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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혁명보다 뜨겁고 천국보다 낯선> 표지 .

지난 7월 20일, 미국과 쿠바는 워싱턴과 아바나에 각각 대사관을 재개설함으로써 1961년 국교 단절 이후 54년 만에 양국 관계를 완전히 정상화했다.

 

여전히 북미 적대 관계, 남북 대치 상태에서 상시적인 전쟁 위기를 안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부러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현실 사회주의 붕괴와 금융 세계화 열풍 속에서도 '쿠바 혁명'은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오랜 기간 쿠바를 옥죄어 왔던 경제 제재의 빗장도 풀릴 것이다.

 

이제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로 불어닥칠 변화의 바람이 쿠바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세계의 이목이 지금 쿠바로 쏠려 있다. 본격적으로 자본주의가 유입되기 전, 아직은 때 묻지 않은 쿠바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행문이 출간돼 관심을 끈다.

 

영화 <펜트하우스 코끼리>를 연출한 정승구 감독의 <쿠바, 혁명보다 뜨겁고 천국보다 낯선>이다. 취재를 하려면 별도의 취재 비자를 발급받고 공무원의 감독 하에 취재를 해야 하지만, 정 감독은 쿠바에서 아는 인맥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혁명의 쿠바,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

 

정 감독의 눈에 비친 쿠바는 확실히 '인민의 낙원'이라거나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와 같은 판에 박힌 느낌이 아니었다. 각종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한 만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쿠바는 그 풍광만큼이나 신비한 매력을 풍기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여행에서 만난 쿠바인들은 아직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았다. 인심이 넉넉하고 친절하며 사람관계에서 손익계산을 따지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엮인 촘촘한 공동체는 쿠바 사회를 받쳐주는 든든한 기반이다. 쿠바인들은 긍정적이고 오랜 관습과 문화를 통해 일상에서 행복을 포착해내는 능력이 몸에 배어 있다.

 

이게 쿠바다.

곳곳에 숨은 보석들이 반짝이는 나라. 시간이 멈춰버린 어른들의 동화. 전설의 보물섬. 누더기를 입은 왕자 또는 공주. 또는 마녀, 또는 창녀, 그리고 성녀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 유령의 섬. 수많은 겹과 결로 이뤄진 오해의 미로. 열정적이고 유혹적이고 모순되고 현실적이면서도 고전적인 나라. 이 세상 그 어떤 예술가도 흉내 낼 수 없는 명작 그 자체였다. (32쪽)

 

정 감독이 여행 기간에 묵었던 숙소 주인 마그다는 아들 페페와 함께 미국 마이애미로의 이민을 준비하고 있다. 합법적으로 안전하게 쿠바를 떠나는 것은 젊은층뿐만 아니라 변화를 바라는 쿠바인들의 꿈이기도 하다. 그들은 사회주의 몰락과 경제 봉쇄로 인한 파멸적 위기, 이른바 '특별시기'라고 불리는 '고난의 행군'을 겪었다. 한편으로는 체 게바라로 상징되는 쿠바 혁명의 신화를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쿠바'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안고 있다.

 

"별을 봐야 돼, 별을. 우리가 아무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을지라도 하늘의 별을 봐야 된다고. 이게 쿠바의 현실이야. 관광책자나 영화에 나오는 쿠바가 아닌 진짜 쿠바. 그래도.... 우린 별을 보도록 노력해야 해." 건물 밖으로 나를 끌고 나와 진정시키려고 애쓰는 하비에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443쪽)

 

여전히 쿠바의 모든 교실에는 체 게바라의 사진이 걸려 있다. 학생들은 아침 조회 시간마다 "공산주의자의 선구자들이여, 우리는 체처럼 될 것이다"라고 외치며 하루를 시작한다. 쿠바 혁명을 넘어 사회주의로 단결된 라틴아메리카를 꿈꿨던 체 게바라는 쿠바 공동체를 지탱하는 신화이자, 여전히 살아있는 따끈따끈한 이야기다. 마그다의 집 옆 건물에 사는 초등학교 2학년 훌리아는 "언젠가 어른이 되면 체 게바라의 기념비에 꼭 가보고 싶다"면서 "체의 사상은 우리의 마음과 머리에 살아 있으니까요. 우리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거죠"(224쪽)라며 활짝 웃는다.

