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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음모론자가 아니다. 평생 합리주의 교육을 받은 뒤, 대학에서 사회과학을 가르치는 사람이 음모론자가 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한국사회를 면밀히 관찰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새 음모론에 젖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음모론이 '공적 정보에 대한 불신'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음모론자 양산하는 사회'는 분명 큰 문제점을 안고 있다. 게다가 그 음모론을 부추기는 주체가 정부라면 상황은 더 암울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외국에 지내면서 뉴스로 한국사회를 접하는 내가 이러니, 한국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은 오죽하겠는가. 무슨 음모론을 말하는 것인지 궁금하다면, 포털에서 '국정원 마티즈'를 검색해 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어떤 기사든 좋으니 아래 달린 댓글들을 읽어보라. 가장 흔한 반응이 '국민을 바보로 아나'이다. (가장 짧고 인상 깊은 표현은 "풉…"이었다)

결로부터 말하면, '그렇다'이다. 한국 정부는 국민을 바보로 여겨 왔고, 특별한 변동사항이 없는 한, 쭉 바보 취급할 것이다. 정부가 몰상식한 짓을 해도 '북한'과 '경제'라는 마법의 주문만 외면 모든 걸 잊고 선거에서 표를 주는 데, 이런 국민을 '봉' 취급하지 않을 정부는 없을 것이다. 이 마법이 특별히 놀라운 까닭은, 현 정부가 두 가지 문제 가운데 어느 것 하나 해결해 본 적도 없고, 해결할 능력도 없다는 점이다.

국과수의 어이없는 '검증' 결과

'차량 바꿔치기' 의혹이 일었던 국정원 직원의 빨간색 마티즈 차량이 폐차됐다. 경기지방경찰청은 이런 의혹에 대해 "전혀 근거가 없다"고 일축했다. 사진은 경기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가 지난 22일 같은 장소에서 재연 실험을 벌인 영상 중 한 장면이다.
 '차량 바꿔치기' 의혹이 일었던 국정원 직원의 빨간색 마티즈 차량이 폐차됐다. 경기지방경찰청은 이런 의혹에 대해 "전혀 근거가 없다"고 일축했다. 사진은 경기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가 지난 22일 같은 장소에서 재연 실험을 벌인 영상 중 한 장면이다.
ⓒ 경기지방경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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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은 '바꿔치기' 논란이 일었던 폐쇄회로 카메라 속의 마티즈 차량 번호판이 '녹색'으로 판독되었다고 발표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문제가 된 "차량 번호판과 색상을 판독한 결과," 그것이 "녹색 전국 번호판(2004년 1월~2006년 10월)으로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국과수는 경찰의 의뢰를 받은 영상에 대해 "확대보간 및 선명화 처리"를 해서 이런 결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문제가 된 저해상도 화면을 디지털 처리해 보니, 글자를 인식할 수 있었고, 색상도 녹색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영상 매체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해명이었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저화질 영상이어서 차량 번호는 확인하지 못했다"는 게 국과수의 주장이었다. 이들은 보도자료를 내면서, 관련 영상도 전혀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조악한 설명을 달았다.

"차량 번호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의 낮은 해상도에서는 밝은색 부분이 더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녹색 번호판이 흰색 번호판으로 색상 왜곡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폐쇄회로 카메라에 찍힌 차량 번호판이 논란이 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영상 속 번호판이 흰색으로 보였을 뿐 아니라, 글자가 검은색이었기 때문이다. 국과수 주장대로 "낮은 해상도에서는 밝은색 부분이 더 두드러진다"면, 흰 글자가 검게 보일 수는 없다.

만일 녹색 번호판이 반사되어 흰색으로 보일 정도라면, 흰색 글씨는 흰색 바탕에 묻혀 아예 보이지 않아야 한다. 흰색의 반사율(albedo)은 녹색의 3배 이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색상 왜곡' 운운하는 이야기로 덮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길게 말할 것 없다. 국과수는 '확대·선명 처리'했다는 이미지를 공개하라.

국과수의 억지, 경찰의 '증거 인멸'

국과수의 설명은 기술적으로만 납득하기 어려운 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모순이었다. 국과수는 영상 속 마티즈가 현장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차량이라고 주장했다. 선바이저, 몰딩, 사이드미러 등 부착물이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임씨 차량과 폐쇄회로 카메라(CCTV) 영상 속 차량이 서로 다른 차량이라고 볼만한 특징은 관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르다는 증거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내가 천재가 아니라는 증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 "나는 천재"라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과 같다. 더욱이 실제 차량은 이미 폐차되어 실물을 확인할 수도 없게 되었다.

경찰은 사건 당일인 18일 증거 차량을 가족들에게 인계했고, 이 차는 22일에 폐차되었다. 공교롭게도, 22일은 전병헌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이 현장 사진과 CCTV 영상 속의 차 번호판 색깔이 다르다는 의혹을 제기한 날이었다.

경찰은 문제의 마티즈 차량의 폐차 경위에 대한 의문에 대해 "차량 내에서 자살 사건이 발생한 경우, 차량을 감식하고 내부에 남아있는 유서나 유품 등 관련 증거를 모두 수거하면, 차량을 유족에게 즉시 반환하는 것이 통상적인 수사 절차"라고 설명했다. 이어 경찰은 "이번 변사사건의 경우에도 해당 차량이 범죄에 이용된 차량이 아니다"라고 했다.

