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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토성역 전시 포스터
▲ MAGNUM'S FIRST 몽촌토성역 전시 포스터
ⓒ 정민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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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벽에 두 장의 사진이 걸려있다. 간디가 두 여성에 기대어 걷는 사진과 머리에 두건을 쓴 할머니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어딘가를 응시하는 사진. 그 사진 속 얼굴에 나타난 표정들이 선명해서 눈길을 끈다. 그 사진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8호선 몽촌토성역 2번 출구), 맞은편에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이 보이고, 앞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방금 본 간디 사진이 건물에 거대하게 걸려있다.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MAGNUM'S FIRST' 포스터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20층으로 올라가면 라운지가 있고 그 곳에서 표를 구입한 뒤 19층에서 매그넘 사진전을 감상하면 된다. 7월 18일. 남편과 함께 간 날엔 토요일이라 그런지 유모차를 끌고 온 가족들이 많았다. 우린 오후 4시 좀 넘어 표를 구매했는데, 거의 두 시간 정도 둘러보았다.

잉게 모라스의 사진을 감상 중인 관람객. 사진 가장자리에 보이는 상자가 이 사진들이 들어있던 나무 상자다.
▲ MAGNUM'S FIRST 잉게 모라스의 사진을 감상 중인 관람객. 사진 가장자리에 보이는 상자가 이 사진들이 들어있던 나무 상자다.
ⓒ 정민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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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들은 모두 1947년부터 1954년도까지 촬영된 작품으로 83점이 전시되어 있다. 아시아 첫 전시를 기념하여 도록에는 전시된 모든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고 하여 구입하여 읽었다. 사진 속에 담긴 내용들을 전시장 안에서 모두 소화하기는 힘드니, 여유가 된다면 도록을 구입하여 보길 권한다. 행간의 의미들을 알고, 세계사와 함께 촬영된 시기의 사진들을 보면, 왜 이 사진들의 전시 제목이 처음에 '시대의 얼굴'인지를 알 수 있다. 도록의 내용과 사진들은 사진전문미술관에서 발간한 책답게 정성이 가득하다.

'1955년 5월부터 1956년 2월까지 오스트리아 다섯 개 도시를 순회 전시한 후 반세기 동안 그 사진들은 잊혀졌고, 2006년 봄 어느 날 인스브루크 주재 프랑스문화원이 신관으로 이전을 하면서 지하 창고에서 아주 낡은 두 개의 나무 상자를 발견하였다. 그 안에는 매그넘의 초창기 회원 8명의 오리지널 흑백 프린트 83점과 전시포스터, 매그넘 명판, 전시 설치에 관한 설명서가 함께 담겨 있었다.' - 출처: 한미사진미술관

전시 사진들의 발견 이야기는 흥미진진했다. 신기한 것은 그 오랜 시간 동안, 곰팡이는 슬었지만, 사진이 훼손되지 않고 복원이 가능한 상태로 나무상자 속에서 존재했다는 것이다. 만일 이런 일이 대한민국에서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50년 동안이나 그 곳에 있었다는 것은 건물을 허물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고, 습기나 해충의 공격을 나름 견뎌냈다는 이야기인데... 우리나라 공공기관 건축 상태의 변화를 본다면,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을 것 같다. 반세기가 지나도 나무상자 속 물건들의 원형이 보존되는 건물을 짓는 나라라면, 적어도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장 마르키의 사진들을 감상 중인 관람객
▲ MAGNUM'S FIRST 장 마르키의 사진들을 감상 중인 관람객
ⓒ 정민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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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우리나란 1950년에서 1953년도까지 전쟁 중이었으니, 이 사진 속의 평화는 정말 남의 나라 이야기다. 사진을 찍은 연도와 장소가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어 세계사와 우리의 현대사를 생각하면서 들여다보았더니 생각할 거리가 많아 사진 한 장을 한참 보게 되었다.

특히 이번 매그넘 사진전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보라고 권하고 싶다. 천진난만한 아이를 클로즈업 해서 찍은 사진들은 저절로 웃음이 나오게 한다. 에리히 레싱의 사진들이 그렇고, 로버트 카파의 사진들이 그랬다.

