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 포스터

영화 <암살> 포스터 ⓒ 케이퍼필름

* 이 글에는 영화 주요 줄거리가 포함돼 있습니다.

세상에는 세 부류의 인간 유형이 있다. 저항하는 자와 방관하는 자 그리고 순응하는 자. 만약 내가 일제의 식민지 치하에서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해본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양심이 지향하는 대로 태극기를 흔들었을까? 아니면 불운한 시대를 원망하며 울분만 삭이고 있었을까? 그도 아니면 체제에 순응한 채 살았을까?

최근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암살>이 개봉 5일 만에 관객수 300만 명을 돌파하는 등 화제다. 2004년 <범죄의 재구성>으로 데뷔한 최동훈 감독은 2012년 <도둑들>로 천만 관객 감독 대열에 이름을 올렸고, 이번 영화로 2000만 감독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리고 있다.

출연진 또한 화려하다. 암살단의 대장으로 영화 <고지전>의 이초에 필적하는 저격수 안옥윤을 연기한 전지현을 비롯해서 이정재, 하정우, 오달수, 조진웅, 이경영, 김해숙, 최덕문, 조승우 등이 등장한다. 캐스팅만으로도 <암살>에 대한 기대는 충만하다.

<암살>은 1933년 경성과 상해를 배경으로 친일파 암살작전을 둘러싼 독립군들과 임시정부대원 그리고 청부살인업자의 쫓고 쫓기는 이야기를 박진감 있게 그리고 있다. 영화는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는 감독의 지론대로 비장감이 느껴지면서도 재미나고 경쾌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 재미 뒤에 남는 울림과 반향은 크다. 일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며 살 것인지, 다소 험하더라도 옳은 신념을 지향하며 살 것인지, 시대는 달라졌으나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영화관을 나서면서부터 계속 뇌리에 남기 때문이다.

"총알에도 눈이 있다"

 영화 <암살> 중 한 장면.

영화 <암살> 중 한 장면. ⓒ 케이퍼필름


영화는 실존인물들과 허구의 인물들을 촘촘히 엮음으로 극의 사실감을 높이고 있다.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이 더욱 거세지자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일본 정부요인과 친일파 암살을 위해 세상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세 사람의 암살단을 조직한다.

조선독립군 제3지대 소속 저격수 안옥윤(전지현 분)과 톰슨 기관총을 잘 쏘는 신흥무관학교 출신 속사포(조진웅 분) 그리고 폭파 전문가인 황덕삼(최덕문 분)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데 누군가를 죽이려고 모인 사람들이 맞나? 암살자들이라고 하기엔 그 면면이 무척이나 순박해 보인다.

암살계획을 지시하는 의열단 단장 김원봉(조승우 분)에게 황덕삼이 조심스레 묻는다. 민간인을 죽여도 되느냐고. 안 된다고 하자, 그럼 일본인은 죽여도 되느냐고 다시 묻는다. 그러자 김원봉은 단호하게 "절대 안 된다, 총알에도 눈이 있다 생각하자"라는 말로 암살의 목적과 명분을 명확하게 밝힌다.

간도참변을 비롯해서 무수한 조선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그러나 우리가 당했다고 해서 저들도 똑같이 당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전시라도 민간인은 보호돼야 하고, 나라를 빼앗은 일본인이기 전에 그들 역시 보호돼야 하는, 총을 들지 않은 평범한 사람일 뿐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해방 이후 우리 군인들과 경찰들에 의해 자행된 수많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은 우리 민족의 큰 아픔이자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다. 또한 베트남 전쟁 당시 우리 군에 의해 학살당한 많은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에게 늦었지만 이제라도 사과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계속 싸우고 있다

 영화 <암살> 중 한 장면.

영화 <암살> 중 한 장면. ⓒ 케이퍼필름


암살단이 경성으로 떠나자 이번에는 그 암살단을 암살하기 위해 청부살인업자가 고용된다. 바로 암살단을 상해로 데려오는 임무를 맡았던 임시정부 경무대장 염석진(이정재 분)에 의해서다. 첫 장면에서 보여줬던 독립투사의 모습은 사라지고 어느 순간 철저한 일제의 앞잡이로 변절한 것이다.

그런 염석진이 고용한 이들이 하와이피스톨(하정우 분)과 영감(오달수 분)이다. 한때는 친일행위를 하는 아버지들을 처단하기 위해 살부계(殺父契)를 조직할 만큼 의기(義氣)를 가졌던 그였지만, 이제는 그저 돈을 받고 대신 누군가를 죽여주는 청부살인업자에 지나지 않는 하와이피스톨.

암살의 대상이 친아버지임을 알게 된 안옥윤에게 하와이피스톨은 매국노 몇 명 죽인다고 독립이 되느냐고 냉소적으로 말한다. 스스로 꺾어버린 의기(義氣)에 대한 자기합리화이자 변명이다. 그러나 안옥윤은 "그래도 우리가 싸우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알려줘야죠"라고 힘주어 대답한다.

한때는 독립투사였지만 이제는 일제의 밀정이 돼 같은 동포에게 총을 겨누는 꺼삐딴 리 염석진과 세상에 대한 의기(義氣)를 꺾고 방관자가 돼 떠도는 하와이피스톨. 어쩌면 이들 모두 시대가 만들어낸 비극의 희생자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용서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세상은 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을 변하도록 만드는 '변하지 않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낙수가 바위를 뚫을 만큼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안옥윤의 말처럼 우리가 싸우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고 그 때문에 세상이 조금은 더 살만한 곳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수행해야 할 것은...

 영화 <암살>의 한 장면.

영화 <암살>의 한 장면. ⓒ 케이퍼필름


일본이 패망하고 대한민국이 들어선 1949년의 해방된 조국, 그러나 실상은 암담하기 그지없다. 경찰 고위간부로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재판정에 불려나온 염석진은 자신은 평생을 독립운동 말고는 한 것이 없다며 궤변을 토해놓고, 결국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고 유유히 재판정을 빠져나간다.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바쳐 되찾은 나라이지만 변한 것이 없다. 일제에서 대한민국으로 간판만 바꿔 달았을 뿐 실상은 그대로다. 일제치하에서 경찰·관료이었던 자들은 옷만 바꿔입고 그대로 대한민국의 경찰·관료가 돼 민중 위에 군림했다. 아마도 우리 역사에서 가장 뼈아픈 점을 꼽으라면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이 패퇴한 후, 프랑스 대통령 샤르 드 골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나치 부역자들을 청산하는 일이었다. 드 골은 "나치 협력자의 엄청난 범죄와 악행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 전체에 전염하는 흉악한 종양을 그대로 두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며 가혹하리만치 철저한 청산작업을 단행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했는가.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친일 세력과 이승만 대통령의 비협조와 방해로 애써 구성된 반민특위는 아무런 성과 없이 해체되고, 친일파 청산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리고 저들은 그 어떤 반성조차 없이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해오고 있다.

결국 드 골의 말처럼 사회 정의는 무너지고 사람들의 가치관은 혼란에 빠졌으며, 이기주의와 부정부패가 횡행하게 하는 무서운 종양의 근원이 돼 버리지 않았던가. 참여정부 때 잠깐 빛을 본 '과거사 청산' 작업은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함께 또다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역사는 결코 지나간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16년 전 임무,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 지금 수행합니다."

영화에서 잊히지 않는 안옥윤의 마지막 대사가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으며 부정부패를 저지른 대기업 총수들을 특별사면한다고 떠들 게 아니라,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가 수행해야 할 임무는 친일부역자들의 과거사 청산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암살 최동훈 전지현 이정재 하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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