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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1990년대 황금기를 맞아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받고 '전자초고속도로' 등 작품에서 성공을 거두고 한국에서 1995년 광주비엔날레의 유치시키는 등 그 역할이 컸다. 그런 공로로 1996년 3월 삼성재단 호암상을 수상했지만 작업에 대한 과로로 4월 뉴욕 자택에서 쓰러진다. 그의 생애 최고의 전성기에 최고 위기를 맞는다 -기자 말

백남준 I 'W3(World Wide Web)' 64 TV모니터 가변설치 1994. 학고재 전시 때 장면
 백남준 I 'W3(World Wide Web)' 64 TV모니터 가변설치 1994. 학고재 전시 때 장면
ⓒ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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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비엔날레에 참가한 백남준은 그 여세를 몰아 1994년 'W3(World Wide Web)'를 발표해 이제 '인터넷'시대가 왔음을 알린다. 64개 TV모니터를 사용한 대형 작품으로 화면 넘어가는 속도까지 조절하며 관객을 즐겁게 하려고 눈높이도 맞췄다. 세계가 더 원활하게 소통하게 하려는 그의 이상향을 보다 큰 스케일의 작품으로 구현했다.

이밖에도 1994년 백남준의 일정은 분주했다. '전자초고속도로' 연작을 업그레이드 시키면서 미국순회전에 나섰다. 또 휘트니미술관에서 강익중과 2인전, 독일 루트비히박물관, 폭스바겐박물관에서 비디오 테이프전, 일본 스게츠 미술관에서 보이스와 2인전, 퐁피두와 하워드 와이즈미술관에선 단체전 그리고 서울 뉴욕 멀티미디어예술제에도 참가했다.

1995년 백남준 생애 최고의 해

백남준 I 전자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highway)_미국50개주' 49-channel closed circuit video installation, neon, steel and electronic components 1995. 백남준아트센터 전시 때 찍은 사진
 백남준 I 전자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highway)_미국50개주' 49-channel closed circuit video installation, neon, steel and electronic components 1995. 백남준아트센터 전시 때 찍은 사진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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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www.youtube.com/watch?v=p16JxNV90SU

1995년 작 '전자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highway)_미국50개주'은 이 연작 중 가장 완성도 높은 것으로 워싱턴 DC 스미소니언 미국미술관에 기증됐다. 백남준은 이 작품을 통해서 어느 미국작가보다 미국을 더 구체적으로, 환상적으로 아름답게 그려냈다.

그리고 한국은 6월 7일에 숙원사업인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을 개관했는데 이 일이 성사되는 데 백남준은 일등공신이다. 그는 1993 대전세계엑스포 행사 때부터 세계미술계 거물급을 만나 지지를 받아냈고 실제로 그 성과를 이뤘다. 백남준도 이것은 한국 미술의 쾌거라며 기뻐했다. 전수천 작가가 처음으로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 출품, 특별상도 탔다.

이에 발맞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호랑이의 꼬리展_95베니스 한국현대미술관특별전'이 열렸고 이로써 한국미술도 이제 세계미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

1995년 광복절 50주년을 맞아 KBS가 '세계 속에 한국인' 특집 편에서 백남준을 주인공으로 선정할 정도로, 한국에서 백남준의 위력이 최고조에 달했다. 한편 백남준은, 한국은 다 좋은데 정보 분야가 너무 뒤져 그 보완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한국미술 세계화와 광주비엔날레 출범

2014년 광주비엔날레 기자간담회모습. '터전을 불태워라'는 주제로 열린 그해 광주비엔날레 총감독 제시카 모건(Jessica Morgan)이 전시 전반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2014년 광주비엔날레 기자간담회모습. '터전을 불태워라'는 주제로 열린 그해 광주비엔날레 총감독 제시카 모건(Jessica Morgan)이 전시 전반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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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제1회 광주비엔날레 출범에도 적잖게 기여했다. <경계를 넘어>를 주제로 임영방 서울 미대 교수가 조직위원장이 되었고, 49개국 작가 87명이 그해 9월 20일부터 11월20일까지 열려 이로써 한국미술이 세계진출을 하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물론 광주비엔날레가 유치된 뒷이야기도 있다. 1993년 긴 군사독재시절을 보내고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호남의 소외감을 해소하는 방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한 호남인사가 대통령에게 광주에 비엔날레를 유치해 달라고 건의해 2년간 준비 끝에 성사되었다는 것이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 관련 당시 백남준 인터뷰 기사 중 하나를 소개하면, MBC 기자가 "이번 광주비엔날레 전시의 대원칙이 뭐냐?"고 물으니 "내가 의도하는 건 관객과 작가의 괴리를 좁히는 것, 그런 것이 예술과 인생의 진의다"라며 명쾌하게 대답했다. 관객의 참여와 소통을 중시하는 문화민주주의 작가답게 그는 그렇게 한 마디 남겼다.

