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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빨리'란 단어는 이제 아시아에서는 물론 미국과 유럽에서도 대한민국 사람들의 독특한 습성으로 이해되는 듯합니다. 19세 말과 20세기 중반까지 격변의 세월을 견디며 초강대국들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대한민국으로서는 '빨리빨리'라는 생활 방식이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빨리빨리'의 결과물은 이제 첨단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인터넷과 모바일 산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경제 분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되짚어보는 '빨리빨리' 문화​

외국에서는 추첨일 1주 전에 복권을 많이 산다고 합니다. 복권에 당첨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일주일을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토요일 마감시간에 '로또'를 가장 많이 구매합니다. '빨리빨리'와 속전속결로 살아온 생활패턴이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대한민국에 사는 외국인들이 뽑은 '빨리빨리 베스트 10'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리라 생각합니다.

<세계 문화의 겉과 속 : 강준만> 142쪽
▲ <세계 문화의 겉과 속 : 강준만> <세계 문화의 겉과 속 : 강준만> 142쪽
ⓒ 김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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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화현상을 두고 한때 '어글리 코리안'이라며 비판이 일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런 해동 양식이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나 예술,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게다가 이런 습관은 부지런함과 과감한 투자로도 이어져 패션과 디자인, 엔터테인먼트 등 변화와 문화적 포용력이 필요한 분야에서도 성공의 요인이 되고 있지요.

대한민국에 몇 년 살다가 미국으로 갔던 어느 외국인은 인터넷 설치를 위해 일주일을 기다렸습니다. 막상 설치를 했지만 느려터진 인터넷 속도에 '역시 한국이 최고야'를 연발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몇 년 전 인도로 이민 간 제 동생도 역시 그런 말을 했습니다. 

"형, 전화 신청을 했는데 언제 올지 몰라. 한국이었으면 오늘 오후나 내일 오전이면 올 텐데 여기는 언제 오겠다는 말도 없어. 설치 기사가 와야 오는 거야."

동생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뿐인가요? 민원실의 행정서비스나 택배와 퀵서비스는 감히 따라올 나라가 없는 최고의 수준이라는 데 동의를 할 수밖에 없답니다. 하지만 빠른 속도와 변화를 추구하는 패턴 속에서 우리가 놓칠 수 있는 부분 역시 상당수 존재합니다.

빠듯한 시일에 맞춰 건물을 짓거나 물건을 만든다면 부실 공사와 불량품이 생길 가능성이 큽니다. 학문이나 예술을 배우는 과정에서는 충분히 읽고 배우고 사색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엔 텍스트에 얽매어 주어진 과제 수행에 그치거나 상상력이 뒷받침되지 못해 수준 높은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 예로 강준만 교수는 저서 <세계 문화의 겉과 속>에서 영국의 디자인 전문 회사 탠저린의 부사장 이돈태의 말을 인용해 대한민국의 '빨리빨리' 문화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합니다.

"역설적이지만 한국에 안주해 있었더라면, (제가) 이만큼 성공을 거두진 못했을 겁니다. 자신이 갖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자유롭고 도전적인 문화는 아무래도 유럽 쪽에 높은 점수를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듯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는 두 얼굴이 있다. '역동성'과 조급성'이라는 두 얼굴이다. 김영명은 "역동적인 것은 좋다. 그러나 조급성은 나쁘다. 그런데 조급함과 활력은 동전의 양쪽이라는데, 어떻게 한 쪽만 취하면서 살 수 있겠는가?"라고 물으면서 '중용'을 해답으로 제시했다.(본문 151쪽)

한국 '빨리빨리'의 시작은?
<세계문화의 겉과 속> 표지
 <세계문화의 겉과 속> 표지
ⓒ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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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매사에 빨리하려는 한국인의 기질은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1960년대 군사문화의 잔재입니다. 우리도 '잘 살아보자'는 구호 아래 집단적 행동으로 강제됐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군사 문화라는 것이 속전속결이고 상명하복에 의한 속도전이지 않겠습니까.

​이 부분에서 강준만 교수는, 발해사 연구자인 서울대 국사학과 송기호 교수의 주장을 이용하며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빨리빨리'로 대변되는 한국인의 조급성을 1960년대 이후 군사 문화의 잔재로 여기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제시하는 다음 두 가지 기록을 보자.

