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의 포스터.

영화 <암살>의 포스터. ⓒ (주)쇼박스


<암살>의 최동훈 감독은 실은 '(감춰진) 복수의 전도자'다. 최동훈의 도둑놈이, 도박꾼이, 날라리가 '설계'를 도모하고, '행동'에 앞서 나서는 건 모두 그놈의 복수 때문이다. 주인공들을 복기해 보라.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의 최창혁(박신양 분)은 형의 복수를, <타짜>의 고니(조승우 분)는 스승 평경장(백윤식 분)의 복수를, <전우치>의 전우치(강동원 분)도 스승 천관대사(백윤식 분)의 복수를, <도둑들>의 마카오박(김윤석 분) 역시 어릴 적 살해당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동료들을 조직하고, 판을 벌린다(단, 도술을 지닌 판타지 속 주인공 전우치는 대개 홀로 행동한다). 복수, 그리고 또 복수.

'복수 3부작' 박찬욱 감독보다 이제는 훨씬 더 대중적인 감독이 된 최동훈. 그에게 이 '복수'란 화두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던 건 작품 내에 힌트가 있다. 그는 철저하게 이 '복수'를 감추는 쪽으로 영화 초중반부를 채워 간다. 수법(?)도 다양하다. 1인 2역도 있고, 범인을 헷갈리게 만들기도 하며, 아예 복수라는 주인공의 의도를 후반부에 깔아 놓기도 한다.

이를 위해 플롯 구조를 이야기의 중반부터 시작(<범죄의 재구성>)하거나, 뒤섞어(<타짜>) 버리거나, 후반부 과거 회상 장면(<도둑들>)을 활용해 왔다. 예외가 있다면, 그의 필모그래피 중 선형적인 이야기 구조를 취한 <전우치>는 확실히 저평가 받았다. 그리고 2015년 180억여 원의 제작비를 들인 그의 다섯 번째 연출작 <암살>이 왔다. <도둑들>과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와는 또 달리 순박한 듯 절도 있는 독립군을 선보인 전지현과 함께.

<암살> 역시 일종의 복수극으로 볼 수 있다. 1933년, 친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중국에서 경성으로 온 독립운동가 암살단의 이야기를 그린 이 장대한 액션 드라마에서도 '복수'는 극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누가 누구에게 가하는 복수인가다. 그간 최동훈의 주인공들이 악인들을 향한 사적 복수에 치우쳐 있었다면, 뜻밖에 <암살>은 민족적 차원의 단죄 의미까지를 내포하며 시각의 확장을 도모하고 있다.

구체적인 역사를 소환하고 직시하는 <암살>의 의외성

 영화 <암살>의 한 장면.

영화 <암살>의 한 장면. ⓒ (주)쇼박스


먼저 전반부. 1910년 경술국치의 그 해로부터 출발하는 <암살>은 독립군 염석진(이정재 분)이 왜 중국으로 건너가게 됐는가와 가상의 친일파인 강인국(이경영 분)의 친일행각과 염석진과의 악연을 소개하며 직선적으로 달려간다.

그로부터, 23년 후인 1933년 저격수 안윤옥(전지현 분)과 신흥무관학교 출신 속사포(조진웅 분), 황덕삼(최덕문 분)이 김구와 김원봉으로부터 조선 주둔군 일본인 사령관과 강인국의 암살 명령을 받고 경성으로 떠나게 된다. 그 사이, 조국을 배신한 염석진으로부터 사주를 받은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분)이 세 사람을 쫓는다.

전술했듯이, <암살>은 가상의 인물들을 매력적으로 그리면서도 김구나 김원봉과 같은 몇몇 실존 인물, 연도와 지명, 단체 등 구체적인 역사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사실 영화 전반부는 모던보이·모던걸들과 독립운동가들이 공존했던 근대화 시대의 묘한 노스탤지어와 자유주의를 어떤 울분이나 민족적 강개와 동등하게 다루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최동훈 감독의 선택은 옳았다.

