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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실비아가 내게로 왔을 때 난 그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제법 진지하게 국가와 민족에 대한 니체의 견해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그때, 별안간 자전거를 타러 가자고 한다. 이미 자물쇠가 풀리고 나란히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커플 자전거가 앞에 있다. "위" 보다는 "오케이"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왔다. 난 책을 던져두고 실비아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산책하러 갔다.

"알베르또는요?"라는 질문에 두 손을 모아 오른쪽으로 대며 머리를 비스듬히 기울인다. 즉 주무신다는 뜻.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한 실비아는 선글라스를 끼고 베레모도 쓰고 아마 자외선차단제도 발랐을 것이다. 반면에 난 그늘에서 책 읽다가 끌려나갔으니, 오전 물놀이 후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고 그야말로 맨얼굴이다.

산책 코스가 어찌 될런가 모르지만, 적당히 뜨거웠으면 하는 바람. 이틀 전 나에게 자전거를 타고 휘익 돌아오라던 그녀의 요구에 난 간단히 캠핑장 한 바퀴를 돌고 왔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실비아는 캠핑장 밖의 밭길, 가로수 길을 돌아오란 뜻이었나 보다. 말이 안 통하는 우리의 산책을 구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좀 안타깝기도 할 터이지만 그래도 우린 그 안타까움을 유쾌함으로 승화해내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아줌마와 할머니다.

실비아가 보리를 가리키며 프랑스어로 말하면 난 그녀의 발음을 따라 한다. 또 그녀가 옥수수, 해바라기, 보리 등을 발음하면 똑같이 말한다. 그녀는 나의 발음을 교정해주고 칭찬해준다. 옥수수밭을 지나며 "마리스"라고 하면 어쩔 줄 몰라 하는 눈빛에서 나에 대한 대견함과 사랑스러움이 찐하게 느껴진다. 누가 보면 '돈 많은 유럽 할머니가 집안일도 도와주고 친구도 삼을 요량으로 아시아 어딘가에서 저 여자를 데려왔나 보다' 짐작할만한 조합이겠다.

노래 부르며 자전거로 달리는 길

▲  유럽인들은 대부분 자전거를 싣고 휴가를 온다. 아직 자전거를 못 타는 현을 위해 실비아가 자전거를 가르쳐주었다.
 ▲ 유럽인들은 대부분 자전거를 싣고 휴가를 온다. 아직 자전거를 못 타는 현을 위해 실비아가 자전거를 가르쳐주었다.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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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송을 불러달라는 나의 말에 그녀는 샹송을 불러주었다. 늙었다는 것은 노래를 부를 때 목소리가 젊을 때와 다르게 성량이 약해지게 한다. 그래서 음이 이탈되며 불필요하게 바이브레이션을 많이 쓰게 된다.

실비아의 목소리도 그와 같았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고 불러주었다. 그런 그녀의 노랫소리는 가늘고, 위태로우나 시원했다. 내 예상대로 그녀는 끝까지 불렀다. 나도 아리랑을 불러 주었다. 다시 그녀는 벨기에에서 '엄마의 노래' 쯤 되는 것을 부른 후 한 줄 한 줄 내용을 몸으로 설명해주셨다. 나도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로 시작하는 노래를 불러줄까 했으나 너무 칙칙해서, 우리의 산책과 어울리지 않아서 그만두었다.

이번 여행 중 자동차를 타고 달리며 길 양옆에 있는 보리밭, 밀밭, 옥수수, 포도밭 등을 보았다. 사실 이전에는 멀리서 보기만 했지 실제로 이렇게 가까이 들어와 만져보고 냄새를 맡아보진 못했었다.

시골 냄새가 어떠냐고 묻는다면 한국과 똑같다. 실비아의 말로 이 냄새의 정체는 바로 "뀨쑝"이란다. 처음엔 소똥인가 했는데 돼지였다. 돼지똥을 밭에 뿌렸는지 아니면 돼지 목장에서 냄새가 풍겨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뀨쑝'의 냄새가 났다.