에리히 레싱이 1954년에 촬영한 '오월제 행진'에는 아빠의 목말을 탄 아이의 등에 업힌 인형을 볼 수 있다. 행진을 바라보는 아이와 아빠의 집중한 얼굴과 무심한 듯 아이 등에 업혀 반대편을 바라보는 인형의 표정이 웃겨서 한참 보았다. 같은 해에 촬영한 '벨베데르 정원'의 사진에는 빵모자를 쓴 두 아이의 모습이 나오는데, 인형처럼 귀엽고, 그 시절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는 아이들의 복식을 알 수 있어서 재미있다.

'빈 소년 합창단' 사진도 있는데, 흐릿한 상태의 창 밖 사람들이 합창 중인 소년들을 보기 위해 목을 길게 빼고 있는 장면도 있다. 그 소년들의 합창 모습은 그 시절 그 지역 사람들에게도 관심거리였나 보다. '카를교회' 사진에는 한 발을 올려 타는 킥보드로 놀고 있는 소년의 모습도 있다.

Gansehaufel Resort on the old Danube, Vienna, Austria, 1954 ⓒErich Lessing/Magnum Photos
▲ Gansehaufel Resort on the old Danube, Gansehaufel Resort on the old Danube, Vienna, Austria, 1954 ⓒErich Lessing/Magnum Photos
ⓒ 한미사진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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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뉴브 강변에 위치한 간세호이펠 리조트' 사진에는 아빠가 담요를 들고 어린 아이를 바라보고, 옷을 모두 벗어버린 아이가 그런 아빠를 향해 턱을 들고 있는 뒷모습이 있다. 단지 사진 한 장인데, 내겐 마치 대화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빠: "너는 왜 그러고 다니니?"
아이: "뭘요?"

에리히 레싱의 사진 중에서 제일 맘에 드는 사진이다. 저 순간을 어떻게 포착했을까? 걱정스런 얼굴표정의 젊은 아빠와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운 아이의 뒷모습은 따뜻한 기운이 가득하다. 사진을 찍을 때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작품이다.

에리히 레싱의 약력을 읽어보니 그런 느낌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니었다. 전쟁터 속에서 염증을 느낀 그가 예술과 인문학으로 눈길을 돌린 해가 1950년대 중반이라고 하니, 전시된 작품들을 찍은 바로 그  시점이라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나 보다. 최민식 선생님의 아이들 얼굴 사진들과 느낌이 조금 비슷하다(차이는 궁핍함과 삶의 여유가 있는 표정 정도).

'그는 192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치과의사와 피아니스트의 아들로 태어났고, 1939년 고등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하자 이스라엘을 거쳐 영국령 플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어머니는 빈에 남아 아우슈비츠에서 숨을 거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군에 들어가 비행사, 사진사로도 활동했다. 1947년 다시 빈으로 돌아와 연합통신의 사진가로 일 하다가 1955년이 되어서야 매그넘의 정식회원이 될 수 있었다. 그는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변혁을 위한 대리인으로서의 포토저널리즘에 환멸을 느끼고, 예술, 인문학과 역사 분야로 눈을 돌렸으며 현재 빈에 거주하고 있다.' - 출처: 한미사진미술관 도록

Ferry from Split to Tragir, Dalmatia, 1951 ⓒMarc Riboud/Magnum Photos
▲ Ferry from Split to Tragir Ferry from Split to Tragir, Dalmatia, 1951 ⓒMarc Riboud/Magnum Photos
ⓒ 한미사진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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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서 유독 한 작품만 한쪽 벽 가운데를 차지하는 사진이 있다. 마크 리부의 '스플리트에서 트로기아까지의 여객선' 1951년도 작품이니까 유고슬라비아 시절인가 보다. 지금은 크로아티아인 나라(1918년 세계 제1차 대전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일부였다가, 1945년 세계 제2차 대전 이후에는 '유고슬라비아인민공화국'이었다가, 1991년에 독립하여 '크로아티아').

