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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치킨집이 있다. 깨끗한 기름에 좋은 닭을 쓰는데, 다른 가게보다 치킨 가격이 저렴하다. 치킨을 시키지 않아도 머물 수 있고, 갈 곳 없는 밴드 동아리를 위한 무대도 준비되어있다. 어떤 날엔 치킨집이 홍대 클럽처럼 변하기도 한다. 게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시급은 1만 원이다. 최근 마무리된 최저임금위원회에서 노동계가 원하던 액수, 바로 그 1만 원(2016년 최저임금 6030원)이다.

이 정도면 그야말로 전지전능한 '치느님'이다. 아쉽게도 아직 이런 치킨집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곧 생길지도 모른다. '관악치킨협동조합'이 만들어 갈 치킨집의 '이상향'이 위와 같기 때문이다.

관악치킨협동조합은 서울대 학생들의 출자로 자본금을 모아 치킨집을 운영하는 소비자협동조합이다. 학생들에게 질 좋은 치킨을 저렴하게 공급하고, 이윤이 남으면 학생 사회에 재투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정확히 말하면, 관악치킨협동조합은 아직 '준비단계'다. 8월 즈음, 협동조합 인가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현재 15명의 서울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관악치킨협동조합을 처음으로 구상한 것은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황재림(23)씨다. 지난 24일, 서울시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황씨와 마주 앉았다. 황씨가 이 '이상적인' 치킨집을 꿈꾸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서울대에서도 맛있는 치킨을 먹고 싶었단다.

장난삼아 생각한 치킨집, '관악치킨협동조합'

'관악치킨협동조합' 제안자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 황재림씨
▲ '관악치킨협동조합' 제안자 황재림씨 '관악치킨협동조합' 제안자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 황재림씨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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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학교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치킨 시켜 먹은 적이 있는데, 되게 맛있더라고요. 서울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치킨이었어요. 그래서 같이 간 서울대 친구들이랑 이야기해봤는데, '진짜로 이 가게를 차리면 무조건 대박 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협동조합 생각도 못 해봤죠."

장난삼아 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니, 점점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졌다. 맛있는 치킨을 공급하면서도, '일반적이지 않은' 치킨집을 만들고 싶었다. 서울대 학생들이 돈을 모아 치킨집을 차리고, 수익금은 배분하는 방법을 구상했다. 그러다 '협동조합 형태의 치킨집'을 생각해냈다. 개인 SNS에 '관악치킨협동조합' 구상안을 올렸다. 관심 있게 지켜보던 중소 치킨 프랜차이즈 업체에도 창업을 문의했다. 반응이 좋았다.

"'관악치킨협동조합 운영을 도와주고 싶다, 재밌을 거 같다' 이런 분들도 많았어요. 그분들이랑 연락하면서 사업을 구체화했어요. 그러다 창업 문의를 넣었던 업체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어요."

황씨는 관악치킨협동조합을 통해 재미와 공동체,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었다. 단순한 열정이나 '헝그리 정신'만 있다면 사업이 오래 갈 것 같지 않았다. 또 운영 업무에 매몰돼 희생되는 사람이 없길 바랐다. 무엇보다 지속 가능한 협동조합을 원했다.

"대학생 학부생들이 일주일 동안 풀타임으로 일을 할 수는 없거든요.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나 생각했어요. 대학 4년 동안 동아리나 학생회 같은 '학생 사회'가 빠르게 무너져 가는 것을 지켜봤어요. 그 이유는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운영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걸 보면서 만약 누군가가 한 학기 또는 1년을 송두리째 바쳐야 조합이 운영될 수 있는 체제로 시작된다면, '이건 내가 졸업하고 나면 없어지겠구나',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학생들 손으로 모든 것을 해내겠다는 욕심을 버렸다. 그러면서도 치킨집의 경쟁력과 협동조합의 공동체적 가치를 모두 살렸다. 관악치킨협동조합은 브랜드 사용료를 받지 않고, 치킨의 맛이 보장되는 한 중소 치킨 프랜차이즈 업체와 손을 잡았다.

또 관악구에 있는 기존 치킨집과 상생할 방안도 고민했다. 공격적인 마케팅을 하지 않고, 매장 운영 초기에는 조합원에 한정해 치킨을 판매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매장 관리인은 서울대의 법인화 과정에서 해고당한 비정규직 노동자를 우선으로 채용할 생각이다. 