"봉 뀨쑝" 이라고 하자 실비아는 웃었다. 냄새는 나쁠지언정 곡식을 살찌우니 좋은 돼지 똥 냄새란 뜻이었고 실비아는 나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 분이셨기에 옳다는 미소를 한가득 띠셨다. 돼지우리 비슷한 것을 지날 때 내가 큰 소리로 "뀨쑝~"을 외치자 정말 웃기게도 조용하던 돼지우리에서 뀨쑝들이 한국 의성어로 '꿀꿀꿀'에 해당하는 소리를 냈다. 실비아와 나는 마주 보며 웃었다.

수로 시설이 아주 잘 되어 있었는데 옥수수밭으로 콸콸 들어가는 물은 옥수수와 풀의 키를 모두 키웠다. 결국, 옥수수만큼 풀이 길게 자라고 있었다. 햇빛을 왼쪽 옆에 두고 왔을 땐 좋았는데 햇빛을 마주 보고 페달을 밟자니 이마와 허벅지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나는 듯하다.

햇빛을 보고 달렸더니 해바라기는 나를 보고 있었다. 해바라기는 항상 해를 바라보는 줄 알았더니 저녁 6시 무렵엔 해를 등지고 있었다. 플라타너스 길에 내려 우린 '케케'의 소리를 들었다. 아마 귀뚜라미를 뜻하지 않을까 싶다. 여하튼 '케케케케' 울음소리는 키가 유난히 큰 플라타너스가 서로 비비는 소리처럼 시원했다.

길에서 열매를 맛보고 사람들과 인사하다

볼에 가득 든 열기가 서서히 빠지는 사이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농부들을 보았다. 실비아는 그들에게 "올라"하고 인사한다. 온종일 육체노동으로 진이 빠졌을 그들도 웃으며 인사한다. 동네를 어슬렁대는 그런 부류의 젊은 아이들이 차를 타고 지나갈 때도 실비아는 인사했다. 운전하는 남자아이는 함께 인사했고 뒷좌석에 앉은 여자아이는 웃었다. 그래도 실비아는 개의치 않는다. 동행자인 나는 개의치 않지 않는데... 꿀꺽.

실비아가 자전거에서 내려오면 나 또한 급브레이크를 잡아 자전거에서 내렸다. 보리밭에 가서 보리를 뜯어오더니 나에게 보리를 씹어보라 하신다. 색깔은 누렇고 쌀보다 딱딱했다. 또 길가에 있는 밀 같은 것도 뜯어 나에게 주었다.

물론 말이 통하지 않기에 모든 건 추측이다. 그것이 밀이 아닐 수도 있다. 여하튼 또 어떤 꽃을 뜯어 열매 부분을 뜯더니 열매를 감싸고 있는 잎을 하나씩 뜯는다. 그러자 푸르스름한 알갱이가 나오자 먹어보라 하신다. 주신 것을 모두 한 쌍씩 꺾어 자전거 뒤에 실었다. 현과 쭈에게 맛보여주고 싶어서. 캠핑장에 다다랐을 때 내 예상과 달리 실비아의 핸들은 캠핑장과 반대쪽인 해변 쪽으로 가는 다리를 향했다.

'아이고, 지금쯤이면 남편과 아이들이 수영장에서 와서 배고프다고 밥솥을 열 수도 있는 시간인데...'

기어를 1단에 놓고 경사면을 오르는 내 허벅지와 마음은 편치 않았다. 숨은 거칠게 쉬었지만 그래도 74세 실비아는 거의 정상까지 자전거를 타고 올라갔다. 대단한 관절과 체력이다. 그녀는 핸들은 해변 쪽인, 동쪽이 아니라 북쪽을 향했다. 저기 별것도 없었던 거 같은데...

그녀가 나에게 보여준 것은 요트를 판매하는 가게였다. 이미 가게 문은 닫혔지만 실비아와 나는 진열장 안에 있는, 엄청나게 고급스러워 보이는 보트를 한참 쳐다보았다. 각기 머릿속에 조금씩 다른 상상을 했겠지만 그런데도 '바다', '요트'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낭만', '환상', '꿈'을 연상시키는 낱말인가 보다.

조금 더 가다가 일찍 영업을 시작한 성매매 여성을 보았다. 타고난 피부가 구릿빛이었고 너무 말라 볼륨은 없으나 미소는 밝았다. 그녀는 큰 물병 하나를 옆에 두고 지나가는 차를 의식하며 그럴듯한 자세를 잡고 서 있었다. 나의 사랑스러운 실비아는 그녀를 향해서도 "올라" 경쾌하게 인사를 했다. 그녀 또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내겐 좀 불편한 그녀의 존재, 그녀의 영업장에서 불과 5m나 올라갔을까? 다시 자전거에서 내렸다.

