 날, 마을 초입에 있는 휴대전화 기지국을 수리하는 모습이다. 마을은 작고 타워는 높아 작업하는 모습이 집 안에서도 한눈에 보였다.
 지난해 여름 어느 날, 마을 초입에 있는 휴대전화 기지국을 수리하는 모습이다. 마을은 작고 타워는 높아 작업하는 모습이 집 안에서도 한눈에 보였다.
ⓒ 조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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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도, 라디오도,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도 나오지 않았다. 인터넷 광케이블도 없다.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충남 금산군 남이면 활골에 있는 우리 집 이야기다. 지난해 봄 귀촌하면서 가장 당황스러웠던 순간들이다. 서울에서 당연하게 누렸던 것들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대한민국에 이런 곳도 있구나 싶었다.

물론 우리 집만 그런 것은 아니다. 마을 전체가 그렇다. 난시청 지역이라 TV 수신료도 없다. 그렇다고 전파와 담을 쌓고 지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을 초입에 높다란 셀 타워가 자리하고 있다. 동네 어르신들 말씀으로는 몇 년 전 이 기지국이 생기면서부터 휴대전화가 잘 터진다고 한다. 나야 휴대전화가 없어 별 소용도 없지만.

상황이 이러니 판단이 빨라야 했다. 라디오와 DMB는 일찌감치 포기했고 대신 텔레비전을 위해 위성 안테나를 달았다. 텔레비전 없이 지낼까 싶었지만, 아는 이도 없고 해가 빨리지는 산골에서 긴긴밤을 보내려면 바보상자 하나쯤 필요할 것 같았다. 간혹 기상 악화 탓에 위성방송마저 끊기면 고립감을 주는 단점도 있지만, 아내를 위한 작은 배려였다.

사실 텔레비전은 없어도 그만이지만 인터넷은 다른 문제였다. 온라인으로 국경도 뛰어넘는 21세기 아닌가. 광고에서는 전국 곳곳에 '기가 팍팍' 넘친다고 자랑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통신 3사 모두 주소만 듣고 '설치 불가지역'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KT 금산지사로 직접 전화해 어렵사리 부탁한 덕에 전화선을 이용하는 인터넷이라도 원한다면 깔아주겠다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행복은 적당한 결핍 필요

집 앞 돌담에 해바라기가 피었다.
 집 앞 돌담에 해바라기가 피었다.
ⓒ 조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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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이 켜지고 인터넷도 연결되니 큰 불편은 없다. 간혹 끊기거나 느리긴 하지만 시골에서 도시의 속도를 기대하지 않았으니 괜찮다. 행복은 모든 것을 다 갖춘 상태가 아니라 적당한 결핍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온-오프라인 할 것 없이 여유 있게 살라는 자연의 가르침이라 여기기로 했다. 해가 지면 모든 것이 정지하는 산골에서 초고속 인터넷을 타고 다니면 멀미할지도 모른다.

전파뿐 아니라 사람도 밖으로 나가려면 산 하나를 넘어야 한다. 진악산이 가로막은 탓에 읍내에서 자동차로 25분 거리다. 마을로 들어오는 마지막 다리인 원상금교를 건너면 대략 1.5km 정도의 좁은 길이 이어진다. 아마 대개의 산골이 그러하듯 이 길에는 가로등이 없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잠시 끄면 온 세상이 칠흑 같은 암흑으로 변한다.

밤에 다니려면 천천히 조심스럽게 운전해야 한다. 어둡고 좁은 길 외에도 복병은 있다. 간혹 여기저기서 뛰어나오는 산짐승이다. 그나마 족제비나 오소리는 재빨리 피하기라도 하는데 고라니는 헤드라이트를 보면 몸이 굳어지는지 길 한가운데 그대로 서버리기 일쑤다. 그럴 땐 라이트를 깜빡여 주면 제정신이 돌아와 어디론가 훌쩍 사라진다.

마치 고라니처럼 나도 길 한가운데 그대로 서버린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레일 위를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결정된 삶에서 벗어나 다시 행선지를 알 수 없는 불안한 출발선에 서"(최규석의 <송곳>)기로 했을 때 이미 예정된 일이었을 것이다. 호기롭게 자본주의 급행열차에서 내렸으나 시차를 극복하기엔 시간이 더 필요한가 보다. 그럴 때는 정신 차리라고 고라니가 소리쳐준다.

야밤의 적막을 깨는 소리

고라니가 소리 지르는 모습은 달도 지켜보았다.
 고라니가 소리 지르는 모습은 달도 지켜보았다.
ⓒ 조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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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자정 무렵, 창밖에서 악쓰는 소리가 났다. 모니터 불빛 외에는 없는, 어둡고 고요한 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때였다. 열 가구 남짓 사는 이 마을에서 이 시각에 이렇게 소리 지를 녀석은 딱 하나, 고라니다. 녀석의 명성은 이사 오기 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처음 이 집을 방문했을 때 집주인인 선배는 야밤에 간혹 고라니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어떤 소리인지 묻자 별다른 설명 없이 '들어보면 알 것'이라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사 며칠 후 우리를 환영하는 듯한 녀석의 가열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듣는 소리였지만, 아내와 나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바로 이거구나! 하지만 소리 자체는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야밤의 적막을 깰 만큼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구슬픈 것은 아니고 사람의 비명과 비슷했다. 이게 울음인지 구애인지 혹은 정신 차리고 살라는 일갈인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산골에서 자란 누군가에게 유년의 추억이 담긴 소리일 수도 있고, 비무장지대에서 근무한 예비역에게는 군 생활을 떠오르게 하는 소리일 수도 있을 듯하다. 이쯤 되면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궁금할 것이다. 대체 어떤 소리인지. 도시에서 자라 고라니의 세례를 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 손전등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소리의 크기로 짐작건대 집 앞 산자락 어딘가 가까운 곳에 있는 듯했다. 주머니에 있던 아이팟 터치로 녹음한 고라니 소리다. 눈감고 음미해보시라. 자, 간다.




○ 편집ㅣ손병관 기자

덧붙이는 글 | '활골닷컴'(hwalgol.com)에도 비슷한 내용이 연재됩니다.



태그:#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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