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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파일 복구 결과 내국인사찰 사실무근 확인'(국정원 주장) 셀프감금, 셀프개혁, 셀프조사, 셀프판정. 이런 셀프신공을 시전할 수 있는 건 '신'과 국정원뿐입니다. 과학 대신 '맹목적 신앙'을 요구한다는 점에서도, 둘은 같습니다."

역사학자 전우용이 지난 26일 자신의 트위터에 적은 글이다. 국정원 해킹 의혹이 거세게 일고 있다. 이날, 자살한 국정원 직원 임아무개씨가 삭제한 파일을 국정원이 복구·분석한 결과 내국인 사찰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우용씨는 이런 국정원의 '혼자서도 잘 해요' 행보에 일침을 가한 것이다. 27일, 국정원의 결론은 아니나 다를까 한결같았다.

앞서 이병호 국정원장은 국회 현안보고에 출석, "국내 사찰은 전혀 없었다"고 거듭 주장했다. RCS(해킹프로그램)로는 카카오톡도 도청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병호 원장은 "내 직을 걸고 불법 사찰을 한 사실이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증거를 내놓지는 않았다. 무슨 근거로 이런 '셀프판정'을 믿어줘야 하나.

국정원의 이런 자신감은 믿는 사람이, 믿는 구석이 있어서일 테다. 이미 박근혜 대통령이 '셀프개혁'으로 국정원 댓글 사건의 당사자들을 두둔해 주지 않았나. 27일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에서 사실상 국정원의 '셀프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인제 최고위원(관련 기사 : 이인제, 국정원 해킹 의혹 '셀프 수사' 주장)도 같은 부류다.

야당의 고발로 공이 검찰(공안2부)로 넘어갔다. 그러나 검찰 수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검찰 내부를 흔들고 가이드라인을 못 박으려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BH(청와대)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수동적인 국민이 먼저 접하는 건 중심 뉴스를 비롯한 방송 매체일 수밖에 없다. 7월 한 달간의 보도를 살펴보면 국정원의 든든한 배경은 바로 이들 방송 매체이다.

이병호 국정원장은 다른 별에서 살다 왔나

국가정보원의 민간인 대상 해킹 의혹과 관련해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가 시작된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이병호 국가정보원장이 참석하고 있다.
▲ 이병호 국정원장 국회 정보위 출석 '해킹 의혹' 보고 국가정보원의 민간인 대상 해킹 의혹과 관련해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가 시작된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이병호 국가정보원장이 참석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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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과 이병호 국정원장은 평소 어떤 매체의 어떤 뉴스를 볼까. 진지하게 묻고 싶다. 뉴스를 보기는 하는 건가. 만약 아니라면, '국정원 해킹' 사건과 관련해 거짓말을 하거나 일부러 사실을 호도하고 있는 셈이리라. 해당 업무에 관여한 직원이 안타까운 선택을 한 마당에, 변명도 어쩜 그리 과거와 판박이란 말인가.

7월 내내 지속된 논란에 대해 "근거 없는 의혹으로 정보기관을 매도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거나 "프로그램을 35개국 97개 기관이 구입했지만 아무런 논란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국정원의 반박은 의혹을 키우기에 충분했다. 그럴싸한 논리는커녕, 국정원이 국민을 무지몽매한 우민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뜻으로밖에 풀이할 수 없는 이 현실이 비참하다.

지금 즉시, 구글 검색창에 'Italy hacking team', 'hacking team', 'hacking team RCS'와 같은 단어 조합으로 검색해 보시라. 이미, 주요 외신들이 해킹 데이터가 유출된 당시 신속하고 비중 있게 다뤘다는 사실을 손쉽게 알 수 있다.

국가별 대응의 온도 차만 있을 뿐, 자국 정보기관의 해킹 프로그램 구입을 '국익' 운운하며 눙칠 정부는 많지 않다. 국정원과 정부가 스스로 대한민국을 반민주국가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면 말이다. 한데, 국정원의 바람에 부응하는 매체가 있다. 앞서 언급한대로 KBS를 비롯한 지상파 방송의 보도 행태를 세세히 뜯어보자.

11대 0, 야구 콜드게임 숫자가 아니다

'11 대 0'

지난 9일부터 13일까지, 국정원의 불법감청프로그램 사용 의혹이 국내에 알려진 직후 5일간 손석희 사장이 이끄는 JTBC와 지상파 3사의 메인뉴스 보도량을 비교한 숫자다. 모르쇠로 일관한 지상파 3사의 철저한 침묵을 보고 있노라면 소름이 끼칠 정도다.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방송본부(새노조)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 9일부터 22일까지 '국정원 해킹' 관련 보도량을 봐도, KBS가 6건, SBS가 8건, JTBC는 64건이었다.

"과연 이 사안이 진보와 보수의 문제인가. 친여, 친정부방송이 되었다고 외면해도 될 사안인가. 친정부방송이 되면 이토록 중요한 사안에 대한 국민의 알 권리는 안중에도 없게 되는 것인가. 적어도 '언론'이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 지상파 방송의 맹성을 촉구한다."

지난 14일 이와 관련 "'5163 부대 의혹' 외면하는 지상파가 부끄럽다"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낸 최민희 의원실의 자료 중 일부다. 논란이 거세지자 더 이상은 묵과할 수 없었을까. 논란이 더 거세진 14일부터 지상파 3사도 보도를 내기 시작한다. 먼저 KBS를 보자.

