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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은 부모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상대대로 내려온 유전인자를 포함한 가정 환경, 지역 환경, 어린 시절의 경험, 친구, 1년 간의 배낭 여행, 첫 사랑, 이별, 결혼, 아이의 탄생 등등 이 모든 것들의 영향 아래에서 비로소 한 사람은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한 사람은 또한 다른 사람의 삶에도 작거나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이렇듯 유기적으로 얽히고 설켜 있다. 어느 누구도 하늘에서 뚝 떨어져 지금의 모습에 이른 것은 아닌 것이다.

혁신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아이디어가 혁신을 가져오진 않는다. 혁신이 가능하기 위해선 오랜 시간에 걸쳐 다져진 혁신을 촉발할 환경이 필요하다. 여기서 환경이란 과거에 이루어진 혁신들의 결과물일 수도 있고, 혁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 시대의 분위기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 아무리 스티브 잡스라도 10년만 일찍 태어났다면 아이폰을 만들 수는 없었다.

토마스 에디슨의 전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단단히 다져진 환경이 없었더라면 에디슨은 전구를 세상에 내놓을 수 없었다. 인류가 불이라는 개념을 알게 된 후 엄청나게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우리는 인공조명을 만들 수 있었다. 수지양초에서 시작해 향유고래의 경뇌유양초를 거처 석유램프에 이르기까지의 기간 동안 우리 인류는 빛을 향한 도전을 계속해왔다. 이런 도전이 없었더라면 에디슨도 전구에 빛을 밝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 전구는 에디슨에 의해 처음 발명된 것도 아니었다. 많이 알려진 것처럼 전구는 어느 젊은 발명가의 '순간적인 영감'에 의해 잉태된 것이 아니라, '혁신의 네트워크 시스템' 안에서 빛을 보게 된 경우였다.

1879년 에디슨이 '전등'에 대한 특허를 신청하기 훨씬 전부터 많은 사람들은 이미 백열광을 발명해왔다. 1802년 영국의 화학자 험프리 데이비는 백금 필라멘트를 이용해 수 분 동안 타오르는 전구를 만들었고, 1841년에는 영국인 프레데릭 데 몰린스가 최초로 백열등 특허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의 전구에는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불빛을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해 낸 사람이 바로 토마스 에디슨이다. 필라멘트 재료를 대나무로 하면 불빛이 오래 지속 된다는 것을 에디슨과 그의 직장동료들이 밝혀냈다. 이후 에디슨은 기존의 전구를 '개량'해 특허를 진행했고 이 덕분에 우리는 밤에도 책을 읽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 수 있게 되었다.

과학 저술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스티븐 존슨의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인접가능성'이었다. 어떤 탁월한 아이디어는 단독적으로 나오기 보다는 시대적으로, 또는 지역적으로 인접해 있던 또 다른 아이디어에 영향을 받아 혁신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책에서 보다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저자의 아래 문장을 통해 드러나고 있었다. 저자는 말한다.

혁신, 예상치 못한 변화까지 끌어낸다

혁신은 일반적으로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지만, 그 혁신이 사회에 확산되기 시작하면 결국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까지 끌어내게 된다. – 본문 중에서

토마스 에디슨의 전구와 비슷한 시기에 발명된 독일 과학자 아돌프 미테와 요하네스 개디케의 '플래시 빛'도 위에 해당하는 하나의 예다. 마그네슘 가루와 염화칼륨을 혼합해 만든 '플래시 빛'은 짧은 찰나에 섬광 같이 강력한 빛을 뿜었는데, 이는 발명가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방향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 어둠에 갇혀 있던 세상의 일면이 '플래시 빛'의 도움을 받은 사진을 통해 전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게 된 거였다.

'플래시 빛'이 발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회개혁가 제이컵 리스는 곧바로 어두운 사회 구석구석에 사진기를 들이대기 시작했고, 1901년 뉴욕 주에서 공동주택법을 제정한 것을 시작으로 공동주택의 불결한 환경을 개선할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공장 작업 현장의 근로 조건 개선 등을 포함한 이후 리스의 사회개혁운동도 '플래시 빛'을 활용한 사진 폭로와 함께 계속 이어졌고, 사진을 이용한 이와 같은 사회개혁은 지금까지도 널리 큰 효과를 보고 있다.

새로운 유형의 사회개혁이 기존의 사회개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빛에서 비롯되었다는 이러한 이야기는 일면 모든 사건을 너무 광범위하게 해석하려 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지만, 저자인 스티븐 존슨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다층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우리 인간의 기대와 예상을 뛰어넘는 수많은 장소에서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의미심장한 변화가 수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이다.