21세기 형 미디어아트, 한국에 첫 소개

1995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인포아트(Info ART)' 도록표지 1995 삼신각 간행
 1995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인포아트(Info ART)' 도록표지 1995 삼신각 간행
ⓒ 삼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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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광주국제비엔날레 시작 이상으로 중요한 사건은 바로 백남준이 기획한 특별전 '인포아트(Info ART)'전이다. 이 전시는 100만 달러가 들어간 아시아 초특급 전시로 가상현실의 창시자인 '스콧 피셔'를 비롯해 컴퓨터 천재 7명이 내한해 예술과 컴퓨터 만나는 최초의 전시였다. '비디오아트'에서 더 나간 21세기형 첨단 '미디어아트'를 선보였다.

백남준은 이 특별전에 뉴욕미술계 인맥을 총동원해 뉴욕현대미술관 내로라하는 '바바라 런던' 큐레이터와 유명 작가를 광주로 불러들여 세계미술조류에 어두운 한국미술의 견문을 넓혔다. 또 백남준은 김홍희와 신시아 굿맨(C. Goodman)을 한국과 미국의 큐레이터로 지명했고 현대미술에서 정보와 미디어를 얼마나 중요한지 한눈에 인식시켜줬다.

당시 시사저널 편집부장(대행)인 김훈 소설가가 특별전에 관련 인터뷰를 청하며 "이번 인포아트 전에 메시지가 뭔가"를 묻자 백남준은 "난 메시지가 중요치 않다. 나같이 가난한 예술가는 메시지를 주업으로 하는 영화시장에 대항할 수 없다. 나는 메시지가 담긴 예술보다 더 본질적인 것, 더 고귀한 것을 추구한다. 나는 지금까지 예술에서 '의미'를 탈각시키는 세계 속에서 살아 왔다"며 노자가 말하는 공(空)의 미학을 강조했다.

이 작품은 후쿠오카 아시아문화상 수상 등 예상 밖 큰 성과를 냈다. 하지만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의 말에 따르면, 백남준은 몸을 사리지 않고 모든 것을 던지는 스타일로 그 자신은 오히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도 큰 타격을 받았단다.   

백남준 인포아트전에 '고인돌' 출품

백남준 I '고인돌' 1995. 이정성(백남준 전자기술자) 사진제공
 백남준 I '고인돌' 1995. 이정성(백남준 전자기술자) 사진제공
ⓒ 이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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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또 '인포아트'에 자신의 작품 '고인돌'을 직접 출품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순천 등 이 지역의 고인돌에도 관심이 매우 높았다. 이곳 유적을 통해 선사시대 옛 선인들이 보여준 생활양식이 주는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바탕으로 만든 '비디오조각'이다. 

백남준은 항상 시간과 공간의 구획을 허물고 하나로 엮어내는 작업에 관심을 두었고 그것이 '비디오'라는 미디어를 통하면 가능하다고 믿어왔다. 이 작품도 그런 측면을 보인다. 원시와 현대라는 시간적 차이와 선사시대의 삶의 방식과 현대의 삶의 상황과 같은 공간적 환경적 차이에도 어떻게 인류가 상호소통하면서 발전해 왔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서울 상업화랑에서도 전시

1995년 9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열린 '백남준 95전' 도록표지(갤러리 현대) 1995
 1995년 9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열린 '백남준 95전' 도록표지(갤러리 현대) 1995
ⓒ 갤러리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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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화랑인 갤러리현대(사간동)와 박영덕갤러리(청담동)과 조선일보갤러리(정동)에서는 9월 거의 한달 '예술과 통신' 주제로 '백남준전'을 열었다. 5.2미터 대형 '커뮤니케이션 타워[위 표지에 보는 작품]'과 280대 TV가 들어간 '메가트론(7분)'도 선보인다. 백남준도 이를 두고 소프트와 하드의 완벽한 만남이 이룬 발명이라고 자평했다. 

