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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퇴'보다, 제게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면접에서 월급이 얼마인지는 묻지도 않고 한 영화사로 출근을 시작했다. 패기로 무장한 내게 "생각만큼 재밌는 일만은 아닐 수도 있다"며, "버틸 수 있겠느냐"고 묻던 면접관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의아했다. 대학 시절, 영화 마니아로 자부해왔기 때문에 영화 일이라면 어떤 것이든 해볼 각오가 되어있었다.

수습사원이라 정규직의 70%인 월급에서, 일한 만큼인 3주 치를 적용해 첫 월급을 받으니 70만 원이 통장에 찍혔다. 일을 배워갈수록 저녁 10시가 다 되어 퇴근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불타는 금요일 오후 6시에는 토요일 출근을 선고받기도 했다. 월급은 '수습'처럼 받고, 일은 '정직원' 못지않게 했다.

강남에 위치한 화려한 영화사, 하지만 내 월급은...

급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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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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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는 거리를 가득 메운 성형외과, 유명 연예인들이 자주 찾는다는 맛집이 넘쳐나는 강남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드는 화려한 곳이다. 환상을 팔아 수익을 창출하는 영화산업은 많은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 큰돈을 주무른다.

그러나 수많은 직업의 사람들이 영화계에 종사하고 있지만, 소수의 사람만 큰 이익을 얻는다. 유명 연예인의 경우 영화의 홍보를 맡아주면 수천만 원을 어렵지 않게 받지만, 나는 최저 시급 비슷한 월급을 받고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 회사에서는 일부러 집안 형편이 어렵지 않은 사람들만 고용한다는 공공연한 소문을 들었다. 그 소문에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조금이나마 영화 같은 삶을 꿈꾸며 이곳에 왔지만, 영화와 현실의 간극은 커지고 있었다. 줄여야 할 지출 1순위는 옷값이었다. 나이 먹을수록 의복만큼은 질 좋은 것을 입어야 외모가 산다는 지론을 깨고, 인터넷 쇼핑으로 옷을 몇 벌 구매했다. 한 번 빨고 나니 목이 축 늘어진 티셔츠를 보며 차라리 돈을 들여오래 입을 옷을 살 걸 후회했다.

물가가 비싼 동네이다 보니 점심값도 부담됐다. 보통 한 끼에 7000~8000원이 드는데, 동료가 한턱을 쏘거나 김밥을 먹게 되는 날이면 좋아하는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었다.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할 때는 분위기를 낼 겸 패밀리 레스토랑에 종종 가는 편이었는데, 칼칼한 것이 먹고 싶다는 핑계로 떡볶이를 자주 먹기도 했다.

분식점을 나서는 길이면, 바닥나는 통장의 잔액만큼이나 마음 씀씀이도 함께 바닥이 나버린 것인지 작은 일로도 기분 상해 남자친구와 다퉜다. 작년부터 친구와 함께 가자고 약속했던 록 페스티벌은 푯값이 너무 비싸, 아마도 "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가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자기 최면을 걸고 있는 이 시대 청춘

가계부 지출 내역
 가계부 지출 내역
ⓒ 류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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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 우연히 '열정 페이'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나처럼 사는 청춘이 꽤 되는 구나 한편으로는 위로도 받았다. 내친김에 댓글까지 읽었다. 월급 한 푼 안 받고도 매일 출근해 바닥 걸레질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기업의 사장님이 되셨다는 한 어른의 댓글이 보인다. 또 다른 댓글에는 미국도 인턴이 무급인 건 마찬가지라고 한다.

진정한 꿈을 위해서라면 조금 더 버텨볼까 생각하던 찰나, 내 열정과 노동력이 정말 70만 원짜리일까 궁금해진다. 점심시간 동료와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동료 또한 영화에 미쳐서 이 일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입사했지만, 가끔 너무 박봉이라는 생각은 든다고 했다. 맞장구를 쳤더니 "그렇다고 여기서 나가면, 이렇다 할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라는 말에 더 하려던 말을 멈추고 말았다.

이 회사에는 관심사를 공유하는 매력적인 사람들과 자유로운 업무 분위기, 그나마 즐겁다고 할 수도 있는 일이 있다. 하지만 점차 줄어드는 잔고는 내게 "이건 좀 심하지 않니"라고 말을 거는 듯하다. 그래도 결국 좋아하는 일인 걸까. 취업난이라는 벼랑 끝에서 대안이 없어서 스스로 좋아하는 일이라 최면을 걸고 있는 건 아닌지.

퇴근 후 즐기는 분위기 좋은 곳에서의 데이트와 좋아하는 책과 음반을 사며 느끼던 소소한 행복. 내 열정에 대한, 보다 정당한 보상과 노동의 대가로 누리고 싶은 최소한의 삶이 참을 수 없이 그리워지는 날이, 어쩌면 조금 더 빨리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덧붙이는 글 | 장그래 가계부 기사 공모



태그:#가계부, #열정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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