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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기사] "일 년 남았대" 어느 전직 국회의원의 고백

곽정숙 의원은 완벽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꼼꼼하고 책임감이 강했다. 자신에게는 엄격한 사람이 함께 일하는 보좌진에게는 뜻밖에 관대했다. 한 번은 국정감사 기간에 한 보좌진이 무단결근을 한 적이 있다. 이건 보통 큰 사고가 아니다.

본인이 맡은 피감기관 감사 날 연락 두절이 되었기 때문이다. 수석 보좌관인 나는 이 사람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의원은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면 넘어갔다. 자질구레한 회계 관리에는 매우 엄했는데 사람의 실수에는 너그러웠다.

곽 의원은 여성장애인 운동을 할 때도 늘 이런 자세를 견지했다고 한다.

선교회에서 보낸 청년 시절, 즐거웠던 그때

광주여성장애인모임에 참석한 곽정숙 전 의원의 모습
 광주여성장애인모임에 참석한 곽정숙 전 의원의 모습
ⓒ 곽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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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로암 선교회와 함께 청년 시절을 보내셨다. 어떤 곳인가?
"'실로암 선교회'는 정말 우연히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라디오가 세상과 만나는 수단이었다. 집에서 늘 라디오를 듣고 엽서도 써서 보내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이름으로 엽서가 왔다. '장애인수련회'에 오라는 초대장이었다. 누가 보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엽서에 있는 번호로 전화했는데 그곳이 실로암 선교회였다. 우리 집 주소를 어떻게 알았는지 물으니 라디오의 한 프로그램에서 내가 보낸 사연을 듣고, 그 프로그램에 전화해서 주소를 알려 달라고 해서 보냈다고 한다.

인연이 만들어진 과정을 생각하면 하나하나 기적 같다. 그렇게 광주 무등산에서 열린 3박 4일 장애인수련회에 참여하게 되는데, 처음 갔을 때 그 자리에 모인 장애인 숫자에 깜짝 놀랐다. 백여 명이 넘었던 것 같다. 중증장애인들도 많았다. 나만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장애인이 있었다니. 다른 장애인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었다.

자원봉사하는 사람들을 보고도 놀랐다. 호신대 신학생들이었는데 식사 수발은 물론 세안, 대소변 수발까지 기꺼이 봉사했다. 함께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인지 그때 알았다. 그 뒤로 실로암 선교회에서 하는 여러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선교회의 임원이 되었다.

선교회에서는 여성장애인 생활시설을 운영하였는데, 자수를 담당하던 생활지도 교사가 결혼하면서 빈자리가 생겼다. 나에게 교사를 맡아달라는 제안이 왔다. 생활지도교사로 20대에서 50대까지 15명 내외의 여성장애인들과 함께 살면서 밥도 같이 해먹고, 예배도 인도하고, 자수도 가르쳤다. 그 후 재활원 원장, 실로암 선교회 회장이 되었고, 공동체생활은 계속 이어졌다.

생활지도교사로 있을 때 같이 지내는 사람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게 뭐냐?' 물어봤더니 모두 공부를 하고 싶어 했다. 내가 왕년에 과외 선생 아니었나. 공부 가르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웃음) 나는 그래도 학교에 다닌 경험이 있으니까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고…. 초등학교 과정 시간표를 짜서 야간 학교를 운영했다.

칠판도 놓고, 교과서도 얻어다가 일반 교과 과목 그대로 공부했다. 음악 시간에는 기타를 치면서 노래도 부르고, 음표도 알려줬다. 새벽에 일어나 예배드리고, 밥해 먹고, 십자수 교실은 따로 운영하고, 자정까지 공부했다. 성경을 추가 과목으로 둔 것만 학교랑 달랐네. 몸은 그야말로 기진맥진했지만, 다들 좋아하니 나도 신났다. 그때가 정말 좋았다."