이 전시에는 도한 대중적 선호도가 있는 'TV로봇'을 선보였다. 거기에는 조선의 천재이자 창의적이고 과학적인 인간의 전형인 '정약용'뿐만 아니라 외국의 과학자 '퀴리 부인', '갈릴레오' 등이 포함된다. 이런 작품 뒤에 숨은 메시지는 우리가 한반도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되며 보다 예술과 과학의 발전을 도모해 진취성을 보여야함을 은연중 강조했다.

백남준은 당시 대형프로젝트 작업을 하느라 자금이 많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하여간 동시에 세 곳에서 열린 이 전시를 당시에 본 경향신문 이용 기자는 기사를 통해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 비디오전 전시 그 이상'이었다고 전했다. 그는 이렇게 한국 상업화랑의 수준도 국제 급으로 끌어올리는 데도 기여했다

이 도록에는 백남준의 유명한 비디오아트의 공식이 나온다. "하나의 원(圓)이 있다. 예술(藝術)이다. 또 하나의 원(圓) 이 있다. 통신(通信)이다. 이 이원(二圓)이 겹쳐지는 대추씨 같은 모양이 바로 비디오아트(Video Art)이다. 비디오아트는 대추씨처럼 딱딱하다" 이 공식으로 보면 아트(Art)와 통신(Communication)은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로제타석(石)에 쓴 백남준 예술의 골자

백남준 I '고속도로로 가는 열쇠' 1995. 이 로제타 석에 백남준 예술론이 요약되어 있다. 백남준아트센터 전시 때 찍은 사진
 백남준 I '고속도로로 가는 열쇠' 1995. 이 로제타 석에 백남준 예술론이 요약되어 있다. 백남준아트센터 전시 때 찍은 사진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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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같은 해 로제타석(石) 형식에 영어·프랑스어·독어·일본어·한국어 5개 국어로 자신의 예술의 골자가 담긴 '고속도로로 가는 열쇠'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그 중 일부를 소개하면 "나는 내 피 속에 흐르는 시베리아-몽골리언 요소를 좋아한다(Ich mag das chaotische sibirisch-mongolische[독일어])"거나, "굿의 어원은 '얼' 즉 정신자체이니 미디어와 굿은 거의 같은 말이다[한국어]"거나 "의심할 여지없이 나의 몽골선조들은 이 문화로 내게 영감을 불러일으킨다(Mes ancêtres mongols m'inspirent sans doute ce nomadisme culturel[프랑스어]" 등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그 내용을 분석해보면 그의 예술은 몽골전승의 굿과 샤머니즘에서 온 것이고, 전자시대 거기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미디어'라는 해석이다. 백남준에게 '미디어'란 중세개념으로 신과 교류하는 '매개체(meditator)' 혹은 '영매(靈媒)'를 뜻한다. 다시 말해 굿과 샤머니즘, 미디어와 퍼포먼스는 서로 다른 게 아니라 같다는 설명이다.

또 백남준이 이런 몽골의 샤머니즘에 열광하는 이유가 거기에 모든 예술의 원천이 되는 원시적 생명력이 넘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우리의 굿에서도 보면 무당이 산자와 죽은 자마저도 소통시키는데 세상에 이렇게 원활할 '미디어'가 어디 있는가.

이런 면에서 볼 때 백남준은 서양과학이 추방시킨 야생적 사고의 복원을 요구한다. 서구에서 끔찍한 나치 역사가 그에게 큰 각성을 주었으리라. 그래서 백남준은 야생적 사고와 원시적 상상력 결핍이 현대인의 비극은 낳는다고 봤고 이것은 프랑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자 클로드-레비스트로스와 같은 맥락이다.