 

혁명을 넘어 또 다른 진화로 나아갈 수 있을까

 

정 감독은 이 책에서 "쿠바는 20세기 역사가 만들어낸, 그 어떤 예술가도 감히 모방할 수 없는 아주 기이하고 독창적인 작품이 틀림없다"며 "어쩌면 이제 그 명작은 또 다른 진화 단계에서 변하고 있는 것일 뿐"(474쪽)이라고 썼다.

 

미국의 법무장관이었던 램지 클라크는 "피델 카스트로의 정부는 전 세계에 보여줬다. 고통, 무지, 빈곤과 부패로 얼룩진 바티스타 정권으로부터 벗어난 지 불과 몇 년 만에 모든 이들이 먹고 교육받고 치료받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는 것을. 그리고 그런 사회 시스템을 자국에 국한하지 않고 지구상의 다른 곳에도 수출해서 그들 역시 읽고, 알고, 성장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335쪽)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경제 규모가 3분의 2로 줄어들면서 '특별시기'를 겪어야 했던 쿠바인들의 처지는 비참했다. 이 시기 혁명 정부는 오히려 이웃공동체의 사회적 기능을 더욱 강화하고 복지정책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위기에 대처했다. '특별시기' 동안 단 하나의 병원도 문을 닫지 않았고, 단 한 명의 교사도 일자리를 잃지 않았다. 실제로 1990년대 쿠바 국내 총생산 가운데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들어간 비용은 34% 증가했다.

 

"그 시절에는 모든 것이 다 지저분했지만 아이들 교복만은 깨끗했다네. 누구나 아이들에게는 품위와 자부심을 물려주고 싶어했으니까. 자기 자신만의 암울한 인생을 걱정하고, 자기연민에 빠진 이기적인 사람들은 비관적이고 부정적이야. 그런 사람들은 주변이나 타인을 생각하지 않는, 영혼이 삐뚤어진 이들이지. 과연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우리 스스로 깨달았던 것 같아.

 

미국이 우리에게 제재를 가하고 소련이 망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서로 격려하고 의지하며 즐거움과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은, 그러니까 어떻게 상황에 반응하느냐는 전적으로 우리 몫이지. 고통과 고난에 휘둘리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우리의 선택이야말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진정한 자유란 말이지. 그런 자유야말로 우리가 혁명을 지키고 또 우리 자신을 지킬 유일한 방법이었다네." (415쪽)

 

클라라 할머니의 말을 통해 비로소 '특별시기'를 이겨낸 진짜 비결을 알 수 있다. 쿠바 혁명은 외세가 심은 이념이 아닌,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일궈낸 사회이자 문화이자 그들의 정체성이었다. 오히려 특별시기 덕분에 정부에서 무상으로 받는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아무 생각 없이 살던 사람들에게 '창의력'을 주었다는 쿠바인들. 그들이 특별시기를 이겨낸 저력은 '희망은 바깥에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 즉 쿠바 인민들의 진정한 '자유'일 것이다.

 

자본주의의 때가 묻기 전 풋풋한 쿠바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 정 감독은 "미국의 경제제재가 없어지는 해피엔딩은 오랜 기간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온 쿠바인들의 명분 있는 승리이자 역사적 정의라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나는 진심으로 쿠바를 축하해주고 싶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돌아오지 않을 2014년처럼 내 마음속의 쿠바도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섭섭하다"고(471쪽) 토로했다.

 

정 감독의 말처럼 거대한 변화에 직면한 쿠바인들이 호모사피엔스들에게 멸종된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들'처럼 될까. 혁명의 철학적 토대를 공격하고 도덕적 열망 대신 물질적 욕망이 발흥하는 소비주의의 물결 앞에서 그들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사회주의로 단결된 라틴아메리카를 꿈꿨던 체 게바라의 상상력은 자본주의의 거센 도전을 물리치고 21세기 버전으로 새롭게 꽃필 수 있을까. 지구 반대편 쿠바의 미래가 궁금하다.

덧붙이는 글 | <쿠바, 혁명보다 뜨겁고 천국보다 낯선>(정승구 지음 / 아카넷 펴냄 / 2015.06.) 

이 기사는 이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yes24.com/xfile340)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쿠바, 혁명보다 뜨겁고 천국보다 낯선

정승구 지음, 아카넷(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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