- 여성장애인운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실로암 선교회 회장 자격으로 광주 지역 장애인단체 연합회 회의에 참석하였다. 작은 단체부터 큰 시설장까지 20여 단체가 모였는데 그중 여성인 회장은 나 혼자였다. 실로암 선교회는 군계일학 같은 존재였다. 창립 초대회장이 중증 여성장애인이었던 영향인지 2, 3대 모두 여성이 회장이었고, 내가 4기 회장을 했다. 내 뒤는 남성이 회장을 했지만, 이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여성 지도자들이 생겨났다.

다른 단체와 일하면서 여성으로서 시각을 갖게 되었다. 여성장애인들이 겪는 일상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면 그게 바로 차별이었다. 여성인권, 장애 인권 문제를 자각하게 되면서 여성장애인들의 모임, 즉 조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졌다. 마침 전국적으로 여성장애인 조직을 만들어보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1998년에 준비위를 결성하고, 1999년 4월 17일 한국여성장애인연합 창립총회를 했다.

광주에서도 광주여성장애인연합을 만들었고, 내가 초대 대표를 맡았다. 나중에 한국여성장애인연합 상임대표(2대, 3대 공동대표, 2002년~2007년)를 맡았고, 2008년 국회의원이 되었다."

거절했던 비례대표 후보, 결국 수락한 이유

국회 입성 후 사진 촬영에 나선 곽정숙 전 의원의 모습
 국회 입성 후 사진 촬영에 나선 곽정숙 전 의원의 모습
ⓒ 곽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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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례대표 제안을 받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
"한마디로 거절했다. (웃음) 2008년 2월에 민주노동당에서 연락이 왔다. 비례대표 1번에 여성장애인을 배정했다고, 후보가 되어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 뒤로도 여러 분들이 계속 연락을 하였고, 나는 계속 거절하였다. 어느 날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 공동상임대표인 박경석 대표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수락하지 않으면 장애인단체에서 동의하기 어려운 사람이 후보가 될 상황이라고 했다.

이건 내 문제가 아니었다. 한 번 더 생각해 보겠다고 하였다. 결정적으로 내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민주노동당 장애인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추천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조직 대표성'이었다. 국회의원이라는 것이 개인의 영광을 누리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다음날 "해보겠다"고 답하였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비상대책위원회 체제였다. 이른바 '1차 분당' 시기로, 민주노동당을 집단 탈당한 사람들은 진보신당을 창당하여 두 개의 진보정당이 존재했다. 민주노동당 비대위는 비례대표 선정에 고심을 거듭하였다.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당의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 비례대표 1번은 여성장애인 곽정숙, 2번은 비정규노동자 홍희덕, 3번은 여성인권변호사 이정희 등으로 전략공천했다.

"후보가 되고 나니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다 싶었다. 나는 장애인단체를 대표하고, 내가 아는 것도 장애와 관련된 것이니 여기에 맞춰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비례대표 후보 10명이 같이 다니면서 선거운동을 했는데 내가 1번이라 항상 제일 먼저 발언을 했다. 많이 떨리지는 않았다.

특별하게 전문지식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이야기, 내 생각을 진심으로 말하니까 마음이 전달되는 것 같았다. 얼마 전에 누가 묻더라. '어쩜 이렇게 말을 잘하세요? 역시 국회의원을 해서 다르시네요'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다. '나는 말을 잘해서 국회의원이 됐어' (웃음)"

국회 안에는 정말 말을 잘하는 정치인이 많다. 때때로 말 잘하는 사람을 다 모아놓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말을 잘한다고 의정활동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곽정숙 의원은 말을 잘하는 의원이었을까? 동의도 부정도 하지 않겠다. 의정활동을 잘하는 의원이었다고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 본회의 첫 발언 기억하시나? 원고를 미리 준비해 드리지 않았는데 신상 발언을 하셔서 깜짝 놀랐다. 국회 편의시설 확충을 말한 게 첫 발언이었다.
"정식임기가 시작되기 전, 한 달 정도 당선자 신분으로 국회 기자회견실(정론관)에서 발언하려고 섰는데 발언대(단상)가 내 키와 비슷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옆에 있던 보좌진이 급히 종이상자(A4 용지가 들어있는 박스)를 가져다 놓아주어 그 위에 불안한 채로 올라서서 발언했다.

