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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아들은 제1회 박종철 인권장학금을 받았다. 1987년 당시 좁은 원형 계단을 그대로 이용해 대공분실 509호를 방문한 아들은 상당히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당시 KBS와의 인터뷰에서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박종철 열사가 무척 춥고 외로웠을 것 같습니다."

인권장학금 수혜자인 아들이 박종철 열사 추모식에 참석해 영정 앞에서 인사를 하고 있다.
▲ 추모식에 참석한 아들 인권장학금 수혜자인 아들이 박종철 열사 추모식에 참석해 영정 앞에서 인사를 하고 있다.
ⓒ KBS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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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월 13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이던 박종철은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이유로 강제 연행되어, 다음날인 14일 물고문으로 사망했다.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은폐 조작과 달리 박종철은 무려 10시간 이상 구타와 전기고문, 물고문을 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평범한 공무원으로 36년간 부산 수도국 공무원으로 근무한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의 꿈은 목욕탕 주인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1987년 1월 14일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투사로 변한 것이다. 아들이 닮고 싶어 했던 청년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그들과 함께 민주인권을 위해 투쟁의 맨 앞에 섰다.

나는 수년간 박정기, 배은심 두 분을 집회장서 자주 뵐 수 있었다. 2011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차렸을 때다. 장맛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박정기, 배은심 두 분이 나란히 대한문 천막 앞에 나타났다. 옷이 다 젖었다며 앉지도 않고 서서 이야기를 나누다 발걸음을 돌리던 두 분을 보며 코끝이 시큰했었다.

기륭전자 삼보일배 현장에서 박정기님을 뵈었을 때는 너무 죄송하고 속이 상해 손을 잡고 엉엉 울기도 했다. 투쟁장과 집회장 어느 곳이나 배은심 여사와 나란히 달려왔던 그의 모습을 요즘은 볼 수 없다. 나이 여든여덟인 그의 거동이 예전 같지 않은 탓이다.

▲ 유월의 아버지 박종철이 남긴 질문 박정기가 답한 인생
ⓒ 후마니타스
최근 송기역 작가가 박정기님의 구술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유월의 아버지>를 펴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박정기님을 뵈었던 터라 <유월의 아버지>에 대한 감회가 남다르다.

첫 장을 펼쳐 읽는 순간부터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유가족 모두가 앓고 있는 울화병과 불면증을 밝힌 대목에서다. 불면의 괴로움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절절히 느낄 것이다.

언젠가 나는 이소선(전태일의 어머니)과 배은심(이한열의 어머니)이 수면제를 반으로 쪼개서 나눠 먹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한 알을 다 먹으면 너무 독해서란다. 세상에 수면제를 나눠 먹는 우정이 어디 있을까?

나도 아들이 떠난 뒤 약방에서 수면제를 사 먹었다. 그런데 더 잠이 오지 않았다. 그 뒤로 수면제 대신 술을 마셨다. 종철이 엄마는 아직도 수면제를 먹고 있다. 애비의 마음으로 어찌 애미의 심정을 알 수 있겠는가? 다만 종철이 엄마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을 듣고 헤아릴 뿐이다. "죽지 못해 사는 거지."

내 나이 이제 여든여덟이다. 부산시 수도국에서 36년을 일하고 정년 퇴임을 앞둔 1987년 나는 아들을 잃었다. 그땐 예순 살이었다. 이제 와 삶을 돌이켜 보니 회한이 없을 수 없다.
.-유월의 아버지 서문 중

우리 시대가 만든 범죄가 어떻게 이 땅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을 투사로 만들었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울림과 여운은 크다.

급기야 그의 죽음 뒤에야
나는 막내의 뜻을 한꺼번에 움켜쥐고 말았다. <박정기의 일기장 1997년 1월 14일>
-유월의 아버지 중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받던 욕조에 놓인 국화
▲ 박종철 열사 21주기 추모식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받던 욕조에 놓인 국화
ⓒ KBS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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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전태일의 분신 항거 후 이소선 어머니가 40년 이상을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았듯이 막내 종철을 고문으로 잃은 박정기님의 삶도 이전의 삶과는 달랐다. 유교적 사고가 지배하는 한 가문의 종손으로 태어나 가부장적 질서나 국가 제도에 순응하며 살던 그다.

