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일주일 따라 다녀보면 어떨까', 이 질문으로부터 '팔로우'는 시작됐습니다. 이왕이면 평소 관심 있게 지켜보던 남자 연예인을 뒤쫓고 싶은 바람이 개인적으로 없지 않지만, 코너 이름이 '스토커'로 변질되는 일이 없도록 사람, 사물, 현상을 가리지 않고 '팔로우'하겠습니다. [편집자말]

 일리야 벨라코프

일리야 벨라코프 ⓒ 이희훈


혼자 사는 30대 남자의 자취방에 들어서기 전, 설렘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예의 그, 외로움을 상징하는 냄새와 먼지를 맞닥뜨리게 될까 봐서다. 그런데 문이 열리고 우리를 맞이한 건, 놀랍게도 향기였다. 비록 급하게 향수를 뿌린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머리카락 한 올 떨어져 있지 않은(금발이라는 게 함정) 방이 지나치게 깔끔해서 누굴 걱정할 처지가 아닌 나 자신의 방을 돌아보게 했다.

 일리야의 자취방

일리야의 자취방 ⓒ 이희훈


JTBC <비정상회담>에서 차분하면서도 명확하게 생각을 전했던 러시아인 일리야 벨랴코프(33)의 방답다. 꼭 필요한 것만 있다.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가구는 책장과 책상, 냉장고 정도. TV는 벽에 매달려 있고, 침대도 없다. "아니, 왜 베개가 두 개죠?"라고 '숨은 여친설'을 제기해 볼 여지도 주지 않는 이부자리가 딱 한 사람의 몸을 뉘일 만한 너비로 칼같이 접혀 있다. 러시아에서는 침대 생활을 했지만, 이제는 방바닥이 편하단다. 불려놓은 밥통을 보고 집에서 밥을 해 먹는지 물으니, 당연한 거 아니냐며 주부의 표정을 짓는 남자. 서울살이 12년째인 일리야를 지난 17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집에서 만났다.

'비정상' 명퇴 후 새 일자리, 첫 출근이다!

 일리야 벨라코프

비정상회담 후 처음으로 출연하는 생방송에 출연하기 위해 집을 나서고 있다. ⓒ 이희훈


 일리야 벨라코프

일리야는 평상시 처럼 집을 나섰다. ⓒ 이희훈


<비정상회담>에서 시대를 거스르는 나팔바지와 체크셔츠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드러내 '패션 테러리스트'로 떠올랐던 일리야가 어떤 옷으로 웃음을 선사할지 내심 기대했는데, 너무나 멀쩡(?)한 차림이다. 이제야 털어놓는 사실이지만, "예능을 위해 작가님들이 만들어 준 설정이었다"며 "(방송에 입고 나왔던) 나팔바지는, 아는 사람의 친구의 아는 사람이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는데, 그분을 통해 어렵게 구했다"고 했다. 

일리야는 지난달 29일 방송을 끝으로 <비정상회담>에서 하차했다. 올 1월 새 멤버로 합류했으니 6개월 만이다. 외국인 대상 한국어능력시험 최고 등급인 6급의 일리야는 '토론왕'으로 불리는 미국 비정상 타일러에 대적할 수 있는 맞수였기에, 하차 소식에 아쉬움을 넘어 불만을 토로하는 시청자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러시아라는 국가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리야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도 아직 남아있을 것 같았다.

'비정상'으로서는 명예퇴직했지만, 다행히 또 다른 일자리가 생겼다. KBS 쿨FM <정재형 문희준의 즐거운 생활> 속 일요일 코너 '다국적 연애'와 1라디오 <월드 투데이>의 금요일 코너 '글로벌 토크박스'에 고정으로 출연 중이다. 또 일주일에 3일은 강남의 한 학원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고 있다.

여기에 새로운 일이 하나 더 들어왔다. YTN <국민신문고> 글로벌평가단. 매주 고정패널은 아니지만, 잘하면 한 달에 한두 번씩 출연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작가에게 들었다. 그 중요한 첫 출근길을 함께 따라가 보기로 했다. 남산타워를 바라보며 빨래를 널을 수 있는 전망 좋은 방의 월세를 내려면 열심히 벌어야 한다. 무브 무브!

'서울통' 일리야 "한남대교로 가면 빠르잖아"

 일리야 벨라코프

<비정상회담>에 함께 출여한 로빈 데이아나(프랑스) ,줄리안 퀸타르트(벨기에), 일리야 벨랴코프(러시아),블레어 윌리엄스(호주) ,테라다 타쿠야(일본)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 이희훈


 일리야 벨라코프

<비정상회담>에 함께 출연했던 동료들을 방문하기전 편의점을 들러 간식 거리를 고르고 있는 일리야. ⓒ 이희훈


 일리야 벨라코프

로빈 데이아나가 간식을 사들고 방문한 일리야에게 "형님"이라고 하며 '한국식'이라며 허리를 90도 숙여 인사를 하고 있다. ⓒ 이희훈


 일리야 벨라코프

촬영장에서 만난 타쿠야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있다. ⓒ 이희훈


 일리야 벨라코프

촬영에 들어간 동료들을 바라보고 있다. ⓒ 이희훈


일터로 가기 전, 강남구 신사동으로 향했다. <비정상회담>에 함께 출연했던 줄리안, 로빈, 타쿠야, 블레어가 여성용품 광고 촬영을 하고 있어 응원 차 들르기로 했다. 달콤하고 귀여운 네 남자와는 다른 매력의 차가운 도시 남자 일리야에게 어떤 광고모델 제안이 들어오길 바라는지 물으니 "프라*나 구* 같은 브랜드가 좋지 않겠나"라고 답했다. 문득 나팔바지와 체크셔츠가 떠올라 주춤했지만, "명품 모델이 되면 우리를 모른 척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이태원에서 신사동으로 넘어가는 길이 막혔다. 매니저가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대로 직진하자, 일리야가 "오른쪽으로 가서 한남대교 건너면 바로 신사인데..."라고 조언했다. 물론 처음부터 서울 지리가 훤했던 건 아니다.

