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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를 출입하는 이경태 정치팀 기자가 기사에서 미처 풀어내지 못한 청와대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편집자말]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말 국가정보원을 비공개로 방문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12일 여권 관계자들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오후 언론에 알리지 않은 채 내곡동의 국정원 청사를 방문했다. 사진은 박 대통령과 이병호 국정원장. 2015.7.12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말 국가정보원을 비공개로 방문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12일 여권 관계자들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오후 언론에 알리지 않은 채 내곡동의 국정원 청사를 방문했다. 사진은 박 대통령과 이병호 국정원장. 2015.7.12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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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절(自切)'. 도마뱀이 스스로 꼬리를 끊고 위기를 면하는 걸 뜻하는 말입니다. 이른바 '꼬리 자르기'입니다. 외국에서 해킹 프로그램을 사와서 국내 사찰에 활용한 의혹을 받고 있는 국가정보원은 지금 '꼬리 자르기' 중이란 눈총을 받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해킹팀 프로그램을 직접 구입해 운용한 것으로 전해진 국정원 직원 임아무개(45)씨는 관련자료를 삭제하고 자살이라는 극단을 선택했습니다. 남겨진 국정원 직원들은 정보기관답지 않게 집단성명까지 발표해 사찰의혹을 극구 부인했습니다.

사실 한 사람의 극단적 선택이 조직의 '꼬리 자르기'로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국정원의 역사' 때문입니다. 국정원이 그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때부터 정치적·법적인 책임을 물어야 할 상황이 닥치면, 그 책임자 혹은 관계직원이 자살을 기도하거나 자살했습니다.

권영해 전 안기부장은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 당선을 저지하기 위한 '북풍' 공작을 주도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중 할복자살을 기도했습니다. 2005년 불법 도·감청 사건인 '삼성X파일' 수사로 모습을 드러낸 안기부 비밀도청팀 '미림팀' 수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아무개 팀장이 자살을 기도했고 이수일 전 국정원 2차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지난해 3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조작 사건' 때도 국정원 협력자인 중국동포 김아무개씨의 자살기도가 있었습니다. 같은 사건으로 검찰 조사를 받다 자살을 시도했던 권아무개 과장은 회복 이후 '기억상실증세'를 보이며 수사를 무력화시키기도 했습니다.

국정원의 '꼬리 자르기'... 대통령이 막을 수 있다

매번 불법을 저지르고도 '꼬리 자르기'로 위기를 탈출하는 국정원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대통령입니다. 국정원법 2조는 "국정원은 대통령 소속으로 두며 대통령의 지시와 감독을 받는다"라고 돼 있습니다. 즉 대통령이 최종 지휘권자인 셈입니다.

그런 만큼 대통령이 진상규명 의지를 표명하면 국정원의 '꼬리 자르기'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북풍공작의 피해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이 문제의 언급을 삼가면서 사정당국에 수사를 맡겨놓았습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1998년 3월 18일 국무회의에서 "이 땅의 정치를 망쳐놓은 북풍에 대해서는 정치를 떠나 공정하게 밝히겠다는 생각"이라며 진상규명 의지를 밝혔습니다.

권 전 안기부장이 자살을 기도하면서 검찰 수사가 중단됐을 때도 원칙은 그대로 갔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사실 그대로 국민에게 알려라"라고 지시했습니다. 권 전 부장은 이후 징역 5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삼성X파일로 안기부 비밀도청팀의 존재가 드러난 지 닷새 만에 진상조사를 지시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2005년 7월 25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국가기관이 불법으로 도청을 자행한 것은 과거의 일이나 부끄럽고 개탄스러운 일"이라며 "정부는 불법행위를 철저히 밝히고 유사한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아직 해야 할 조치가 있다면 즉시 단호히 조치해야 한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국정원이 김대중 정부에서도 불법으로 도청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김 전 대통령 측과 갈등이 빚어졌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같은 해 8월 직접 기자간담회를 열고 "아무런 정치적 음모가 없다"라며 "일부가 나왔으니까 도청 전부에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성의를 다해 그 전부를 밝힐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일로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은 정치·경제계 주요 인사들의 휴대전화를 불법 감청하는 데 관여한 혐의로 구속돼 각각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습니다.

