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삼릉 쪽에서 바라본 경애왕릉. 포석정에 머물고 있던 왕은 927년 견훤의 기습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따라서 경애왕릉과 포석정은 후삼국 유적지라 할 만하다.
 삼릉 쪽에서 바라본 경애왕릉. 포석정에 머물고 있던 왕은 927년 견훤의 기습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따라서 경애왕릉과 포석정은 후삼국 유적지라 할 만하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927년 가을, 견훤은 서라벌을 습격한다. 견훤의 군사가 코앞까지 들이닥친 줄도 모른 채 포석정에 머물고 있던 경애왕은 결국 잡혀서 죽임을 당한다. 따라서 포석정과 경애왕릉은 대구 경북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표적인 후삼국 유적 중 한 곳이다. 둘 다 서남산에 있다.

견훤이 충청 남부와 곡창 전라 지역을 차지한 뒤 완산주(전주)에 도읍한 때는 900년이었다. 도읍을 정했다는 것은 임금의 궁궐이 있는 지역을 지정했다는 뜻이므로, 900년은 견훤이 왕위에 오른 연도가 된다. 곡창 지대를 차지한 견훤은 궁예(왕건)와 신라에 비해 경제력이 우세했다. 따라서 군사력 또한 튼튼했다. 하지만 직접 금성(경주)까지 가서 경애왕을 죽이는 등 신라에 매우 적대적이었고, 호족들을 제대로 포섭하지 못했으며, 가혹한 세금 정책으로 민심을 잃었다.

남산에 남은 후삼국 유적, 포석정과 경애왕릉

901년, 송악(개성)에 도읍한 궁예는 대동강 남쪽에서 웅주(공주)와 상주에 이르는 넓은 땅을 차지했다. 궁예는 군사들과 함께 자고 같은 밥을 먹는 등 애민 사상이 돋보여 사람들이 크게 따랐다. 하지만 점차 미륵불을 자칭하면서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세금도 무리하게 걷는 등 전제 정치를 일삼다가 왕건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왕건은 918년 고려를 국호로 내걸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왕건은 경애왕을 죽인 뒤 귀환하는 견훤과 대구 팔공산 아래 지묘동 일원에서 대회전을 치른다. 지금 그 일대는 신숭겸 장군 유적지(대구시 기념물 1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은 왼쪽부터, 신숭겸 동상, 유허비, 독좌암(왕건이 대패 후 도망치면서 넋을 잃고 혼자 앉아 있었다는 바위).
 왕건은 경애왕을 죽인 뒤 귀환하는 견훤과 대구 팔공산 아래 지묘동 일원에서 대회전을 치른다. 지금 그 일대는 신숭겸 장군 유적지(대구시 기념물 1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은 왼쪽부터, 신숭겸 동상, 유허비, 독좌암(왕건이 대패 후 도망치면서 넋을 잃고 혼자 앉아 있었다는 바위).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포석정 및 경애왕릉과 견주어 조금도 모자라지 않는 후삼국 유적은 대구 팔공산 아래 지묘동 일대의 신숭겸 장군 유적지이다. 이곳은 대구시 기념물 1호로 지정되어 있다. 왕건은 이곳에서 견훤을 기다리고 있다가 대회전을 치른다. 하지만 고을부(경북 영천)를 거쳐 서라벌(경주)을 기습, 경애왕을 죽이고 돌아오던 견훤군은 기세가 등등했고, 왕건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다.

본래 후백제와 고려의 전쟁 초반은 견훤이 우세했다. 927년 팔공산에서 벌어진 공산 전투에서  신숭겸이 임금 옷을 입고 적을 속이는 동안 왕건이 구사일생으로 도망칠 만큼 견훤이 대승을 거둔 것도 전력의 차이가 낳은 결과였다. 하지만 왕건은 930년 고창(안동) 전투의 대승으로 전국 판도를 뒤집은 후, 936년 사실상의 마지막 결전인 일리천(선산) 전투에서 견훤의 장남 신검을 대파하고, 기세를 몰아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다.

