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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29일 마천동산5번지에서 만난 집, 집의 형태로 보아 초창기 이곳에 철거민들이 자리잡아갈때 지어 개보수를 하며 사는 집인듯하다. 이곳도 재개발의 홍수를 비껴가지 못했지만, 여전히 골목 사이사이 과거의 흔적들을 간직한 집들이 남아있다.
▲ 마천동산5번지 2015년 7월 29일 마천동산5번지에서 만난 집, 집의 형태로 보아 초창기 이곳에 철거민들이 자리잡아갈때 지어 개보수를 하며 사는 집인듯하다. 이곳도 재개발의 홍수를 비껴가지 못했지만, 여전히 골목 사이사이 과거의 흔적들을 간직한 집들이 남아있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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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마천중앙시장 앞에는 수도교통 버스종점이 있었다. 거마지구(거여동마천동)에 살던 이들에게 수도교통은 시내로 나가기 위한 단 하나의 수단이었으며, 성남대단지사건이후 대거 거마지구로 몰려온 철거민들로 인해 버스는 이미 종점에서 만차가되어 출발을 했다. 최소한 길동 정도는 가야 내리는 손님이 있었으므로 세 정거장이나 되는 오금동에서 버스를 기다렸다가는 버스 안내양의 도움에도 번번히 버스를 탈 수 없었다.

6시만 넘으면 버스종점에는  승객의 줄이 길게 늘어섰으며, 나는 40분 정도를 걸어 버스종점까지 가야만 했다. 발디딜 틈조차 없는 버스는 그래도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면 조금은 한가한 편이었다.

근처에 중학교가 없어 천호동 쪽으로 배정되었고, 초등학교 시절 오전오후반으로 나눠 수업을 할 정도로 많던 아이들은 그렇게 버스에서 얼굴을 익혔다. 그렇게 친구가 되었고, 거마지구에 사는 친구들은 너나할 것 없이 살림살이가 그만그만했다.

참 거칠었던 그 시절의 추억

그만그만한 살림살이의 의미는 그저 세 끼를 먹되 쌀밥이 아닌 밀가루라도 챙겨 먹는 정도의 살림살이를 뜻한다. 넉넉하지 못했고, 그래서 일찌감치 학교를 그만두고 취업전선으로 뛰어든 친구들도 많았다. 중학교도 진학하지 못한 친구들도 많았고, 대부분이 취업을 목표로하는 실업계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특권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실업계고등학교에 들어갈 실력도 안 되어 인문계고등학교를 택한 친구들도 있었다. 그것도 안 되면 전수학교나 야간을 다녔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끼리 몰려다니게 되는 일이 잦아지고 간혹은 패싸움도 벌어지곤 했다. 1970년대 중반의 일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마천동산 5번지에 사는 친구들 몇몇을 사귀었고, 그 중 한 명은 지금도 절친한 친구로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그때만 해도 개천에서 용나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하던 어느날 '공부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달았고 타이밍약을 사먹어가면서 코피를 흘리고 엉덩이에 땀띠 나는 것을 은근히 자부심으로 삼아가며 공부를 했다.

그러나 나는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이 아니었고, 그 중 한 친구는 기말고사 성적을 보고는 절교를 선언했다. 그게 충격요법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후 그 친구는 지금껏 만나질 못했으며, 무엇을 하고 살아가는지도 알지 못한다.

다른 친구 하나는 문학가를 꿈꾸며 경희대 국문학과에 입학을 했다. 대부분의 친구가 그랬듯이 방학만 되면 노가다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노가다판에서 만나 막걸리를 나눠마시며 서로의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도 하고 격려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80년대 학생운동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고, 대학시절 내내 그 친구를 만날 수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수소문해서 그 친구 소식을 접했는데 이미 그 친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20대에 삶을 마감한 친구, 방학을 맞아 노가다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했다.

지금도 만나는 친구, 몇 안 되는 불알친구인 그는 형제들이 많았고 막내여서 온갖 잡기에 능한 친구였다. 낚시, 오토바이, 당구 모두 고등학교 때 배웠는데 그 친구 덕분이었다. 마천동산 5번지에 있는 그 친구의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었고, 산5번지 뒷산인 천마산을 단숨에 뛰어올라가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 지금의 거여동재개발지구에서 사소한 일로 패싸움이 벌어졌고, 나는 마천동산5번지 친구집으로 피신(?)을 했다. 집으로 가는 길, 그친구는 골목길 한 켠에서 소주병을 깨어 하나는 내 품에 하나는 자기 품에 넣었다.

"여차하면 찌르고 튀는 거야!"

왜 그리도 거칠었을까? 아무튼 그 일을 계기로 그 친구와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는 법, 친구 생일잔치를 한다고 모여서 무용담을 이야기하며 친구들과 함께 혼내줘야 할 놈이 있다며 비분강개하고 있을 때, 그 당사자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 게가 애고, 니가 말했던 게가 너야?" 친구의 친구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냥 또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이미 30년이 훌쩍 넘은 이야기다.

그리고 다들 그곳을 떠나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목표였던 것처럼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나도 더는 그곳에 갈 일이 없었다. 재개발이 되었고, 몇 년 전에 그곳을 찾았지만 이전 모습은 간데없어 다시는 찾지 않을 곳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7월 29일) 푹푹 찌는 폭염 속에 나는 그곳을 걷게 되었다.

천마산은 공원화되어 이전의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지만, 재개발된 마천동산 5번지의 이전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연립주택지로 재개발이 된 탓인지 또다시 재개발지구로 지정이 되어야할 만큼 주택들은 낡았고, 그 연립주택들 사이로 이전 건물들이 하나 둘 남아있었다. 기억엔 없지만 사진으로 담은 그 집은 70년대 그 모습일 터이다.

나는 무엇을 찾으러 그곳에 간 것일까? 고등학교 시절 연신 드나들던 그 골목길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런 단서도 남아있질 않았고, 그곳 골목길을 지키고 있는 노인분들조차도 그리 오래살지 않았다고 하신다. 누군가는 남았을 터인데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기억을 더듬을 만한 풍경이 사라졌다는 것은 슬픈일이다. 나 어릴적 고향의 풍경은 상상 속에만 남아있다. 몇몇 흔적들은 남아있지만, 그것에서 고향의 느낌을 받기란 쉽지 않다. 그 몇몇 흔적들 조차도내 기억과 소통되는 것이 아니라, 낡음의 흔적으로 가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개발의 폭력은 가난한 이들의 재산만 빼앗는 것이 아니라 추억까지도 빼앗아 버린다. 이런 식의 획일적인 재개발 방식이 아니라 그곳에 살던 이들이 살아갈 수 있으며 옛 모습도 떠올릴 수 있는 재개발은 없는 것일까? 자본이 논리에만 충실하고, 집을 거주할 공간이 아닌 투기의 대상으로 삼는 한 요원한 문제인 듯하다.


태그:#마천동산5번지, #재개발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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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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