마음 한편에 커피와 연애에 대한 호기심을 지닌 안윤옥이나 익살스러운 짝패 조진웅, 황덕삼, 기품과 여유를 품은 아네모네 마담(김해숙 분), 이익을 좇지만 조선인의 피가 흐르는 하와이 피스톨 모두 목표는 동일하다. 영화가 그 시대를 살았던 한 '인간'으로서의 개성까지 그려내고자 하는 의도도 선명하다. 또, 이러한 인간미는 이들의 임무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후반부에 역사적인 사실과 공명하며 비극적인 파토스(고양된 감정)를 상승시키기까지 한다.

다만 계획된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기까지, 예고편에서 한껏 기대를 부풀려놨던 그 액션 장면을 마주하기까지, 정확히 예상 그대로 흘러가는 다소 느린 속도의 전개는 살짝 맥이 풀리게 한다. 그러나 후반부의 강렬한 감정과 최동훈 감독이 의도한 진짜 복수를 전개하기 위한 예열로 본다면, 암살단의 결성과 시대적 향수와 캐릭터의 유머가 뒤섞인 전반부는 실망할 정도는 아니다. 진짜 이야기는 후반부부터다.

최동훈 감독이 겨냥한 진짜 복수의 의미

 영화 <암살>의 한 장면.

영화 <암살>의 한 장면. ⓒ (주)쇼박스


강인국 암살은 결국 수포로 돌아간다. 동지들은 죽거나 뿔뿔이 흩어진다. 하와이 피스톨과 그의 동료 영감(오달수 분)이 안윤옥을 돕는다. 염석진은 일본 경찰의 부역자로 변신한다. 그 와중에 프롤로그에서 제시됐던 안윤옥의 가족사가 드러난다. 안윤옥의 분노와 복수심이 불붙는 가운데, 죽음을 결사하는 두 번째 암살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그리고 시간이 훌쩍 흘러 광복을 맞이한 안윤옥은 진짜(최동훈 감독이 강조하고 싶은) 복수의 대상을 찾아간다.

후반부 들어 <암살>은 안윤옥의 심리를 오롯이 좇아가며 집중력을 발휘한다. 개인사와 집단의 목표가 갈등을 빚는 점은 최동훈 감독의 단골 소재다. 비록, 안윤옥과 강인국의 관계 묘사가 다소 덜컥거리긴 하지만, 동료를 잃은 안윤옥이 친일파 처단을 위해 분골쇄신을 다짐한 독립군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다. 염석진의 변신을 필두로 안윤옥과 하와이 피스톨의 관계가 드라마틱하게 변모하면서 <암살>은 드라마와 액션을 잘 포갠 채로 묵직한 주제를 향해 내달린다.

혹자들이 시대극임에도 역시도 <암살>을 최동훈의 장기인 '케이퍼' 무비로 분류하는 것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 최동훈의 영화적인 야심이 돋보이는 대목은 바로 여기에 있다. 최동훈 감독은 이 대작에서 오히려 전작들의 사적 복수를 뛰어넘는다. 그리고 친일파에 대한 사회적 단죄의 역사적인 실패와 그 필요성을 영화적으로 재현하는 동시에 현재적인 의미로까지 연결한다. 무엇보다 <암살>이 향하고 있는 그 분노의 대상과 행위의 목적이 무척이나 구체적이라는 점은 실로 놀랍다.

상해임시정부의 독립군들은 제 손으로 독립을 성취하지 못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 사이, 염석진과 같은 친일파와 부역자들은 제 배와 가족들의 배를 불리고 호의호식하며 살아남았다. 최동훈 감독은 춘원 이광수가 그랬던 것처럼 "일본이 망할지 몰랐다"던 염석진에게 총구를 겨냥한다. 해방 후 남한은 그러나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줬고, 영화가 언급하듯 반민특위는 힘이 없었(고 곧이어 해체됐)다. 해방을 맞은 영화 속 김구와 김원봉은 "너무들 많이 죽었다"는 말로 자책과 위로를 대신한다.

그래서, 반민특위의 법정에 선 염석진이 자신을 변호하는 장면은 이정재의 호연과 더불어 최동훈 감독의 의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명장면이다. 힘과 권력에 빌붙는 부역자의 논리를 '비정하게' 청취한 뒤 이어지는 단죄는 영화라서 가능한 상상의 결말일지 모른다. 그러나 최동훈 감독은 그 장면을 기어이 찍음으로써 오늘날에 파장을 던지려 한다. 친일 2세대에 해당할 그 부역자들의 논리가 어떠한지, 그 논리가 어떻게 정당화되고 지금까지 이어졌는지 유추할 가능성을 활짝 열어 놓은 것이다.

