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 스틸컷 거사를 앞두고 안옥윤 일행이 기념 사진을 찍는 장면.

▲ 영화 <암살> 스틸컷 거사를 앞두고 안옥윤 일행이 기념 사진을 찍는 장면. ⓒ 케이퍼필름


(* 이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장 재미있고 진지한' 역사극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이야기'의 티켓파워는 이미 작년 말 한국영화에서 증명되었다. <명량>과 <국제시장>이 각각 1700만, 1400만 관객을 기록하며 나란히 역대 흥행순위 1, 2위를 차지한 것이다. 지난 달 개봉한 <연평해전>은, 영화적 완성도에 대한 평가와 무관하게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할 역사적 사건'이라는 소재에 대한 인식이 번지면서 600만 관객을 유치해 냈다.

'친일파 암살작전'을 전면에 내세우며 최근 개봉한 영화 <암살> 역시 나흘만에 400만 관객을 훌쩍 넘어섰다. 앞에서 말한 작품들처럼 역사를 다루긴 했지만, 그럼에도 <암살>은 여느 역사 시대극과 그 결이 사뭇 다르다.

우리가 알던 최동훈 감독은 <타짜>, <도둑들> 등을 통해 인정받은, 평단과 관객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이야기꾼이었다. 그런 그가 특유의 케이퍼 무비(Caper movie, 범죄를 모의하고 실행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그리는 영화) 스타일로 일제 치하의 독립운동을 그린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당연히 '국내에서 가장 재미있고 진지한 역사극'이 되어야 했다. 계산대로라면 말이다.

영화 <암살> 스틸컷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분)은 영화 초, 중반 고독한 청부살인업자로 그려진다.

▲ 영화 <암살> 스틸컷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분)은 영화 초, 중반 고독한 청부살인업자로 그려진다. ⓒ 케이퍼필름


역사적 배경, 창조된 캐릭터

<암살>이 차용한 것은 배경으로서의 역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김구, 김원봉 등 실존했던 조직과 인물이 등장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을 이끌어가는 이들은 모두 창조된 캐릭터들이다.

임시정부 경무국 대장 염석진(이정재),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 분), 청부살인업자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분), 신흥무관학교 출신 속사포(조진웅 분). 이야기가 내달리는 데 있어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연료는, 바로 새로운 캐릭터들이 가진 생명력 그 자체다. 그리고 이는 감독의 전작 <도둑들>과 맞닿는 부분이기도 하다.

개별 서사 속의 인물들이 '친일파 암살작전'을 계기로 모이고 서로 관계를 맺기까지의 과정은, 관객으로 하여금 캐릭터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만든다.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로 대변되는 이분법적 선악 구도를 제시하는 대신, 개개인의 짧고 굵은 에피소드들을 통해 그들 각자의 가치를 우리에게 효과적으로 어필하는 것이다. 돈을 모아서 가본 적도 없는 하와이에서 살기를 꿈꾸는 하와이 피스톨, 독립운동도 일단 먹고 살아야 할 수 있다는 속사포의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 친근하다.

신념, 대의 속에 매몰되다

아쉬운 부분은, 인물 각자가 지닌 가치가 목숨을 건 암살, 즉 '독립운동'이라는 공식적 행동으로 변모하는 과정이다. 영화 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독립운동가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안옥윤은, 자신의 어머니가 일본군으로부터 죽임을 당했다고 말한다. 결국 그녀는 부모를 죽인 일본군에 대한 적개심으로 독립군이 된 셈이다.

하지만 암살작전 중 그녀의 친부가 친일파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존재조차 몰랐던 그녀의 쌍둥이 언니와도 마주한다. 실로 엄청난 사건임에도, 영화는 이 지점을 유야무야 지나쳐버린다. 그녀의 친부 강인국(이경영 분)의 악마성은 친일파라는 걸 감안해도 비현실적일 정도고, 그는 단지 '죽어 마땅한 인간'으로 보여지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하다.

안옥윤의 쌍둥이 언니 미츠코는 그녀에게 있어 가치관의 혼란을 촉발시킬 수 있는 인물이지만, 그저 악에 의해 제거당한 그녀의 또 다른 가족이자 일제 치하의 피해자로 간단히 소모되고 만다.

영화 <암살> 스틸컷 염석진(이정재 분)은 영화을 통틀어서 가장 입체적으로 그려지는 인물이다.

▲ 영화 <암살> 스틸컷 염석진(이정재 분)은 영화을 통틀어서 가장 입체적으로 그려지는 인물이다. ⓒ 케이퍼필름


감독이 <암살>을 통해 본인이 추구하는 영화적 재미를 일제 치하 독립운동가의 '대의'와 연결하고 싶었다면, 그건 과욕이다. 친일파와 독립운동은 그저 인물들의 배경에서 이야기를 거들 뿐, <암살>은 오롯이 개인들의 서사다. 카메라 앞에서 조용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포즈를 취하는 장면, 안옥윤의 어색한 미소는 그렇게 '대의를 떠안은 개인'을 표현한다 .

그녀는 그저 '자신에게 있어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울 뿐인데, 독립운동이라며 거창하게 기념사진까지 찍어대니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암살>이 '대의'에서 좀 더 자유로웠다면, 아마 더 나은 영화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각자의 신념을 위해 싸우는 이들이 우연히 모이고, 그들이 얽히고 설키면서 흥미진진한 사건들이 펼쳐지는 식으로 말이다. 그 와중의 친일파 암살은, 그저 100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훔치면서 우연히 얻어걸린 일이라고 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시대극을 통해 영화적 재미와 역사에 대한 반성을 동시에 이뤄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 <암살>은 이것이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보여줬다. 대부분의 경우, 재미는 판타지에서, 교훈은 리얼리티에서 유래하기 마련이다. 그저 그런 작품이 되지 않으려면 노선을 확실히 해 두는 편이 좋고, 대부분의 상업영화가 응당 택해야 하는 것은 재미. 즉 판타지다. 소설이 역사서가 아닌 것처럼, 영화 또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니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네이버 블로그 및 빙글에도 게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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