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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연암에서의 촛불 사진
 홍연암에서의 촛불 사진
ⓒ 배재형 열사 페이스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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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형 동지는 '천사불여일행' 즉 천 번의 생각보다 한 번의 실천이 중요하다는 유서를 남겼다. 그 뜻을 마음속에 새기며 부족한 이 글을 쓴다.

지난 5월 11일 설악산 인근에서 배재형 전 하이디스 지회장이 목숨을 끊었다는 비보를 듣고 한동안 멍했다. 초창기 반올림 활동에 여러 도움을 받았던 동지의 죽음이었다.

도대체 왜... 그는 죽음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했을까. 조심스레 그의 페이스북을 살폈다. 4월 29일자 글이 눈에 띄었다.

"부처님 꼭 하이디스 투쟁 승리할 수 있게 해 주세요." - 홍련암에서

동해의 푸른 바다 앞 작은 암자인 홍련암에서 촛불 하나를 밝히면서 그가 기도한 건 다름 아닌 "하이디스 투쟁 승리"였다.

부모가 자식의 위해 간절히 기도하듯 그는 하이디스 투쟁 승리를 빌며 촛불을 밝혔다. 그것은 본인 하나의 투쟁의 승리가 아니라 동고동락 해 온 하이디스 조합원들의 승리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삼성 반도체 직업병 투쟁과의 연대

그의 부고 소식을 듣고, 처음 배재형 동지를 알게 된 뒤 겪은 다소 오래된 일들이 떠올랐다. 2008년 4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앞에서 열린 '삼성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결의대회'에 수 백 명의 하이디스(당시는 비오이 하이디스) 노동자들이 연대했었다. 배재형 동지는 당시 파업 중이던 노동자들을 이끌고 현장을 지휘했다.

그 뒤 반올림의 반도체 공장 앞의 선전 활동인 '반달(반도체 노동권을 향해 달리다) 공동행동'에도 그는 기꺼이 함께했다. 덕분에 삼성반도체 공장 말고도 이천 하이닉스 공장 앞에서도 반도체 공장 직업병 문제에 대해 알릴 수 있었다.

지난 2월 1차 대만 원정 투쟁 당시 배재형 열사(좌측)활동 사진
 지난 2월 1차 대만 원정 투쟁 당시 배재형 열사(좌측)활동 사진
ⓒ 하이디스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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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미안하게도 그가 몸담았던 하이디스 투쟁이 어떤 건지에 대해 제대로 보지 못했다. "노동조합이 있었더라면 내 딸이 죽었겠습니까"라고 한,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망노동자 고 황유미씨의 부친 황상기님의 호소처럼 전자산업 노동자들의 직업병 문제와 노동권 문제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노동3권의 확보가 직업병 예방에 있어 너무 중요하다고 이야기 해왔으면서도 정작 옆의 투쟁을 보지 못했다. 반도체에 이어 LCD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같은 직업병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호소하면서도 정작 2008년부터 가까운 지역 이천에서 줄곧 먹튀 자본에 맞서 싸워왔던 LCD 노동자들, 하이디스 조합원들의 투쟁과 삶에 대해선 주목하지 못했다. 

비오이에서 대만 이잉크사로 이어진 먹튀 자본의 탄압

지난 3일 배재형 동지 장례날, 대만에서도 추모를 진행했다.
 지난 3일 배재형 동지 장례날, 대만에서도 추모를 진행했다.
ⓒ 하이디스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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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더듬어보니 2008년 당시에도 하이디스 노동자들은 먹튀 자본에 맞서 싸웠다. 그런데 7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여전히 같은 문제로 싸우고 있는 중이다. 2008년 당시는 중국의 비오이 자본과의 싸움이었는데 그 뒤 대만의 이잉크사로 바뀌었다. 그 사이 많은 노동자들이 정리해고를 당했고 급기야 대만 이잉크사 먹튀 자본은 엄청난 규모의 흑자경영에도 폐업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2008년 하이디스 노동자들이 아고라 청원란에 쓴, 아래의 글을 보면 먹튀 자본으로 인한 생존권 탄압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하이디스 노동자들의 다음 아고라 청원글

저희들은 경기도 이천에 있는 비오이하이디스(주)회사에 다니는 700명 노동자들입니다. 700명 중 500명이 여성노동자입니다. 너무너무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이렇게 국민 여러분들께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저희 회사는 하이닉스 반도체에서 2001년 분사가 되어 현대디스플레이테크놀로지라는 회사명으로 있다가 2003년 중국 비오이 그룹에 매각이 되었습니다. 매각되던 해인 2003년만 해도 연매출 7965억 원에 영업이익이 962억 원에 달하는 국내 3위의 탄탄한 LCD 생산 대기업이었습니다. 하지만 회사를 매수한 중국 비오이 그룹은 전 직원들을 모아놓고 약속했던 투자계획을 지키지 않는 등 투자를 게을리 하여 회사가 중국 비오이 그룹에 매각된 이듬해부터 매출액과 영업이익이 곤두박질 쳤습니다.