현실의 역사에선 실패하고 좌절했을지 모를 독립군과 아나키스트들의 그 절실했던 목표에 대한 영화적인 보상이랄까. 그 바탕엔 물론 대의와 정의를 추구하면서도 인간미를 잃지 않았던 인물들에 대한 애정이 깔려 있다. 전반부, 시대에 대한 향수로 읽혔던 낭만은 사건과 감정을 파고를 거치며 그 시대를 살아가고 싸워 나갔던 이들에 대한 애정과 헌사로 탈바꿈된다.

주제와 완성도를 행복하게 결합한 <암살>, 그리고 최동훈의 뚝심 

 영화 <암살>의 최동훈 감독.

영화 <암살>의 최동훈 감독. ⓒ (주)쇼박스


그렇게 <암살>은 한국판 <오션스 일레븐>으로 불리며 지극한 오락 액션영화의 문법으로 승부한 <도둑들>과는 정반대의 캐릭터와 이야기를 펼쳐 놓았다. 그런데도 관객들은 이 영화에 뜨거운 반응으로 화답하는 중이다. <암살>은 28일(오후 3시 기준)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 개봉 이후 7일 만이다. <암살>이 1400개에 육박한 스크린 수에만 기대지 않는 '소구점'을 지녔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사적 복수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단죄 사이, 그리고 그 행위들의 현재적인 의미. 그 의미망 안에서 최동훈 감독은 드라마와 액션, 그리고 유머라는 코드들을 자유자재로 섞고 가지고 놀 줄 안다. 무엇보다, 첫 번째 암살의 실패 이후 '복수'라는 강렬한 주제를 친일파의 단죄와 연결해 단단한 감정선을 유지해 나간다. 관객들이 긴 140여 분이라는 긴 상영 시간과 묵직한 주제에도 호응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또 진중함에 짓눌리지도 않는다. 신파나 당위의 유혹에 빠질 생각도 없다. 대신 극을 프롤로그와 전반, 후반과 에필로그로 나눠 영화적인 호흡을 조절하는 연출력을 자랑한다(물론 139분의 상영시간에 할애된 다소 설명적인 편집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린다). 180억의 제작비를 가지고 이런 주제를 설파하는 이야기꾼 최동훈의 뚝심이 놀라울 정도다.

더불어 대사와 캐릭터 운용, 연기 면에서 장기를 보인 최동훈 감독은 <암살>에서도 역시 배우들의 매력을 최대한 살려 낸다. 인터뷰 때마다 "여성 캐릭터가 중심이 된 영화"임을 강조한 전지현이 대표적이다. 최동훈 감독은 그가 할리우드에서 실패한 '여성 전사'의 이미지를 창조적으로 되살렸다. 남성 관객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전지현의 몫이라면, 하정우의 팬들 역시 낭만파 킬러 하와이 피스톨에 만족감을 표시할 만하다.

한국영화 사상 손으로 꼽힐 악역을 강렬하게 연기한 이정재를 비롯해 카메오 출연에도 강렬한 아우라를 자랑하는 조승우와 오달수, 이경영, 김해숙 등 중견 배우 역시 이 의미심장한 시대극에서 마음껏 뛰어논다. 줌 인·아웃을 주조로 한 김우형 촬영감독의 촬영이나 공을 들여 시대를 재현한 세트와 의상 등 미술 역시 나무랄 데 없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2015년, 한국 영화는 <암살>과 같은 논쟁적이면서 직설적인 주제를 담은 상업영화를 배출했다(박찬욱 감독이 각본을 쓴 <아나키스트> 이후 동일한 소재를 다룬 주류 한국영화는 전무했다). 더욱이, '천만 영화'의 궤적을 따라잡는 흥행 스코어를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이 규모와 스타에의 홀림인지, 반일과 민족 코드의 부활인지, 최동훈의 연출력에 대한 신뢰인지, 스크린 독과점 시대의 또 다른 부산물인지, 그도 아니면 이 모두의 결합인지는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 정확히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주제와 완성도가 행복하게 결합한 시대극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임은 분명해 보인다.

○ 편집ㅣ김준수 기자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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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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