그러면서 백남준은 말하기를, 그의 어머니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고 했다. 물론 백남준 자신은 어머니처럼 샤머니즘을 종교로 믿는 건 아니나 샤머니즘에서 예술적인 영감의 소재로 끌어와 샤머니즘을 예술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백남준 최고정점에서 쓰러지다

백남준 선생 이 자택에서 뇌졸증으로 쓰러지다. 주소는 소호지역 머서가 110번지 5층(110 MERCER Street 5th floor). 이번 6월-7월에 여러 번 현지 지인을 통해 시게코 여사를 만나고 백남준 작업실을 사진 찍으려 했으나 시게코 여사의 건강이 최악으로 치달아 다음으로 미루었는데 시게코 여사 지난 7월 23일 영면했다
 백남준 선생 이 자택에서 뇌졸증으로 쓰러지다. 주소는 소호지역 머서가 110번지 5층(110 MERCER Street 5th floor). 이번 6월-7월에 여러 번 현지 지인을 통해 시게코 여사를 만나고 백남준 작업실을 사진 찍으려 했으나 시게코 여사의 건강이 최악으로 치달아 다음으로 미루었는데 시게코 여사 지난 7월 23일 영면했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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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이렇게 자신의 예술관을 정리해 발표하는 등 최고의 정점을 맞을 즈음에 한국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6년 3월 25일 삼성재단 호암아트홀에서 호암상을 수상한다. 이때부터 그는 '레이저아트' 분야를 실질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한다.

김홍희 저 <굿모닝 미스터 백!>을 보면 이 시상식과 동시에 '백남준 국제학술대회'가 열린 사실도 알 수 있다. 참석자로 미국의 '존 핸하르트', 프랑스의 '장-폴 파르지에', 독일의 '에디트 데커 필립스', 일본의 '이토 준지' 등이 내한했다. 모두 다 백남준 전문가다.

그러나 백남준은 뉴욕으로 돌아간 지 2주가 된 4월 9일 저녁 자택인 소호 머서가(街) 110번지 5층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백남준은 1996년 그해 독일 유력 경제지 <캐피탈>에서 세계미술가 랭킹 7위에 오를 정도로 전성기였는데 청천벽력 같은 비보였다.

전 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던 그도 뇌졸중으로 인해 왼쪽 몸을 못 쓰게 된 후 그는 국내언론과 인터뷰에서 "내가 작품에 대한 과한 욕심을 부려 벌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휠체어에 갇히게 되나 입원한 지 5개월간 눈물겨운 투병생활 끝에 마침내 퇴원한다.

백남준 쓰러진 후 시게코 여사의 증언

백남준 1996년 3월 25일 호암상을 수상할 당시 영상자료 캡처. 자료 이정성씨 제공
 백남준 1996년 3월 25일 호암상을 수상할 당시 영상자료 캡처. 자료 이정성씨 제공
ⓒ 이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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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이를 가까이서 지켜 본 시게코 여사가 상세한 증언한 책 <나의 사랑 백남준> 중에서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남준은 당뇨 등으로 건강체질이 아니다. 베니스비엔날레 전시장에서 쓰러져 잔 것도 그 원인이다. 하여간 남편은 3월 호암상[위] 때문에 간 긴 서울·뉴욕여정에도 잘 귀가했다.

그런데 1996년 4월 9일 저녁식사 때 남편은 재채기가 멈추지 않았다. 갑자기 정신없이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그냥 바닥에 쓰러졌다. 왼쪽 반신을 마비시킨 뇌졸중이었다. '남준 정신 차려요' 아무리 불러도 눈을 뜨지 못했다. 4층에 사는 조수 '존 매카바시'를 불렸고 주치의와 왔다. 앰뷸런스로 이곳 옆에 있는 뉴욕대학 부속 유대인병원에 이송했다.

내 눈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렸다. '그 외롭고 힘든 나날 가난의 터널 지나 이제 명성을 얻어 가는데 이렇게 쓰러지다니' 앰뷸런스에서도 응급실에서도 울고 또 울었다. 응급실에 도착하자 남준은 정신을 좀 차렸다. 목숨만은 건졌구나 싶었다. 파리한 모습의 남준은 날 안심시키려 '걱정마! 오늘이 부활절이라 나는 절대 죽지 않아'라고 말했다.

일방병실로 옮겨지자 백남준은 소리를 쳤다. '시게코 나 당장 나갈래' 하지만 그는 병원에 갇혀 있다는 걸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다. 그 다음날 새벽 5시에 한국인 기술조수 이정성씨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을 빨리 퇴원시키라고 했다. 이정성씨가 쇼킹한 소식에 단숨에 달려왔지만 새벽에 병원에서 그의 퇴원을 허락할 리 없었다.