"너는 종손이다. 너는 집안의 대들보다."
장남인 박영복도 종손이었고 형제가 없는 박정기도 종손이었다. 대를 이은 '종손 의식'은 박정기에게 평생 가정에 대한 책임감으로 짐 지워진 삶을 부여했다. 박정기는 아버지에게 대들어 본 일이 없을 만큼 순종적인 아들이었다. 그는 유교적 가부장제의 질서에 순응하며 자랐다. -유월의 아버지 중

박정기, 배은심 두 분은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에서 활동한다. 유가협은 이소선 어머니가 씨앗이 되어 1986년 8월 12일 창립한 단체다. 유가협 회원들은 농성현장과 장례식장을 찾아다니며 유가족과 연대해왔다. 박정기님은 유가협에 참여하게 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다가도 그 길이 운명이라 여기며 후회를 떨쳐내곤 했다.

"이부자리에 누우면 철이가 고문을 버티고 버티다 최후에 가슴속에 간직한 게 무엇일까 생각했지. '아들을 생각하며 한 치 부끄러움 없이 싸워나가자' 다짐하며 잠들곤 했어."
-유월의 아버지 중 

박종철은 방학이 되어 집에 내려가면 노동자도 모두 간고등어를 함께 먹는 세상을 꿈꾼다고 누나에게 말하곤 했다. 운동권이던 맏아들 종부나 종철과 달리 평범한 대학생이던 딸과 아버지는 종철의 죽음으로 세상의 부조리와 국가의 범죄에 대항하는 이들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는 고문과 구타 등으로 의문사한 사람들에 대해 특별히 신경을 썼다. 과거 경찰은 의문사한 사람들의 가족을 매수 혹은 회유해서 화장하는 방법을 택했다. 고문이나 범죄의 증거를 없애는 방법이다.

박정기님도 아들 종철의 묘지를 만들지 않고 화장해 임진강에 뿌렸다. 이후 그는 찾아갈 무덤조차 없는 것에 통한을 느껴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 박래전 열사 근처에 가묘를 마련한다. 그가 특별히 의문사를 당한 이들의 사체를 경찰의 회유와 협박으로부터 지켜내 사회장 등의 기억할 만한 장례로 치러, 억울한 죽음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애쓰는 이유다.

나는 1987년부터 유가협에서 활동했다. 유가협 회원들은 분신해서 죽고. 투신해서 죽고, 음독으로 죽고, 고문으로 죽고, 의문사로 죽은 자식들을 끌어안고 사는 분들이다. 이들은 꿈에서라도 자식이 나타나기를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나도 꿈속에서 철이를 만날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유월의 아버지 중

유가협 회원들은 자식을 잃은 지 20~30년이 지났어도 불면증을 안고 산다고 한다. 인간이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이 가족과의 사별이라고 한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 중 아홉 명은 미수습자로 남아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가족의 뼛조각 하나조차 찾을 수 없다면 남은 가족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 것인가. 이 책의 부제는 '박종철이 남긴 질문 박정기가 답한 인생'이다. 여기서 '박종철이 남긴 질문'은 아버지 박정기만이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남긴 질문일 것이다. 세월호의 진상규명과 바른 해결이야말로 살아남은 우리가 박종철이 남긴 질문에 바른 해답을 내놓는 길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유월의 아버지 - 박종철이 남긴 질문, 박정기가 답한 인생> (우리시대의 논리 21)
송기역 지음 | 후마니타스 |1만 3500원



유월의 아버지 - 박종철이 남긴 질문, 박정기가 답한 인생

송기역 지음, 후마니타스(2015)


태그:#박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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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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