임기가 시작되면 확실히 문제를 제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첫 본회의에서 신상 발언 요청을 하고 원고 없이 발언했다. 국회의장은 바로 죄송하다고 사과했고, 가장 이른 시일 안에 개선하겠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기자회견장 발언대가 높이 조절이 가능한 단상으로 교체되는 데 1년이 걸렸다. 가장 빠른 시간이 1년인 셈이었다.

나는 척추가 굽어 앞뒤로 즉, 등과 가슴이 혹처럼 나와 있어 가슴 폭은 넓고 허리는 가늘다. 그러니 허리에 힘이 없어 기대지 않고 오랫동안 서 있기 힘들다. 목은 쏙 들어가 거의 보이지 않고 얼굴 턱이 가슴에 닿는다.

키는 130cm, 앉은키는 60cm다. 서 있는 키는 물론, 앉은키도 일반인보다 매우 작다. 서 있을 때나 앉아있을 때나 일상생활이 모두 불편하지만 앉아있을 때의 불편함이 더 크다. 맨바닥에 앉으면 다리가 엉덩이보다 높아서인지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다리마비가 온다. 의자에 앉으면 탁자가 높아 팔이 올라가고 고개 숙이는 각도가 맞지 않아 책을 읽을 때나 글을 쓸 때나 음식을 먹을 때나 무엇을 하든지 불편해서 장시간의 생활이 어렵고 효율성도 떨어진다.

그래서 내가 자주 사용하는 자리는 특별주문으로 제작한 방석이 놓여 있다. 우리 집 식탁의자엔 20cm의 방석, 내 차의 운전석에는 15cm의 방석, 거실에는 10cm와 20cm의 방석이 있다. 집 밖을 나갈 때는 10cm 높이의 의료기구인 공기방석을 가지고 다닌다. 의정활동을 할 때도 방석 챙기기는 보좌진들의 중요한 업무였다. 장애 특성에 맞는 생활환경은 굉장히 중요하다. 비장애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완전한 참여, 완전한 평등... 미처 못 다 이룬 그의 꿈

국회 정론관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개정을 요구하는 곽정숙 전 의원의 모습
 국회 정론관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개정을 요구하는 곽정숙 전 의원의 모습
ⓒ 곽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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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보건사회부는 2000년 장애인 정책비전을 밝혔다.

"나는 모든 사람이 드나드는 문을 함께 사용한다. 나는 특별한 문을 통하거나 우회해 갈 필요가 없다. 좋아하는 사람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 갈 수 있다. 지원차량이 그 시각을 결정하지 않는다. 혼자서 버스를 이용할 수 있으며 정류장 알림 소리를 듣고 스스로 판단해 하차한다."

스웨덴 장애인 정책의 목표는 완전한 참여와 완전한 평등이다. 일터, 어린이집,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쇼핑몰과 주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기회와 권리를 보장하려 노력한다. 곽 의원이 주장한 '인권복지'는 이와 일맥상통한다.

- 어떤 복지정책을 펼치고 싶었나?
"사람을 존중하는 복지가 되어야 한다. 나는 이를 '인권복지'라고 한다. 내가 처음으로 사용한 말이다. 나는 아이디어가 많다. (웃음) 인권복지 측면에서 2011년 제정된 '장애인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은 가장 아쉬운 법안 중 하나다. 대상자도 제한하고, 시간도 제한했다. 장애인 활동보조서비스 24시간 확대를 4년 내내 줄기차게 주장했다. 박근혜 대통령 공약이기도 했는데 아직도 온전히 제공되지 않고 있다. 중증장애인의 생활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한하여 제공한다는 것은 심각한 인권침해다."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인 김주영씨는 2012년 새벽, 집에 불이 나 119에 신고했지만, 소방차가 오는 동안 질식사로 사망했다. 활동보조인이 전날 오후 11시에 퇴근하고, 홀로 잠을 자던 시간이었다. 2012년 사망한 허정석씨, 2014년 사망한 오지석씨 등 일련의 사고는 24시간 활동지원서비스가 제공되기만 하였으면 막을 수 있었다.