백남준은 긴 상념에 빠져 있었다. 그는 '세계의 부조리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어. 내가 왜 이렇게 쓰러져야 하지. 세상도 신도 참 불공평하지'라고 중얼거렸다"

[백남준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섹스치료'를 받은 이유와 부인이 이를 작품화한 사연]

시게코여사가 백남준의 '섹슈얼 힐링'을 소재로 만든 작품 중 스틸컷
 시게코여사가 백남준의 '섹슈얼 힐링'을 소재로 만든 작품 중 스틸컷
ⓒ 구보타 시게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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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왼쪽을 못 쓰게 된 이후 응급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겼으나 병실에 창문이 하나밖에 없어 참으로 답답해했다. 백남준은 이러다가 병이 낫기는커녕 몸이 더 악화되겠다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자 백남준 조수인 이정성씨와 존 매카바시 씨는 이 병원의 다른 병실을 샅샅이 뒤져 4층 삼면이 창문이 있는 곳으로 옮겼다.

병실을 옮기자 담당의사도 바꿨다. 백남준은 '그린 반'이라는 이름을 보고 독일계인 걸 안 독일어로 인사를 건넸고, 의사가 그의 신상을 캐묻고 그가 세계적 작가라는 걸 알고 된 후 더 친밀하게 대해주었다.

그 의사가 쓰는 치료방법은 독특하다. <섹슈얼 힐링>이라는 것인데 리비도를 이용한 남성용 재활치료 중 하나다. 백남준도 만족했다.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빨간 타이즈를 입은 갓 대학을 졸업한 젊은 2명의 간호사가 나타났다. 이들은 백남준을 갓난아이처럼 다루었고 풍만한 가슴으로 백남준의 몸을 마사지하는 등 물리치료도 했다.

이런 투병과정을 시게코가 작품화하게 되는 계기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간호사가 "어머 백 선생님이 여기 웬일이세요?" 물었다. 대학시절 백남준 강의를 들었던 학생이었다. 그녀는 부인에게 당신은 비디오작가인데 '왜 이런 중요한 순간을 작품화하지 않으세요'라는 말에 시게코도 아차 싶어 작품을 착수한다.

또 한 가지는 백남준이 병원을 옮긴 이야기를 해 보자. 처음에는 뉴욕대학 유대인병원에 있었는데 시게코는 미국에서 당시 최고재활병원인 '러스크 인스티튜트'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거기 들어가려면 하버드 대입학보다 더 어렵다는 병원이었다. 한번은 휘트니미술관 큐레이터 '데이빗 로스'가 백남준 문병을 왔기에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가 우리 휘트니미술관의 이사가 거기서 일하니 알아보겠다고 했고 인연이 닿아 병원도 옮겼다.

이렇게 최고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병원이라는 게 백남준에게 맞을 리가 없다. 그래서 의사허가를 받고 통로에 난간을 설치하는 등 집을 일부개조하고 집에 간호사 2명 고용해 12시간 교대로 치료했다. 그는 이런 고생 끝에 1주일 3번 병원을 오가며 물리치료를 받았고 다행스러운 것은 그해 맨해튼에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오자 조수들에게 작업지시를 할 정도로 체력과 언어기능이 많이 회복됐다고 한다. 

-<나의 사랑 백남준(구보타 시게코 저)> 중에서

덧붙이는 글 | "백남준의 예술적 동지이고 비디오아티스트 그의 부인인 시게코 여사, 삼가 고인의 영전에 명복을 빕니다!" 나는 김찬동 경기도박물관 관장의 페이스 북을 보고 백남준의 부인 구보타 시게코 여사가 2015년 7월 23일 뉴욕 한 병원에서 타계한 걸 알게 됐다. 그는 시게코 여사에게 조의를 표하면서 "예전에 뉴욕작업실로 백 선생님을 방문하러 갔었을 때 시게코 여사가 한국정부가 남편을 위해 해준 게 뭐있냐고 호되게 야단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번 6-7월 백남준 리서치를 위해서 뉴욕에 갔을 때 시게코 여사의 지인을 아는 백남준 전 조수인 라파엘레를 통해서 시게코 여사를 만나려고 여러 번 간청했으나 도무지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서 포기한 적이 있다. 결국 그녀는 우리 곁을 떠났다. 이제 백남준 선생이 돌아가신지 거의 10년, 한국정부나 국립미술관 등에서 백남준을 기리기 위해 제대로 한 일이 없으니 구보타 시게코 여사도 그런 점이 아쉬워 눈을 편히 감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태그:#백남준, #시게코, #광주비엔날레, #인포아트, #호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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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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