17일째 침묵 지키는 박 대통령, 10년 전에는?

그러나 2015년 현재 국정원의 최종 지휘권자는 '침묵'을 택하고 있습니다. '위키리스크'가 이탈리아 해킹팀이 해킹 당한 사실과 함께 해킹 프로그램 구매 고객명단을 공개한 지 17일째, 국정원이 그 고객 중 하나라는 사실이 확인된 지 13일째인데도 말입니다.

박 대통령은 21일 국무회의에서도 국정원 해킹 의혹에 침묵했습니다. 대신 주요 국정과제인 4대 부문 구조개혁을 강조하면서 국무위원들에게 "개인적인 일정은 내려놓고 국정에 매진하라"라고 주문했습니다(관련 기사 : 박 대통령, '국정원 해킹' 언급 대신 국무위원 다잡기).

공식적인 자리의 발언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의견' 자체를 알기도 어려운 형편입니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지난 17일 "국정원 해킹 의혹과 관련한 청와대 의견은 없냐"는 질문에 "특별히 드릴 말씀이 없다, 국정원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라고 답했습니다. 지난 20일 같은 질문에도 "특별히 드릴 말씀이 없다"는 답변뿐이었습니다. 민 대변인은 이날 역시 "대통령이 국정원 해킹 의혹을 계속 보고받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통령이) 보고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면서도 "따로 드릴 말씀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지난해 3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조작 사건' 때보다도 더 굳게 입을 닫고 있는 셈입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3월 10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이 사건에 유감을 나타내며 "이 일과 관련한 실체적 진실을 정확히, 조속히 밝혀서 더 이상 국민적 의혹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또 "검찰은 한 점 의혹도 남기지 않도록 철저히 수사하고 국정원은 검찰 조사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라고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박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을 돌아보면, 지금의 침묵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2005년 한나라당 대표 재임 당시 박 대통령은 삼성X파일 사건과 관련, "정부나 국정원이 무슨 말을 한들 국민이 믿겠느냐"라며 "(국정원이) 국민이 믿을 수 있을 때까지 스스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라고 비판했습니다. 같은 해 11월 국회 운영위원회 회의에서는 "국가 정보기관이 나서 우리의 자유와 민주를 짓밟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정보기관의 불법 도·감청 의혹에 이토록 강경했던 박 대통령이 사실상 불법 도·감청이나 다름 없는 해킹 의혹에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공 가능성 높여가는 '꼬리 자르기'... "국민이 믿겠느냐"

박 대통령의 침묵은 국정원의 '꼬리 자르기'에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검찰은 아직 수사에 돌입하지 않았습니다. 새누리당은 국회 정보위원회를 중심으로 사실관계부터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법무부는 새누리당의 주장을 적극 활용합니다. 김현웅 법무부장관은 지난 1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사실관계가 확인이 안 됐으니 조금 더 지켜보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이에 '증거'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임씨가 관련자료를 삭제했고, 국정원 직원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인터넷에 올렸던 악성 애플리케이션 관련 홈페이지는 최근 대부분 삭제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국정원과 이탈리아 해킹팀을 연결해준 '나나테크' 대표는 해외로 출국한 상태입니다.

결국 이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수사가 개시되더라도 국정원의 '꼬리 자르기'는 성공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국민이 믿겠느냐"는 박 대통령의 2005년 발언은 이번에도 유효할 것 같습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는 지난 20일 전국 성인 500명을 대상으로 국정원 해킹 의혹 해명의 신뢰 여부를 조사한 결과(표본오차 95% 신뢰수준 ±4.4%p), 응답자의 52.9%가 '대테러, 대북 업무 외에 내국인 사찰도 했을 것'이라고 답했다고 밝혔습니다. '대테러나 대북 공작활동을 위해서만 해킹했을 것(26.9%)보다 26.0%p 높은 수치입니다.

이제 박 대통령이 침묵을 깨야 할 때입니다.


태그:#박근혜, #국정원 해킹, #노무현, #김대중, #삼성X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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