삶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사진에는 다른 설명이 없다. 그저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혼란한 시기를 살아내야 하는 어머니의 근심과 고난이 보인다. 불편한 여객선 나무판자 의자 위에 앉아 무슨 생각을 저리 하고 있을까?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크 리부는 1923년에 출생한 프랑스 리옹 사람이다. 그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그의 사진에는 노동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실 방적공 여인'의 얼굴은 영화배우 '올랜도 블룸'과 무척 닮아 보인다. 에리히 레싱의 따뜻함과는 다른 느낌이 마크 리부에게 있다.

마크 리부는 독립운동가라서 그런지 그의 사진 속에서는 강인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삶을 지속시켜 나가는 어떤 씩씩한 힘을 사진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싶었다. 슬프고 힘들고 고단하고 괴로워도 살아가야만 하는 결연함이 보이기도 하고.

8명의 작가 중 가장 적은 작품이 전시 중인 로버트 카파. 세 작품이 걸려 있다. 191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1954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사망한 로버트 카파. 스페인 내전 중에 사망한 연인 게르다 타로와의 사랑. 잉그리드 버그만의 구애를 물리치고 전쟁터에서 살며 사진을 찍다가 지뢰를 밟고 사망을 했지만, 그 역시 따뜻하고 포근한 눈으로 사진 촬영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MAGNUM'S FIRST 포스터-로버트 카파의 마을축제
▲ MAGNUM'S FIRST 포스터 MAGNUM'S FIRST 포스터-로버트 카파의 마을축제
ⓒ 정민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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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입구에 들어서면 관객들을 반겨주는 사진이 한 장 있다. 어린 소녀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한 쪽 무릎을 세운 상태로 앉아있는 모습. 1951년에 프랑스 바스크 지방의 마을 축제에서 찍었나 보다. 그 소녀를 보는 순간 마음이 사르르 녹는다. 카파의 사진은 세 점이 주르륵 한 쪽 벽에 걸려있다. 순서대로 찍었는지는 카파만이 알겠지만, 나는 왼쪽부터 사진의 흐름을 만들어보았다.

듬직한 몸집의 요리사 아저씨가 음식이 가득 든 쟁반을 머리에 이고서 입에는 호루라기 같은 것을 물고 춤을 추고 있다. 그 옆에서는 어른들과 함께 춤을 추는 소녀가 폴짝 뛰어 뱅그르르 도는 상태를, 낮은 담 위에 참새처럼 모여 앉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 춤추던 소녀가 낮은 담 위에 앉은 사람들 앞으로 가서 한쪽 무릎을 세우고 두 팔을 활짝 벌려 로버트 카파를 바라보며 웃는다. 꼬맹이의 앙증맞은 웃음과 담 위에 걸터앉은 소년들의 쑥스러운 웃음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마을 축제가 끝난 후 모두 함께 웃었을 것 같다.

로버트 카파의 마을 축제 연작 세 점
▲ MAGNUM'S FIRST 로버트 카파의 마을 축제 연작 세 점
ⓒ 정민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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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도 작은 단 세 점의 사진이었지만, 내 마음 속에 오래 남은 사진들이다. 6000원의 입장료를 내고 감상하기에는 좀 미안한 전시회. 사진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잘 들을 수 있다면 평생 기억에 남을 전시임에 틀림없다. 8명(로버트 카파, 에리히 레싱, 베르너 비쇼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에른스트 하스, 장 마르키, 마크 리부, 잉게 모라스)의 사진들이 연작으로 걸려있다. 특히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간디 관련 사진은 간디의 마지막을 촬영한 유일한 사진이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보고 오길 바란다. 8월 15일까지 날짜가 넉넉하게 남아 있다.


태그:#한미사진미술관, #MAGNUM'S FIRST, #로버트 카파,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에리히 레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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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위생사 . 구강건강교육 하는 치과위생사. 이웃들 이야기와 아이들 학교 교육, 책, 영화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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