하수처리시스템과 비키니의 연관성

이렇게 말하는 저자가 쓴 이 책 속 혁신들이 서로서로 이어지는 과정은 정말로 그 자체로 혁신적이었다. 과연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하수처리시스템과 비키니, 인쇄술과 우주과학, 제빙기술과 말라리아치료, 라디오와 자유가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책에는 이런 혁신적인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지금 우리 일상에 가장 밀접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유리, 냉기, 소리, 청결, 시간, 빛이 어떻게 발견 되었는지를 시작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진화했으며, 또 어떤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아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책에서는 보여주고 있었다.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이렇다.

유리의 발견은 우리 인류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유리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아름다운 유리잔과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볼 수 없었음은 물론이고, 렌즈가 발명되지 못해 현미경과 망원경은 구경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미경이 발명되지 않았으면 세포와 바이러스, 박테리아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것이고, DNA연구가 불가능해져 유전학이란 학문도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망원경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거대 우주에서의 우리 지구의 위치, 우리 인간의 위치도 짐작만 할 뿐이었을 테다.

무엇보다 내가 '나'라는 인식이 불가능해졌을 수도 있다. 거울이 없는 세상을 살아야 했을 테니까. 거울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겉모습을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내면 또한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거울을 통해 비로소 우리 자신을 한 명의 개인으로 인식할 수 있었고 이러한 인식은 자아성찰로까지 이어졌다.

얼음의 발전은 정치판까지 바꿔났다. 먼저, 자연에서만 얻어지던 얼음을 직접 만들 수 있게 되면서 수많은 환자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얼음이 환자의 열을 내려주었기 때문이다. 이후 얼음제빙기를 활용한 냉동식품이 출연했고 에어컨이 발명되었으며, 특히 에어컨은 인구 분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더운 지역을 기피하던 사람들이 에어컨을 싣고 남부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경우 에어컨으로 인한 인구 이동의 결과로 민주당의 텃밭이던 남부가 서서히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가 대통령 선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소리의 발전은 또 어떤가. 소리를 받고 보낼 수 있게 되면서 자유와 예술이 꽃폈고, 이후 초음파가 별명 돼 태아의 건강 상태와 성별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물이 깨끗해지고 쓰레기 처리 문제가 해결되면서 기대수명과 한 도시에서 최대로 수용할 수 있는 인구가 늘어났고 전염병 발병률도 낮아졌다. 또한 물이 깨끗해지자 곳곳에 수영장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수영장이 대세로 떠오르자 여자들의 수영복이 달라졌다. 온몸을 꽁꽁 가리던 수영복이 차차 변해 원피스, 투피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키니가 뒤를 이었다.

세상이 청결상태를 통제할 수 있게 되자 발명된 것 중 하나가 지금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컴퓨터칩이다. 컴퓨터칩이 만들어지는 곳은 티끌 하나도 용납하지 않을 만큼 지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 중 하나이다.

시간을 측정할 수 있게 됨으로써 산업혁명을 앞당길 수 있었다. 해시계에서 진자시계를 넘어 수정시계가 발명되자 컴퓨터의 발명도 가능해졌다. 이후 수정시계보다 더 정밀한 원자시계가 발명되면서 우리는 매 순간의 우리 위치를 위성에서 쏘아주는 GPS를 통해 전달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인공 빛의 발명은 비단 토마스 에디슨이라는 천재의 성공과 사회개혁에만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네온 사인이 없는 라스베이거스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바코드 또한 새로운 유형의 빛을 통해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 바코드가 널리 사용되면서 물류처리가 용이해졌고 이는 거대한 마트의 출연을 가능하게 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역사를 '롱 줌long zoom'역사라고 말했다. 롱 줌 역사란, 역사를 개인이나 국가의 차원에서 기술하는 것이 아닌, 원자적 차원에서, 전 지구적 차원에서, 또는 그 사이의 모든 차원에서 기술하는 방식을 말한다.

저자는 본인이 이런 식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이유는 사회의 변화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언제나 인간의 힘이나 의사결정에 의해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 의도치 않게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우리 인간이 조금은 겸손해 질 필요가 있다는 말일까.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세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해준다는 이유만으로도 역사는 다시 쓰일 만하다. – 본문 중에서

저자에 의해 다시 쓰인 역사는 매우 흥미로웠고, 또 설득력이 있었다. 세상은 그의 말대로 이렇게나 우연에 의해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우연을 가능하게 한 것도 결국은 호기심 가득한 인간들이지 않았나. 우리는 겸손해짐과 동시에, 조금은 자신감을 가져도 될 것 같다. 집요한 보통의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지금까지의 모든 혁신은 불가능했을 테니까.

덧붙이는 글 |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스티븐 존슨/프런티어/2015년 06월 19일/1만6천원)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 오늘날의 세상을 만든 6가지 혁신

스티븐 존슨 지음, 강주헌 옮김, 프런티어(2015)


태그:#스티븐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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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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