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좋았다. 사실 그 말로는 부족했다. 일주일에 극장을 네다섯 번은 가고 회고전이 열리면 하루에 영화를 세 편씩 연달아 보고 영화제를 하는 기간에는 출퇴근하다시피 했으니까. 하지만 영화로 뭔가 이루고자 하는 건 없었다. 그야말로 취미였다. 조금 더 극성스럽게 매달린 취미. 내가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를 아직도 뚜렷이 기억한다.

추억의 시그널이 울려 퍼지며 시작되던 <주말의 명화>를 보면서부터였다. 아홉 시였던 취침시간은 그 프로그램 끝날 때까지 자동으로 연장되었다. <주말의 명화>를 통해 나는 볼 생각이 전혀 없었던, 혹은 알지도 못했던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멜 깁슨의 <전선 위의 참새>나 수작이라고 일컬어지지만 알려지지 않은 <12명의 성난 사람들>이라는 작품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주말의 명화> 덕에 시작된 영화와의 인연

 구석에 쌓아둔 비디오들. 몇 번이고 버리려고 했다.

구석에 쌓아둔 비디오들. 몇 번이고 버리려고 했다. ⓒ 최하나


내가 영화를 좋아하던 때에는 크고 작은 영상회가 열렸다. 음료수 한 잔을 옆에 두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한 데 모여 비디오를 함께 보고 이야기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방학이 되면 친구들과 좋아하는 영화를 함께 고르고 대여섯 편을 밤새 함께 봤다. 이 친구의 집, 저 친구의 집을 돌아가면 말이다.

내가 모르는 영화도 기꺼이 볼 준비가 되어있던 그때. 끼니를 거르고서라도 영화를 볼 준비가 되어있던 그때. 함께 영화를 보고 이야기하는 게 당연했던 그때를 백영옥 소설가도 에세이를 통해 회고한 바 있다.

하지만 영화를 누구나 손쉽게 다운받아 볼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혹은 영화 말고도 시간을 보낼만한 게 많아진 시대가 되면서 '낯선 영화를 함께 보고 이야기하는 시대'는 사라져버렸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나 또한 그랬다.

자주 가던 씨네큐브와 하이퍼텍나다를 언젠가부터 멀리했고 심지어 멀티플렉스 영화관조차 찾지 않았다. 정성일 평론가의 책 제목처럼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세상의 모든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성인이 되길 기다렸던 나도 변했다.

그래도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심심찮게 들려오는 예술영화전용관의 폐업 소식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래서 하나씩 찾아가 보기로 했다. 표면적으로 문을 닫기 전에 혹은 나 한 명이라도 문을 닫지 않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어쨌든 나는 영화를 함께 보고 싶었다.

시네마천국을 떠올리게 하는 신기한 예술영화관

 대전을 지키고있는 터줏대감 '대전아트시네마'

대전을 지키고있는 터줏대감 '대전아트시네마' ⓒ 최하나


사실 예술영화전용관은 서울에서도 살아남기 힘들다. 씨네필들이 점차 사라지고 집에서 영화를 보고 멀티플렉스에도 예술영화상영관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울도 아닌 대전에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해온 예술영화전용관이 있단다.

대전에는 세 번 갔으면서도 그전까지는 몰랐다. 중앙로역에서 대전역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면 대로변 3층에 자리 잡고 있는 대전아트시네마가 그 주인공이다.

 영화관을 지키는 고양이. 너무 조용하고 얌전해서 처음에는 인형인 줄 알았다.

영화관을 지키는 고양이. 너무 조용하고 얌전해서 처음에는 인형인 줄 알았다. ⓒ 최하나


깔끔하고 쾌적한 시설과 분위기를 원한다면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오래된 건물에 예전 느낌이 많이 나는 내부구조 때문이다. 하지만 푸근하고 따뜻하다. 고양이가 주인행세를 하는 영화관이라니.

상영 중인 영화소리가 들리는 영화관이라니. 영화표 대신에 쿠폰을 주는 영화관이라니. 대기 공간 한쪽 벽장에는 만화책들이 꽂혀있는데 그냥 지나치려다가 보니, 명작들이 엄선되어있다. 기다리면서 한 권씩 꺼내보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특별전도 기획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특별전도 기획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 최하나


 바나나피쉬와 몬스터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만화책들도 있다.

바나나피쉬와 몬스터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만화책들도 있다. ⓒ 최하나


다행히 내가 방문한 날 관람한 회차에는 열 명 남짓한 관객들이 있었다. 하지만 예술영화전용관의 명맥을 잇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대전에 뿌리내린 이 영화관은 수 년 동안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왔다. 하지만 운영주체의 힘으로만은 변해가는 시대에 맞춰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좀 더 많은 관심이 있다면 '언젠가 세상이 영화가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아지트가 오랫동안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대전아트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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