"저희는 일정 수준의 이윤이 보장돼서 조합원 할인을 해주고, 저희가 원하는 수준의 학생 복지사업을 하고, 남는 이익은 출자자들에게 배당을 해주면 돈을 더 벌 이유가 없거든요. 자본주의의 문제로 지적된 게 무분별하고 멈추지 않는 성장을 추구하는 거잖아요. 그것의 부작용이 탐욕이고요. 애초에 협동조합의 취지가 이런 것에 대한 대안이니까, 저희는 그런 방향으로 가지 않을 거예요."

'헝그리 정신' 대신, 공동체의 가치를 추구하다

관악치킨협동조합이 꿈꾸는 치킨집
 관악치킨협동조합이 꿈꾸는 치킨집
ⓒ 관악치킨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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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관악치킨협동조합이 가야 할 길은 아직 많이 남아있다. 서울대입구역에 홀이 있는 치킨집을 내기 위해선 자본금 1억 원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모인 출자금은 300만 원정도. 황 씨는 "지금쯤이면 1억을 모으고 치킨을 튀기고 있을 줄 알았다"면서도, "아직은 성공이나 실패를 판단할 시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학교 축제 기간 등을 활용해 관악치킨협동조합을 홍보하고 출자자를 모을 생각이다.

"재밌어요. 가슴 뛰는 일이니까요. 만에 하나 실패한다고 해도 저나 팀원들에겐 재밌는 경험이고, 추억으로 남을 거예요. 그리고 학생들 중에 아쉬워하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언젠가 또 다른 제가 나와서 할 수 있는 거고요."

협동조합 설립을 위한 과정은 아직 더디지만, 학생들은 꾸준히 관악치킨협동조합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저렴한 치킨 값보다, 관악치킨협동조합이 구현할 공동체적 가치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본질적으로 공동체에 대한 가치나 선의는 누구나 가지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 거를 제대로 자극할 자극제가 없었을 뿐이죠. 저는 치킨이라는 걸 가지고 그런 선의를 건드리고 싶은 거예요."

협동조합은 출자액과 상관없이 조합원 모두 사업에 대한 의견을 제시할 수 있고, 동일한 의결권을 가진다. 치킨집 운영을 통해 얻은 수익으로 서울대 학생 식당에 지원금을 보태 반값 학식을 만들 수도 있고, 학교 셔틀버스가 언제 도착하는지 알리는 전광판을 설치할 수도 있다. 정해진 것은 없다. 상상하는 것이 있다면, 조합원들과 합의를 통해 실현하면 된다.

"청년들을 표현하는 '삼포세대', 이런 말이 많잖아요.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서울대학교 학생들도 마찬가지예요. 느끼는 절망의 크기나 그런 건 다르지 않거든요. 왜 그런 말들이 나오는지 생각해보면, 청년세대는 뭔가 성공시켜본 적이 없잖아요. 그런데 1억이라는 큰돈을 십시일반으로 모으는 데 성공한다면, 그 경험 자체가 큰 자산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사람들이 각자 출자금 10만 원을 내는 게 '1억을 모아 건물을 짓자', 이런 게 아니라 '공동체'라는 가치를 생각하고 내는 거잖아요."

황씨는 관악치킨협동조합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 '왜 관악치킨협동조합인가?'라는 글을 올리며 세 가지 키워드를 꼽았다. 치킨, 공동체, 공간이다. 함께 '부대낄 수 있는' 공간에서 맛있는 치킨을 먹으며 서울대라는 더 큰 공동체에 보탬이 되는 방안을 고민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가 꼽은 키워드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되길 기대한다. 치킨, 공동체, 공간 그리고 '성공적'.

서울대 로고에서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뜻의 'VERITAS LUX MEA'을 '치킨은 나의 빛'이라는 뜻의 'CHICKEN LUX MEA'로 바꾼 관악치킨협동조합 로고
▲ '치킨은 나의 빛' 서울대 로고에서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뜻의 'VERITAS LUX MEA'을 '치킨은 나의 빛'이라는 뜻의 'CHICKEN LUX MEA'로 바꾼 관악치킨협동조합 로고
ⓒ 관악치킨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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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최은경 기자

덧붙이는 글 | 김예지 기자는 오마이뉴스 22기 대학생 인턴기자입니다.



태그:#관악치킨협동조합, #관치협, #황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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