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수다 떨기] 아쉽다, 과유불급(過猶不及)!
*과유불급 :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

착상은 괜찮았다. 토속 신앙 '손 없는 날'에서 제목 <손님>을 따와 경계(境界) 짓는 경계심(警戒心)과 공포를 엮었다. 떠돌이 악사 '우룡'(류승룡 분) 부자의 출현은 외지와 단절된 마을의 함구령을 터뜨리는 빌미가 되었다. 거기에 독일 구전동화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The Pied Piper of Hamelin)에서 차용한 '약속' 담론이 더해져 파렴치한 세태를 연상시켰다.

'쥐떼'의 은유와 중의성도 돋보였다. 전시의 절박한 '먹고사니즘'에 치여 피를 본 마을 사람들의 미혹을 쥐떼의 속성과 병치했다. 천연두(손님)에 걸린 본토박이들의 삶 터를 '약속'과 달리 폭압적으로 빼앗고 들어앉은 인면수심(人面獸心)이 인육을 탐하는 쥐떼를 양산했다는 암시였다. 쥐떼 습격은 맛이 간 인간들이 초래한 자업자득의 '손님'이었다(6·25 전쟁이 행해지던 51년에 4만여 명의 천연두 환자가 발생했으나 60년 3명의 발병을 끝으로 사라졌다 - 두산백과 인용).

영화 <손님>의 초반부는 청청한 풍광을 배경으로 호기롭게 전개됐다. 1950년대 전쟁의 참화에서 비켜난 외진 산골 마을이 무대였다. 산골 특유의 공간 역학으로써 바람의 방향을 활용해 쥐떼의 이동로를 선보인 장면도 그럴듯했다. 그러나 약장수에게서 귀동냥한 '우룡'을 만능 재간꾼이자 괴력의 소유자로 만들면서 영화는 과유불급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영화 <손님>은 김광태 감독의 첫 장편이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기획 의도로 차용한 판타지는 '서늘하고 묵직한 공포'를 유발하는 데 실패했다. 곳곳에서 삐걱대는 과도한 장면들로 구성력이 구멍 난 탓이다. 약속 불이행이 넘쳐나는 현실을 철학적으로 고찰할 약발 생성도 덩달아 물 건너갔다.

'우룡'의 아들 '영남'(구승현 분)의 지혜로운 행태는 자주 난데없이 다가와 몰입을 방해했다. 아역의 당찬 연기력을 순식간에 잊게 하는 불상사였다. '우룡'과 선무당 '미숙'(천우희 분)의 러브라인은 머리핀을 움켜쥔 '미숙'의 죽음을 연출하기 위해 끼워 넣은 듯 무색 무미였다. 아이들의 장래 예언을 위해 돌출시킨 무당의 기괴함은 아예 <전설의 고향>급이었다.

배우들 저마다의 좋은 연기는 억지 춘향 판타지에서 동동 뜰 뿐 현실 통찰을 낚는 시너지로 작동하지 못했다. 어색해서 롱숏으로 한정된 쥐떼 CG만 시선 집중에 성공했다. 인간을 공격하는 쥐떼의 잔상은 관객에게 원색적 공포였다. 그 공포는 '간첩' 누명을 씌워 공약을 파기하는 데 동조하는 군중심리의 강화제였다. 결과적으로 약속 담론을 잊게 한 쥐떼 잔상은 <손님>의 껍데기였다.

마지막 장면에서 피에로 분장의 '우룡'이 '씩' 웃어 보였다. 그것으로 판타지는 제대로 망가졌다. 피에로는 표리부동한 삶에 부대끼는 존재감을 표상한다. 떠돌이 악사의 정체성이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의 마술사에서 피에로로 대체되면서 '손님'의 판타지적 울림은 아예 사라졌다. 그러잖아도 사회적 난제들 앞에서 고아감에 시달리는 관객들에게 영화 <손님>은 피에로의 개인적 복수로써 피로감을 증폭시켰다.

'신장르 판타지 호러'나 '잔혹 동화'라는 홍보 문구는 무색했다. 배우들은 살아남았지만, 영화 <손님>은 껍데기만 남긴 채 죽었다. 죽으면서 잔뜩 기대하고 찾은 나를 '우롱'했다.

영화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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