스카이다이빙을 지켜보며... "골 때리는 할머니가 될거야"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비행기 이착륙장이 있었다. 실비아는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곳이란 설명을 몸과 소리로 대신했고 난 고개를 끄덕이며 알고 있단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70대의 실비아와 30대의 난 한참 동안 비행기가 이륙하고 하늘에서 비가 내리듯 스카이다이빙 하는 사람들이 내려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생각보다 꽤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고 마지막 사람이 무사히 땅에 착륙할 때까지 우린 계속 지켜보았다. 내가 40살이 되면 꼭 패러글라이딩하고 싶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40이란 숫자가 프랑스어로 생각나지 않아 말하지 않았다. 말하진 않아도 난 그녀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실비아는 스카이다이빙을 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나 또한 해보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를 이곳에 데리고 오고 싶었던 것이다. 이곳까지가 그녀가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곳이었을 것이다.

목적을 달성하자 그녀는 어느 길로 돌아갈까 망설였고 그사이 나는 왔던 길을 가리켰다. 70대에도 여전히 호기심이 많고 인간에 대한 경계심이 적은 그녀는 우리가 가지 않은 북쪽으로 갔다가 되돌아오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러나 '육체는 젊되 패기는 늙고 나약해져 버린 나'는 '이미 경험한 적이 있는 길' 즉, 안전한 길을 택했다. 그랬기에 우린 그녀의 영업장을 지나며 또 인사를 해야 했다. 어디에 말하기 뭣한 직업으로 생계를 해결하는 그녀 또한 우리가 보고자 한 것이 왜 '스카이다이빙 비행기 이착륙장'인 것을 공감할 것이다.

어쩌면 그녀도 몸으론 영업용 자세를 잡으며 우리가 지척에서 가리키는 것을 함께 바라봤을 수도 있다. 그녀 또한 우리처럼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 '내가 있던 곳을 바라보며' 때론 죽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하늘을 날아보고 싶지 않을까. 용기가 있다면 내가 선 곳을 벗어나고 싶을 수도 있겠지. 그랬기에 그녀는 되돌아가는 우릴 향해 더 방긋 웃어주었으리라. 아니면 말고.

돌아오던 길. 난 늘 가족에게 입버릇처럼 말하던 말이 생각났다.

"나는 이다음에 정말 깜찍하고 발랄한, 골 때리는 할머니가 될 거야."

오늘 하루를 보내며 '내가 바라는 70대 이상적 인간상'에 근접한 사람이 실비아임을 깨달았다. 사실 그런 캐릭터를 드라마나 책을 통해서 접한 적이 있지만 만나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녀와 함께 지낸 5일 동안 느낀 것은 그녀는 가족을 가슴 뜨겁게 사랑할 줄 알며 먼 나라에서 온 낯선 사람들인, 우리 가족에게도 한없는 사랑과 관심을 쏟을 줄 아는, 넓고 깊은 사랑을 가졌다. 늘 밝게 웃고 귀엽고, 전혀 예기치 않은 사건을 만들어 내고. 나도 그녀처럼 생기 넘치고 순수해지고 싶은데...

이미 난 너무 계산적이고 편견으로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기 힘든 지경인 것 같다. 내 영혼을 향해 이렇게 외치고 싶다.

'깨끗하게! 맑게! 자신 있게!'

소중한 추억을 간직한 채 이별을 맞았다. 이별이 아쉬워 서로의 물건을 나누고 흔적을 남겼다.
 소중한 추억을 간직한 채 이별을 맞았다. 이별이 아쉬워 서로의 물건을 나누고 흔적을 남겼다.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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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김준수 기자

덧붙이는 글 | 덧붙이는 글 | 2012년 맞벌이 엄마, 아빠, 5살, 7살 두 딸은 직장과 유치원을 쉬었습니다. 그리고 쉼(태국), 사랑(터키), 도전(유럽캠핑)을 주제로 5개월간 여행하였습니다. 본 여행 에세이는 그 중 도전을 주제로 한 유럽캠핑에 관한 글입니다.



태그:#리씨네 여행, #유럽캠핑, #스페인, #피게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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