논란이 일자, 경찰은 "범죄에 이용된 차량"이 아닌 한, 증거를 수거하고 차량을 유족에게 즉시 반환하는 것이 통상적인 수사절차"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차는 대국민 해킹과 관련 증거 삭제라는, 명백한 범죄에 연루되었던 차다. 더욱이 해킹 사실이 보도되기 직전 차량을 구입한 점과, 뚜렷한 자살 동기도 드러나지 않은 점, 국정원의 '실종신고 지시' 등 밝혀야 할 게 한둘이 아니다.

이런 사실을 밝히는 데 핵심적인 증거가 될 자동차를, 사건 바로 당일 유족에게 돌려줘 폐차하게 한 것을 온당하다고 믿으란 말인가? 이러니, 댓글들 가운데 경찰이 '증거인멸을 도왔다'거나, '정말 자살하기는 한 거냐'는 반응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해킹 혐의가 드러난 후, 국정원과 경찰의 행동이 보인 행동은 어느 것 하나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기행'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기억상실증'의 국정원, 유서조작의 국과수

지난 19일 오전 경기 용인동부경찰서에서 국가정보원 해킹 프로그램 구입과 관련된 유서를 남기고 숨진 국정원 직원 임모(45)씨의 유서가 공개되고 있다. 임씨는 유서에서 "지나친 업무에 대한 욕심이 오늘의 사태를 일으킨 듯하다"며 "정말 내국인에 대한, 선거에 대한 사찰은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지난 19일 오전 경기 용인동부경찰서에서 국가정보원 해킹 프로그램 구입과 관련된 유서를 남기고 숨진 국정원 직원 임모(45)씨의 유서가 공개되고 있다. 임씨는 유서에서 "지나친 업무에 대한 욕심이 오늘의 사태를 일으킨 듯하다"며 "정말 내국인에 대한, 선거에 대한 사찰은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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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정부는 '괴담'에 강박에 가까운 태도를 보인다. 정부 주장을 믿지 않는 사람을 불온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법으로 신념을 강제하려 하고 있다. 정부가 크게 착각하는 점은, 음모론 때문에 정부를 불신하게 되는 게 아니라, 정부를 불신하기 때문에 음모론이 생긴다는 점이다.

국민이 국정원, 국과수, 검·경찰을 믿지 못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들 모두 국민의 신뢰를 저버린 채 폭력적 권력에 봉사한 수치스러운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으로 시끄러웠던 지난해 4월, 이 일을 주도했던 '박아무개 과장'이 번개탄으로 자살을 기도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는 병원에서 빠르게 회복했으나, '기억상실증'에 걸려, 유우성씨 사건과 관련해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 직원은 지금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국과수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5월 재심을 통해 무죄가 확정된 '유서 대필사건'을 보라. 1991년, 검찰은 강기훈을 분신자살한 친구의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기소했다. 그는 3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고, 현재 간암 투병 중이다. 이 무리한 기소과정에서 국과수의 왜곡된 필적감정이 큰 역할을 했다.

한국 검찰의 유명한 '악다구니'는 이때도 빛을 발했다. 지난해 초 서울고등법원이 과거 검찰이 제시한 필적 감정이 신빙성이 없다며, 무혐의·무죄 판결을 내리자, 검찰은 반성하고 사죄하기는커녕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함으로써 강기훈에게 다시 한 번 고통을 안겼다.

이런 검찰이 국정원의 범죄를 제대로 수사하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게 한국의 암울한 현실이다.

검은 것을 희다고 하는 정부

이런 속담이 있다.

"검은 것을 희다고 하고 흰 것을 검다고 한다."

엄연한 사실을 무시한 채 사람들을 속인다는 뜻이다. 이 나라는 검은 것을 희다고 하면 그대로 믿고 살아야 하는 곳이 되었다.

국정원은 자살했다는 임아무개 과장이 삭제했다는 파일 50여 개를 복구했으며, 거기에 내국인 이름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검은 것이 희다'는 나라에서는 범죄 혐의자가 수사도 하고 판결도 하는 모양이다.

마티즈나 삭제 파일은 문제의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것은, 국가기관의 해킹 프로그램 구매 자체가 실정법 위반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객관적인 수사를 통해 밝힐 내용이다.

국정원은 더는 '유체이탈 수사쇼' 그만하고, 로그 파일을 국회에 제출하라. 국민을 대변하는 소수에게도 공개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면, 그일은 결코 '국민'을 위한 일일 수 없다.
나도 이제 '바보 국민 짓'을 그만두려고 한다. 정부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더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상식이 통하는 사회'는 기대하지도 않는다. 언제부턴가 이 나라는 맨정신을 유지하면서 살기도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이해되지 않는 정부 주장에 끊임없이 묻고 해명을 요구하려고 한다. 그리고 더는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한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하루라도 제정신으로 살 생각이다.

국과수는 속히 관련 영상을 공개하라.

○ 편집ㅣ곽우신 기자



태그:#국정원, #해킹, #마티즈, #국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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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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