"우리나라 사람은 매사에 빨리하고자 해 정밀하지 못하니 어떻게 하면 정밀하고 좋게 구워서 비가 새어 무너질 염려가 없게 하겠는가?"(<세종실록> 1433년 7월 12일) 세종이 근정전을 보수하기 위해 기와를 굽도록 지시하면서 내비친 걱정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일을 시작하면 그만두는 것이 일정하지 않아서 끝과 시작이 아주 현격하게 차이가 납니다. 급하면 일에 착수해 남에게 뒤질까 걱정하고 느긋해지면 그만두어 서로 잊어버리고 맙니다."(<광해군 일기> 1608년 11월 9일) 관청이 임금에게 건의한 내용이라고 한다.(본문 154쪽)

이 기록에 따르면 뭔가를 빨리하려는 기질은 현대 군사 독재 시절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사계절이 뚜렷한 곳에서 쌀농사를 지어야 하는 사람들은 일처리가 빠르지 않고서는 생존 자체에 위협을 받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이러한 농업환경에서 수천 년간 삶의 행동양식이 누적됐을 때는 '빨리빨리'라는 습성이 몸에 배게 됩니다. 

중국의 산업화로 보는 '빨리빨리'

​"1960년대 이후 한국인의 모습은 '빨리빨리'였고 중국인의 전통적 모습은 '만만디(漫漫的 : 천천히)였다. 그러나 이제 북경의 '콰이콰이(快快 : 빨리빨리)'가 서울의 '빨리빨리'를 웃돌았다."(본문 155쪽)

​재미있는 지적입니다. 한국인의 '빨리빨리'를 앞질러버린 중국의 '콰이콰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한국인의 기질 중에는 사계절이 뚜렷한 농경사회에서 살아야 하는 생활 패턴이 매사에 뭔가를 빨리해야 한다는 습관을 특징지었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20세기 초반 시련의 세월을 거친 후 군사 문화 아래에서 초고속 압축 성장을 향해 질주했던 한국 사회의 특성이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주택정책이나 교육정책이 바뀌어 있고 또 자고 일어나면 홍위병들이 날뛰며 계급투쟁 만세를 외치다가 어느 날은 시장 사회라 하며 돈, 돈을 외치는 세상이 됐던 게 중국인들이 겪어온 현실이라고….(본문 157쪽)

그렇습니다. ​중국 역시 공산화가 된 후 자본주의와 격돌하며 급격하게 변화하는 국내외 정세 속에서는 '콰이콰이'를 하지 않으면 배겨낼 수 없는 사회가 됐습니다. 대한민국과 마찬가지로 중국 역시 20세기 말에 다다르며, 공산 국가이지만 일부 자본주의를 이식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중국인들은 치열한 경쟁 사회로 내던져지게 됩니다.

과거 서구 강대국의 이권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좌지우지되었던 시련의 역사가 있었지만, 이제는 경제와 군사뿐만 아니라 우주과학 분야까지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조차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강국이 됐습니다.

패스트푸드의 원조인 미국도 '빨리빨리' 문화가 있습니다. 강의시간에 식사를 한다든지 대도심의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올라가는 사람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빨리빨리' 문화는 개인주의적이며 실용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면, 대한민국과 중국의 '빨리빨리' 문화는 집단주의적이고 산업화 과정에서 초고속 압축 성장의 경험이 낳은 무의식이나 습관의 성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론, 대한민국의 '빨리빨리'문화는 당면한 과제를 시급히 해결하기보다는 은근슬쩍 넘어가거나 중요하지 않은 사안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갈등과 경쟁으로 인한 고민의 해결점에 직접적이고 빨리 다가가지 않고 '곪아 터지기'를 기다리는 게 문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은 한국인이 반드시 '빨리빨리'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아닌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세계 문화의 겉과 속 - 모든 문화에는 심리적 상흔과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2012)


태그:#빨리빨리, #콰이콰이, #만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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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종교학 쪽에 관심이 많은 그저그런 사람입니다. '인간은 악한 모습 그대로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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