"'장애인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으로 올해 6월 1일부터 신청자격은 장애 3급(6세 이상 65세 미만)으로 확대되었다. 대상자는 확대되었으나 24시간 보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4시간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 제공은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하다."

- 또 다른 아쉬움은 없나?
"'장애여성지원법'은 꼭 통과시키고 싶었는데 안 되었다. 논의될 듯하다 되지 않았다. 사회복지는 사회구성원의 보편적 권리는 국가와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기본원리다. 장애여성지원법은 그런 관점이 담긴 법이다.

예컨대, 여성장애인은 임신 및 출산이 위험한 경우가 많아 의료비용이 비장애여성 임산부보다 많이 발생한다. 출산 시에도 더 넓은 공간, 특수한 환경이 제공되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휠체어 장애인의 경우는 입원실이나 산후조리를 하는 공간도 비장애인보다 넓어야 하고, 장애유형에 맞는 편의시설이 갖추어져야 한다.

산후조리에 추가 인력이 필요함은 물론이고, 자녀 양육 시기에도 인력이 지원되어야 한다. 모성권 보호 차원에서만 봐도 특별한 지원이 필요하다. 교육, 노동, 의료 영역 모두 마찬가지다. 여성장애인 당사자 의원이 직접 말해도 설득이 쉽지 않았는데 여성장애인 의원도 없는 지금은 더 어렵지 않을까 걱정된다. 내가 있을 때 통과시켰어야 했던 법이다.

당사자 의원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당사자는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 당사자가 아니라서 정확히 모르면 내 일로 요구가 안 되고, 남의 일 도와주는 데 그치게 된다. 도와주는 건 조금 하다 안 되면 포기하지만, 내 일이라고 생각하면 죽기 살기로 하게 된다. 그게 사람이다. 만약 당사자가 아니라면, 당사자만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하고, 당사자 입장을 고려하여 의정활동을 해야 한다. 당사자보다 더한 노력이 필요하다. 국회의원은 한 마디로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못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여성장애인 의원은 17대 장향숙 의원에 이어 18대에는 곽정숙 의원 외에도 이정선 의원(한나라당)이 있었다. 19대에 여성장애인 의원은 없다.

곽 의원은 장애인 정책 이외에도 활발한 의정활동을 했다. 법안 제정·개정이나 예산 확보와는 다르지만, 의료영리화 저지나 한미 FTA로 인한 보건의료 피해를 이슈화한 것도 의정활동의 성과에 포함해야 할 것이다. 의료영리화를 막기 위해 4년 동안 열심히 싸웠고, 막았다. 의원과 연대하여 일한 보건의료노조와 관련 단체들의 공이다.

- 가장 진보적 의원으로 선정된 적이 있다. 싸움을 잘해서 그런가? (웃음)
"모 언론에서 정책적인 측면에서 진보-보수 의원 조사를 한 적이 있다. 그 조사에서 내가 모든 국회의원 중에 제일 왼쪽에 있었다. 강기갑, 권영길 대표님보다 왼쪽이었다. (웃음) 놀라긴 했다. 물론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의정활동이 매우 진보적이긴 했다. 질의부터 입법까지 모두 현장에 근거한 것이었다. 원리원칙을 따져 발언했다. 공익적 정의를 선택하고, 약한 편에 섰다. 그러니 진보적이지 않을 수가 있나. 방향성으로 따지면 정확한 조사다. (웃음)

의료영리화 반대가 결정적 요인이었을 것이다. 타협의 여지가 없는 정책이었으니까. 돌아보면 통과시켜야 할 것도 많았지만 막아야 할 것도 참 많았다. 원격의료도 정부가 너무도 하고 싶어 하던 것인데 잘 버텼다. 원격의료가 도입되면 장점보다 문제점이 많다. 의료체계 근간을 흔드는 제도였다. 그런데 이번에 메르스를 핑계 삼아 삼성서울병원에서 원격의료를 시도한다는 보도를 봤다. 그렇게 어렵게 막았던 원격의료를 이렇게 쉽게 허용하나 싶었다."

* 다음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태그:#곽정숙, #국회의원,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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