팔공산에 남은 후삼국의 자취, 신숭겸 유적지

왕건은 신라에 우호적이었다. 신라인들은 왕건에게 호응했다. 935년 신라는 스스로 고려에 항복했다. 왕건은 유력 호족들에게 왕(王)씨 성을 쓰게 하고, 높은 벼슬도 주고, 무려 29명의 호족 딸과 결혼했다. 게다가 왕건은 본인이 호족 출신이었으므로 궁예나 견훤보다 호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유리했다. 세금도 궁예의 2/3만 거두었다. 그렇게 하여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가야산의 정상 칠불봉(사진 왼쪽)으로 올라가기 위해 수륜면에서 가야산야생화식물원으로 달리다 보면 길가에 홀로 서서 멀리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석탑 1기를 만나게 된다. 사진 오른쪽의 법수사터 삼층석탑이다.
 가야산의 정상 칠불봉(사진 왼쪽)으로 올라가기 위해 수륜면에서 가야산야생화식물원으로 달리다 보면 길가에 홀로 서서 멀리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석탑 1기를 만나게 된다. 사진 오른쪽의 법수사터 삼층석탑이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가야산 자락에도 후삼국의 유적이 있다.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1215-1 도로변이다. 이곳은 마의태자의 동생 범공 스님이 머물렀던 법수사(法水寺) 터로, 지금도 보물 1656호를 자랑하는 삼층석탑 1기가 고이 남아 있다. 형인 마의태자는 아버지 경순왕의 고려 투항에 반대하고 홀로 금강산에 들어가 삼베옷을 입은 채 풀뿌리를 캐먹으며 생활했고, 동생 범공은 스님이 되어 금당사에 머물렀다.

금당사는 법수사의 본래 이름이다.  한때 1000칸이 넘는 건물과 100여 암자를 거느린 대사찰이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약간의 석축과 탑 1기만 남아 있다. 해인사를 건립한 애장왕이 같은 해에 금당사(金塘寺)를 세웠다고 전한다. 금당사의 '금'은 불상의 빛깔을 나타내니 불법을 뜻하는 법수사의 '법'과 마찬가지이고, 당(塘)은 '못'이니 수(水)와 다를 바 없다. 법수사는 임진왜란 이후 폐사됐는데, 은행나무로 만든 2.35m의 불상은 해인사 대적광전으로 옮겨져 주존불로 안치되어 있다.

가야산에 남은 후삼국 유적, 법수사 터 3층석탑

대구 시내에도 후삼국 유적이 있다. 견훤에게 대패한 왕건이 도망을 하느라 이곳저곳 돌아다닌 덕분이다. <대구시사>에 따르면 왕건은 반야월 앞의 '금호강을 건너' '천변을 이용하거나, 또는 적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산기슭의 외곽을 이용'하여 앞산으로 간다. 그가 도주하던 중 밤하늘에 달이 반쯤 떴다 하여 반야월, 추격군이 없는 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하여 안심, 장정들은 전쟁터에 다 나가고 아이들만 있는 마을을 보고 왕건이 동명을 붙였다는 불로동, 왕건이 숨어 지냈다 하여 은적사, 안전하고 편안하게 머문 절이라 하여 안일암, 잠시 쉰 절이라 하여 임휴사, 왕건이 숨어 있었던 굴이라 하여 왕굴 등등이다.

왕건이 잠시 쉬었다 하여 임휴사라는 이름을 얻은 절(사진 위 왼쪽), 편안하게 쉬었다 하여 안일암이라는 이름을 얻은 절(사진 위 오른쪽, 왕굴에서 찍은 풍경), 숨은 자취가 남았다 하여 은적사라는 이름을 얻은 절(아래 왼쪽), 은적사의 왕굴. 모두 대구 앞산에 있다.
 왕건이 잠시 쉬었다 하여 임휴사라는 이름을 얻은 절(사진 위 왼쪽), 편안하게 쉬었다 하여 안일암이라는 이름을 얻은 절(사진 위 오른쪽, 왕굴에서 찍은 풍경), 숨은 자취가 남았다 하여 은적사라는 이름을 얻은 절(아래 왼쪽), 은적사의 왕굴. 모두 대구 앞산에 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궁예와 견훤은 폭정을 하다가 나라를 잃었다. 말기를 맞이한 신라는 부패와 권력 투쟁으로 날을 지샜다. 왕건은 민심을 얻는 정책을 펼친 끝에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견훤 열전 말미에 이렇게 썼다.

항우와 이밀 같은 뛰어난 인재들도 한과 당이 서는 것을 막지 못했는데, 어찌 궁예와 견훤 같은 흉악인들이 우리 태조(왕건)에게 대적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다만 태조를 위해 백성들을 모아준 이들일 뿐이다.

김부식의 평언이 꼭 맞는 말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후삼국 유적을 답사할 때 우리는 어찌하여 견훤과 궁예가 실각하고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냥 눈요기만 하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면 역사 여행의 의미는 반감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태그:#경애왕, #견훤, #왕건, #궁예, #후삼국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