KBS <뉴스9>는 14일 12번째 꼭지로 국정원 논란을 최초로 다뤘다. 총 2꼭지 중 첫 번째는 단연(?) "국정원 '북한 해킹 대비 프로그램 구입, 사찰 없었다'"는 국정원 측 해명 내용이었다. 이어진 뉴스는 "국정원 구매 'RCS 해킹'... PC·스마트폰 정보 '줄줄'"을 내보냈다.

반면 광주유니버시아드 대회 폐막을 헤드라인으로 내건 <뉴스9>은 박근혜 대통령이 공영 홈쇼핑 촬영 현장을 찾았다는 뉴스를 5번째로 배치하는 기민(?)함을 선보였다. 논란이 지속했던 15일 이후는 어땠을까. 의혹과 논란이 지속했던 15일부터 26일까지 12일간 <뉴스9>은 총 10.5건(26일 간추린 단신 0.5 포함)을 보도하는 데 그쳤다. JTBC <뉴스룸>이 9일부터 13일까지 5일간 내보낸 11건보다 적은 숫자다.

수치만이 문제가 아니다. <뉴스9>의 지극한 축소 보도는 임아무개 과장이 자살이란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더 줄었을 가능성도 있다. 헤드라인 보도도 자살이 알려진 19일, 20일에 국한됐다. 내용 또한 주로 국정원 측 주장과 경찰 발표에 의존했고, 여야가 공방을 벌이는 프레임을 강화했다. <뉴스9> 보도만 따라잡으면, 내국인 사찰은 없었다는 국정원의 일방적인 주장을 일찌감치 사실로 단정하게 된다. 오히려 야당이 없는 의혹을 부풀리는 것으로 시청자가 판단할 가능성이 크다.

SBS와 MBC의 경우는 어땠을까. SBS <8뉴스>는 KBS보다 적은 10건이었다. <8뉴스>만 보면, 의혹이 일었고 여야가 공방하는 가운데 국정원 직원이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어 국정원의 '셀프조사'로 조용히 논란은 마무리되는 형국이다. 보도 내용 또한 KBS <뉴스9>과 판박이처럼 닮아 있었다.

반면, MBC는 지상파 3사 중 가장 많은 17건을 기록했다. 단 이틀을 빼고 하루에 1건 정도 뉴스를 내보냈지만, 야당의 무리수라는 논조가 다수를 차지했다. 해외 사례를 들며 국정원 불법감청프로그램 구입의 불가해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나 메르스 사태를 보도하던 논조 그대로를 유지한 것이다. 이쯤 되면, KBS의 수신료 인상 요구나 MBC와 SBS의 공정보도 운운은 가뿐히 무시해도 타당할 것 같지 않은가.

결과적으로 국정원 의혹 축소와 편들기 일관한 지상파 3사

국가정보원의 민간인 대상 해킹 의혹과 관련해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가 시작된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이병호 국가정보원장이 출석하고 있다.
▲ 이병호 국정원장 국회 정보위 출석 '해킹 의혹' 보고 국가정보원의 민간인 대상 해킹 의혹과 관련해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가 시작된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이병호 국가정보원장이 출석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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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김어준의 파파이스>를 진행하는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는, 최근 방송에서 "이미 1년 전에 이탈리아 해킹 팀의 해킹프로그램 판매 의혹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김어준은 해킹 팀의 문서들이 인터넷상에 폭로되기 전인 지난해 해킹 팀 '갈릴레오'의 존재를 소개한 바 있다. 당시 음모론으로 치부됐던 사안이 정국의 핵으로 떠오른 것이다.

지상파 3사에게 이런 취재력이나 관점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최소한의 균형을 바랄 뿐이다. 인력과 재원에서 비교 우위를 점한 지상파 3사에게 그런 '기본'만이라도 지키라고 요구해야 하는 슬픈 현실. 이것이 박근혜 정부 아래의 지상파 3사의 민얼굴이다.

KBS 새노조는 지난 23일 "국정원 해킹 보도, 언론이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가?"란 제목의 성명을 냈다. 새노조는 "14일 나간 한국방송의 첫 보도가 국정원의 해명을 주로 담았다"며 "그 뒤에도 국정원이 해명한 내용에 대한 합리적 의심이나 검증 시도가 전혀 없었다"고 자사보도를 비판했다. 이미 망가져 버린 지상파 3사의 공영성은 회복될 기미가 없어 보인다. 이번 국정원 해킹 사건 관련 보도 행태 역시 이를 다시 한 번 확인해 준 꼴이 됐다.

여전히 의혹은 산재해 있다. 결국, 임아무개씨의 자살과 관련한 의혹은 자살로 종결이 났다. 하지만, 이미 증거를 인멸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던 국정원의 '셀프조사'를 곧이곧대로 믿을 이유는 없다. 지상파 3사가 모르쇠로 일관하며 국정원에 힘을 실어주는 형국은 결국 국민을 움직이게 할 뿐이다.

27일 민주노총,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주주의법학연구회,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진보네트워크센터, 참여연대, 천주교인권위원회, 한국진보연대는 기자회견을 하고, 국정원 불법해킹사찰에 대응하는 국민고발운동을 선포했다. 우선 오는 29일 자정까지 국민고발단을 모집, 30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등으로 1차 고발장을 제출한다는 계획이다.

검찰 조사와 함께 국정원 해킹 의혹 사건은 시즌2를 맞이하게 됐다. 지상파 3사의 보도 행태를 눈을 부릅뜨고 감시해야 할 이유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태그:#국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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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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