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연말이 되어 올해 최고의 말을 뽑는다면 지난 6월 전국의 눈과 귀를 한순간에 국무회의 석상으로 모아버린 박근혜 대통령의 말이 되지 않을까. "배배배배 배신이야 배신"을 외치던 영화 <넘버 3>의 송강호를 압도하는 그 기막힌 발언을 통해 박 대통령은 다시 한번 여왕에 등극했다. 불통의 여왕!

소통하는 것이 정말 그렇게 어려울까? 이 사람을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말이다. 왼쪽 눈 아래 위를 관통하는 칼자국이 어디선가 한 가닥 하던 사람인 것도 같은데, 집밥 백선생을 능가하는 기막힌 음식 솜씨와 묵묵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보듬는 남자. 바로 영화 <심야식당>의 주인장 마스터(코바야시 카오루 분)이다.

신주쿠 뒷골목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마스터는 입이 하나에 귀가 둘인 까닭을 몸소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것은 내 말을 하기보다 남의 말을 더 잘 들어주라는 것이고, 그게 바로 소통의 기본 아닌가. 내 말만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시대에 누군가의 말을 지긋이 들어주는 미덕이야말로 야심한 시각에도 참새방앗간마냥 사람들이 그를 찾게 만드는 비결 아닐까. 

2006년 연재되기 시작해 아시아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된 아베 야로의 만화 <심야식당>을 2009년 드라마로 만들어 히트시킨 마쓰오카 조지 감독이 이번에는 영화 <심야식당>(6월 18일 개봉)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예의 그 맛나 보이는 계란말이와 미디엄레어로 구운 명란 그리고 문어소시지 볶음으로 식욕을 자극하면서 말이다.

영화 <심야식당>은 나폴리탄, 마밥, 카레라이스를 주제로 하는 세 편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드라마와 동일한 감독에 배경과 등장인물마저 똑같아 마치 드라마 세 편을 몰아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영화적 호흡이 살아 있고 각각의 에피소드가 주는 감동과 재미가 영화에 대한 몰입도를 높여준다.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동경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이라는 신주쿠. 그러나 형형색색의 현란한 네온사인 너머에는 1950년대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뒷골목이 존재하고 그 곳에 <심야식당>이 자리하고 있다. 자정이 되면 개점을 알리는 걸개가 걸리고 불이 켜지면서 하나 둘 사람들이 찾아든다.

심야에만 문을 여는 뒷골목 식당이다 보니 손님들 대개는 사회 비주류계층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소외된 사람들이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고 위로받는 곳, 그곳이 바로 <심야식당>이다. 그래서 이곳의 밤은 낮보다 더 아름답고 따스하다.

게이바 주인 코스즈(아야타 토시키 분)를 비롯해서 스트리퍼 마릴린과 야쿠자 료, 노처녀 삼인방 등은 주요 단골로 <심야식당>의 양념 같은 존재들이다. 그 중에서도 다정다감하고 가슴 따뜻한 코스즈는 핵심멤버다. 그가 없는 <심야식당>은 아마 앙꼬 없는 찐빵 같지 않을까 싶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한 SBS 드라마 <심야식당>은 맛도 멋도 없는 그야말로 앙꼬 없는 찐빵이 되어버렸다. 원작만화는 물론 일본에서 제작한 드라마와 영화에서 극의 재미를 살리는 감초 역할로 등장하는 코스즈 역을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우리나라에서는 빼버린 것이다.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우리나라의 시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성소수자 실태는 사회 전반의 인권 실태를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고 한다. '평등을 향한 우리의 큰 발걸음'이라며 동성애 차별금지법에 서명하고 동성결혼을 허용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동성애 혐오론자를 국가인권위원회 비상임위원에, 인사청문회에서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법무부장관에 임명하는 박근혜 대통령. 두 대통령의 시각차는 태평양만큼이나 멀어 보인다.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소통하기

스물 두엇 되었을까. 앳되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눈빛으로 '마밥'을 주문하는 아가씨. 마밥은 만드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며 마스터는 먼저 다른 것들을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하고 그녀는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마스터가 만들어준 음식들을 먹어치운다. 이윽고 마밥이 완성되어 뒤돌아본 자리에 사람은 간데없고 빈 그릇만 남아 있다.

두 번째 에피소드 <마밥>에서 먹튀녀 미치루(타베 미카코 분)와 마스터는 이렇게 첫 대면한다. 며칠이 지나고 용서를 구하러 다시 찾아온 미치루에게 마스터는 어떤 추궁도 질문도 하지 않는다. 다만 음식 값만큼이라도 일을 하게 해달라는 미치루에게 조용히 동전을 건네주며 씻고 오라고 할 뿐이다. 오랫동안 씻지 못한 미치루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묻어나는 장면이다.

성공하기 위해 상경했지만 모아둔 돈을 애인이 모두 들고 도망 가버린 후 오갈 데가 없어진 미치루는 본의 아니게 먹튀녀가 되었던 것이다. 문득 영화 <변호인>(2013년 개봉)의 국밥집 아지매가 생각났다. 살다보면 누구라도 어려운 순간이 있을 수 있는데 잘못을 탓하기보다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넉넉한 인품의 사람들. 세상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지켜가는 것 아닐까.

이들의 소통법은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그저 조금 넓은 마음으로 조용히 상대의 말을 들어줄 뿐이다. 그리고 상대의 마음으로 이해해 줄 뿐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 미치루는 마스터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스스로 위로받고 상처를 치유해간다.

그리고 그렇게 받은 위로를 옆 가게 배달소녀에게 전해준다. 한 사람이 마음을 열면 거기서 끝이 아니라 마치 릴레이 하듯 이어져 마침내는 이 세상이 모두 소통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불통을 지나 먹통이 되어 버린 시대에 영화 <심야식당>은 따뜻한 위로가 된다. 오늘 저녁은 마스터가 만들어주는 카레라이스에 문어소시지 볶음이 먹고 싶다.

심야식당 마쓰오카 조지 코바야시 카오루 소통 불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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