러시아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던 2003년 코리아 파운데이션(한국국제교류재단) 장학생으로 뽑혀 연세대학교 어학당에 다니게 된 일리야는 한국에 온 첫 주부터 난관에 봉착했었다. 시청에서 신촌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내리지 못한 것. 심야라 다른 승객이 없었기에, 운전기사는 "연세대, 가야 합니다" 정도를 겨우 말할 수 있었던 일리야를 학교 정문까지 데려다줬다고 한다. 이는 일리야가 기자로 있었던 국제학생잡지 <서울리즘>에 '나와 한국의 감동적인 만남'으로 기록돼 있다.

- 지난해 초 <서울리즘>에 '한국 사람들 대부분은 백인인 외국인을 보면 미국인이라고 생각한다'고 토로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비정상회담> 출연 이후엔 미국인이냐고 묻는 사람이 없겠다.
"<비정상회담> 덕분에 알아보는 분들이 많기도 하지만, 10년 전에 비하면 외국인에 대한 인식 자체가 굉장히 많이 달라진 걸 느낀다. <미녀들의 수다>가 엄청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외국인들이 한국말로 토론할 수 있다는 인식이 그 프로그램에서 생겨났다. 그전에는 원숭이로 봤다. <비정상회담>은 (토론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다양한 나라에 대해 알리고 외국인에 대한 이미지를 좋아지게 만들었다. 지금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에서 사회언어학 박사과정을 잠시 쉬고 있는데, '한국 TV에서의 외국인 이미지' 특히 <비정상회담>에 대해서 논문을 쓰고 싶다."

"한국 사람들은 왜 그래?"

 일리야 벨라코프

신사동을 향하는 길 일리야는 "요즘 한국을 보면 놀라운 게, <개그콘서트> 같은 프로그램에 대통령에 대한 농담이 하나도 없다. 모든 한국 사람이 대통령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명 한명 만나서 물어보면 그렇지 않더라. 그걸 왜 표현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라고 말했다. ⓒ 이희훈


- <비정상회담>에서 러시아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
"한국에서 10년 넘게 살며 수많은 한국 사람을 만났는데, 러시아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해 선입견을 많이 갖고 있었다. 그걸 깨고 싶었다. '러시아는 춥다' '모두가 보드카를 마신다' '길가에 곰이 돌아다닌다' 등등. 한 번은 5월 말 모스크바로 출장을 간다는 분이 걱정하며 내게 이렇게 물었다. 다시 말하지만 '5월'이었다. '지금 모스크바에 눈이 몇 미터 쌓였을까?' 눈이 왔느냐는 게 아니라 심지어 몇 미터가 쌓였냐니! '러시아에서는 아기한테 보드카를 몇 살부터 줘요?'라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어떻게 답을 해야 하는지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소련이 붕괴된 후 1990년대엔 러시아가 못 살았다.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혼란기여서 범죄율이 엄청 높았다. 러시아 극동 쪽에 살던 아가씨들이 성매매 목적으로 한국에 돈 벌러 오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러시아 여자들을 보면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선입견을 가지게 됐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이미지가 많이 좋아졌다. 한국으로 오는 러시아인들은 대개 유학생이나 교수, 엔지니어다. 예전에는 미국인이 아닌 러시아인이라고 하면 눈빛이 달라졌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 개인적인 발언이 러시아를 대표하는 것처럼 비칠까 부담스럽진 않았나?
"1억4천만 명이 사는 곳을 내가 대표할 수는 없다.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다. 그런데 푸틴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개인적인 의견보다는 (리더로서 못한 일보다 잘한 일이 많다고) 나라의 입장을 들었다. 나는 푸틴을 지지하는 편은 아니지만, 러시아에 대한 정보가 왜곡돼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외부에서는 푸틴이 독재자처럼 언론을 통제하고 모든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 미국 뉴스, 러시아 뉴스, 한국 뉴스를 접해 보면 정보가 어떻게 잘못 전달되는지 보인다."

- 그럼 러시아에서는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자유로운 편인가?
"자유롭다. 러시아는 반 푸틴, 친 푸틴 방송이 따로 있어 골라 보면 된다. 반 푸틴 방송에서는 심지어 '푸틴이 돈을 훔쳤다' '시계가 몇억 짜리다' 같은 이야기도 하는데, 푸틴이 그걸 막지는 않는다. 요즘 한국을 보면 놀라운 게, <개그콘서트> 같은 프로그램에 대통령에 대한 농담이 하나도 없다. 모든 한국 사람이 대통령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명 한 명 만나서 물어보면 그렇지 않더라. 그걸 왜 표현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 2편으로 이어집니다.


○ 편집ㅣ이정환 기자


일리야 비정상회담 러시아 푸틴 외국인
댓글26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