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일주일 따라 다녀보면 어떨까', 이 질문으로부터 '팔로우'는 시작됐습니다. 이왕이면 평소 관심 있게 지켜보던 남자 연예인을 뒤쫓고 싶은 바람이 개인적으로 없지 않지만, 코너 이름이 '스토커'로 변질되는 일이 없도록 사람, 사물, 현상을 가리지 않고 '팔로우'하겠습니다. [편집자말]
* 2편(그 남자가 '오케이' 할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에서 이어집니다.

오전 9시, 경기도의 한 습지로 출근했다. 아침부터 땡볕이었다. 일방통행만 가능한 좁은 흙길 위로 3분에 한 번씩 덤프트럭이 지나가며 더운 모래바람을 뿜어댔다. 사람은 거의 다니지 않았다. 이곳은 살인사건 현장이다.

 한 영화의 살인사건 현장검증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설치된 폴리스라인.

한 영화의 살인사건 현장검증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설치된 폴리스라인. ⓒ 이현진


아무렇게나 자라난 잡초들 사이로 노란 폴리스라인이 눈에 띈다. 경찰관과 과학수사관들이 주변을 통제하고, 카메라를 갖춘 기자들까지 모여들었다. '영화 촬영중'이라고 알려주지 않으면 깜빡 속을 법한 현실감이 느껴진다. 보조출연 신청을 하고 연락을 받아 가게 된 작품의 촬영 장면은 살인사건 피의자의 현장검증이었다.

이날 보조출연자가 투입되는 역할은 경찰, 기자, 구경꾼. 대개 촬영장에 가서야 무슨 역을 맡을지 결정되기에 정장과 구두, 캐주얼과 운동화를 두루 챙겨야 한다. 난 세미정장에 구두를 신고, 나머지는 배낭에 넣었다. 기자 역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준비물엔 있지도 않은 수첩과 펜까지 챙겼다. 그야말로 연기가 필요 없는 생활밀착형 연기를 보여주리라.

애드리브는 기본... 액션연기까지 하라고?

하지만 현장에서 나는 조금 고민해 볼 틈도 없이 구경꾼으로 분류됐다. 말 그대로 구경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10여 명 정도의 구경꾼들이 할 일은 출입을 막는 경찰들의 어깨와 어깨 사이로 왕성한 호기심을 드러내며, 흉악한 피의자를 향해 욕과 저주를 퍼붓는 것이다.

대본은 없지만 대사는 알아서 해야 하는 상황에 당황한 건 초보인 나뿐인 것 같았다. 명배우들이나 가능하다는 애드리브 연기를 하라니, 게다가 조연출자는 욕설의 다양성까지 주문하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이 영화는 몇 세 관람가일까, 어느 정도의 쌍욕까지 가능한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적당한 대사를 찾지 못한 채, 테스트 촬영이 시작됐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백광호(박노식)이 범행을 부인하고 현장검증을 거부하자, 현장검증 현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백광호(박노식)이 범행을 부인하고 현장검증을 거부하자, 현장검증 현장은 아수라장이 된다.(위 사진은 본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영화 <살인의 추억>


"저런, 죽일 놈"
"어디, 얼굴 좀 보자!?"
"사형시켜라!"
"아이고, 또 집값 떨어지겠네~"

흉악범죄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면서도, 지나치게 상스럽지 않고, 사형제도 찬반 문제를 한번쯤 되돌아 볼 수 있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가운데, 주민들의 고충까지 생동감 있게 전한 대사들이 겹치지도 않고 쏟아져 나왔다. 나는 나만 들릴 정도로 "어머, 저놈..."만 반복하다 끝났다. 지금껏 기자랍시고 누군가의 연기에 '발'이라는 수식을 붙이며 너무 쉽게 평가해온 건 아닌지 뜨끔해졌다.     

설상가상, 잔뜩 긴장한 내게 보조출연자 관리팀장이 찌그러진 페트병을 건넸다. "이따 범인 지나갈 때 던지세요." 맙소사, 액션연기까지 해야 하다니 아득해졌다. 옆에 건장한 아저씨들도 많은데 왜 하필 나인가. 페트병을 쥔 손에 땀이 찼다. 드디어 카메라가 돌아가고, 피의자가 차에서 내렸다. 지금이다.

"죽... 죽여라!!!"

평소 좋아하던 배우였다. 그에게 본의 아닌 악담을 네다섯 번 더 쏟아 붓고 나서야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다들 얼마나 메소드 연기를 펼쳤는지, 누군가의 페트병은 피의자가 아닌 내 뒤통수를 명중시켰다.

기꺼이 배경이 되는 사람들, 가성비 최고의 배우들

구경꾼들의 임무는 거기까지였다. 기자와 경찰들은 피의자를 따라 습지로 내려가야 했다. 땡볕에 경사진 비탈길을 몇 번이나 오르내렸는지 세기 어려웠다. 내심 구경꾼 역할을 맡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촬영은 오후 2시경에 끝났다. 영화 보조출연은 보통 오후 6시 종료 기준 일당 4만 원이 기본인데, 촬영이 일찍 끝나도 기본금을 받을 수 있다. 나를 비롯한 구경꾼들은 '꿀' 스케줄이라며 박수를 쳤다. 다 끝나고 나서야 새까맣게 탄 발등이 쓰리고 허리가 쑤셨지만, ENG 카메라를 어깨에 짊어지고 뛰어다닌 기자들에 비하면 고생도 아니었다. 아니, 이런 연기를 누가 4만 원에 해준단 말인가. '가성비 최고'의 배우들이다. 

 <제보자>의 한 장면

영화 <제보자>의 한 장면. 기자 역을 맡은 출연자들이 DSLR과 ENG 카메라를 들고 있다.(위 사진은 본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영화사수박


이렇게 이틀간 영화 두 편의 보조출연으로 각각 6만 원과 4만 원, 총 10만 원을 받았다. 첫 날은 오전 7시에 고속버스를 타고 촬영을 갔다가 오후 10시에 같은 장소에 내렸고, 둘째 날은 오전 9시에 집합해 오후 2시에 해산했으니 총 20시간을 매여 있었던 것치고는 너무 적은 금액이다.

그나마 내게 일을 준 두 기획사는 임금을 이틀 내로 통장에 넣어줬다. 하지만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았기에 돈을 받기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현장에서도 불안감은 느껴졌다. 대개 보조출연자들은 여러 기획사를 통해 그때그때 일을 받는데, 다른 작품에서 제대로 받지 못한 임금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다음날 촬영 들어가는 작품에 출연하라는 문자가 왔는지 수시로 확인하는 모습은 일이 끊길까 걱정하는 일용직 노동자의 고충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이들에겐 '체험'이 아니라 '현실'이다.

꼴랑 두세 번 경험해봤을 뿐이지만, 이제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주연이 아닌 주변인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흐릿하게 실루엣만 보이는 장면을 위해 새벽부터 정장에 캐리어까지 챙겨야 했겠지, 몇 초 스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이힐을 신고 몇 시간이나 왔다 갔다 반복했을까, 조금은 알 것 같았다(하반신이 나오지 않는 장면에서는 구두소리 난다며 더러운 바닥을 맨발로 걸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비록 '배경'이 되는 것이 보조출연자들의 일이지만, 그들이 자기 인생에서만큼은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처우 개선에 대한 고민은 계속돼야 한다. 소품이 아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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