이에 저희들은 2006년 임금인상을 동결하고, 휴일근무수당 축소 등 단협 과정에서 협상해야하는 복지 부분을 양보하는 결단을 내리는 등 회사의 고통분담 안을 받아들여 같이 어려움을 나누었습니다. 2000여명에 달하던 인원이 약 1200명으로 줄어드는 등 현장의 강화된 노동 강도도 감수했습니다. 많은 여성노동자들이 식사를 걸러 가며 일을 했고 생리불순, 하혈, 방광염 등의 고통을 감내하며, 휴가 한 번 마음 편히 제대로 못가고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헛되이 2006년 9월 회사는 법정관리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회사를 매수한 후 중국 비오이 그룹은 투자는커녕 첨단기술에만 눈독을 들이고 우리 노동을 통하여 발생한 이익을 오히려 중국에 투자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중략)

비오이 매각과 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회사가 먹튀 자본의 놀이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동료들을 피눈물로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 기술력, 인력만 빼가는 '먹고 튀는' 자본에 희생당한다면 2만 명의 가족, 식구들의 생계가 파탄난다는 절박한 심정입니다.


2008년의 이 절박한 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하이디스 노동자들은 모든 것을 감내하고 회사를 살리기 위해 정말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무색하게도 먹튀자본에 대한 규제와 정리해고 중단은커녕, 비오이에서 대만 이잉크사라는 새로운 먹튀로 회사가 바뀐 뒤, 지난 2014년 840억 원의 당기순이익을 내는 흑자경영에도 불구하고 사측은 공장폐쇄를 선언한 것이다.

노동자들을 옥죄는 자본의 악랄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매일노동뉴스> 보도 등에 따르면, 하이디스 측은 고인이 죽기 전 노동절 집회에 참석한 것을 트집 잡아 "무단 휴무에 대한 손배 가압류 신청하고 민형사상 소송을 진행하겠다"고 압박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외 노동자들의 연대 외에 어떠한 보호수단도 없어

2월 1차 원정투쟁.
 2월 1차 원정투쟁.
ⓒ 하이디스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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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악랄한 자본의 탄압에 대항할 노동자들의 보호수단은 궁색하기 짝이 없다. 법도 국회도 정부도 어떤 힘도 되지 못하고 있다. 근로기준법상 정리해고 조항은 자본이 노동자들을 정리하기 좋은 쪽으로 해석, 집행되고 있다. 해외자본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입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 오래되었지만 국회는 여전히 말뿐이다. 이런 속에서 노동자가 기댈 곳이 어디 하나 있을까.

이런 어려움 속에서 하이디스 노동자들이 기댈 언덕이 되어주는 곳은 한국정부도 한국 국회도 아닌 대만의 노동자들이다. 대만의 노동자와 시민사회가 하이디스 노동자들에게 큰 힘이 되어 주고 있다. 미국자본에 의해 수천명의 암 피해자가 발생한 대만 RCA 노동자들이 하이디스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함께 아파하고 있다.

하이디스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를

2월 1차 원정투쟁
 2월 1차 원정투쟁
ⓒ 하이디스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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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형 동지는 "하이디스 투쟁 꼭 승리할 수 있도록 계속 연대해 주세요", "천사불여일행 노동해방"이란 유서를 남겼다. 고인의 뜻을 이어서 금속노조 하이디스 지회는 5월에 이어 6월 말에도 대만 원정투쟁을 떠났고, 5월 27일부터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노숙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그가 목숨을 끊은 지 54일째인 7월 3일, 금속노조와 지회는 사측과 ▲ 유족에게 위로금 지급 및 하이디스 회장 조의 표명 ▲ 정리해고 및 기타 현안 10일 이내 협상 등에 합의했다. 이상목 하이디스지회장은 "합의안에 아쉬운 내용이 있지만 열사를 편히 모시고 공장폐쇄, 정리해고 철회 투쟁을 하는 게 도리"라며 "합의했지만 지회의 투쟁기조는 변함없다"고 다짐했다.

하이디스 노동자들은 지금 슬픔을 딛고, 옆의 동지를 믿으며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러한 하이디스 노동자들에 연대해 달라던 그의 유언은 이제 우리가 지켜나가자. 하이디스 노동자들의 투쟁에 더 많은 이들이 함께하길 바란다. 반올림도 하이디스 투쟁을 더 많이 알리고 함께 하겠다. 나아가, 흑자경영에도 아랑곳없이 부당 정리해고로 노동자들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먹튀' 자본은 반드시 규제해야 한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의 노무사입니다.



태그:#하이디스
댓글1

2007년 황상기 씨의 제보로 반도체 직업병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이후, 전자산업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민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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