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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친구들과 헤어진 후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백화점에 간다거나, 영화를 본다거나, 버스를 타고 어디를 가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저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을 '보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7호선 고속버스터미널역은 우리 집에서 지하철로 15분 거리에 있다. 그래서 가끔 서점이나 극장, 식당, 카페 등을 이용하려 들르곤 한다. 이 역은 꽤 복잡하다. 3호선과 7호선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고, 각종 편의 시설이 몰려 있어 이용객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처럼 길치에다가 방향치까지 겹친 사람들은 길을 잃기 쉬운 곳이다.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고속버스터미널 매표소 앞에 서 있던 적도 여러 번이다.

그때마다 얼른 터미널을 벗어나기에 바빴던 것 같다. 얼른 목적 장소로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이 내 목적지였다.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의 영향이었다.

매일 지나치던 고속버스터미널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옥상 정원 모습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옥상 정원 모습
ⓒ 황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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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건축가 조한은 어느 유럽의 역사가 담긴 아름다운 건축물 앞에 선 여행자처럼, 기억을 좇아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을 여행했다. 내가 자주 가던 공간 옆에 우뚝 서 있던, 결코 매력적이지 않던 공간을 누군가는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무거운 콘크리트 구조물 사이를 날아가는 가벼운 철재 다리를 걸으니 방금 발굴된 고대 신전 위로 걷고 있는 것 같다."  –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 본문 중에서

그는 또한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순환'을 논했다. 인간에게도 전성기와 쇠락의 시기가 있듯, 공간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으니 지금의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은 전성기 시기를 거쳐 쇠락의 시기도 지나 어디쯤 와 있는 듯 했다. 어디쯤 와 있는 건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역에서 내려'호남선' 방향이라고 적힌 낯선 3번 게이트로 나왔다. 이 쪽으로 가면 금방 터미널 건물을 만날 수 있게 되리라 기대하면서.

그런데 터미널은 바로 보이지 않았다. 대신 파미에스테이션이라는 공간이 나왔다. 처음 보는 공간이었다. 세련된 분위기의 레스토랑들이 줄을 이어 늘어서 있었고, 각각의 레스토랑에 들어찬 사람들이 맛있게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중에 집에 와 찾아보니 파미에스테이션은 기존의 센트럴시티를 리모델링해 지난해에 선을 보인 공간이라고 했다. 겨우 몇 개월 가지 않았을 뿐인데 내가 기억하던 공간이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탈바꿈돼 있었던 것이다. 뭐, 다 좋은데... 나는 이 공간을 만나자마자 헷갈리기 시작했다. 한 10분 정도를 헤매다 드디어 터미널로 들어설 수 있었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은 1978년 착공을 시작해 1981년 완공되었다. 지금은 지상층에만 승차장이 있는데, 처음에는 3층과 5층에도 승차장이 있었다. 5층 승차장은 1988년에 폐쇄되었고, 3층 승차장은 1992년이 폐쇄됐다.

그런데, 폐쇄된 이유가 웃기다. 버스가 올라가는 승차장을 교량 구조가 아닌, 사람들만 이용하는 일반 건축 구조로 설계해 버스의 하중을 견디지 못해 폐쇄했다는 것이다. 설계와 시공 문제였던 셈인데, 버스를 올려 놓을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버스 하중을 견디지 못하게끔 설계를 했던 걸까.

지상층에서만 버스를 탈 수 있게 되면서 버스 이용객도 불편을 겪었지만, 상가들이 더 큰 피해를 입었다. 승차장이 폐쇄되자 사람들은 3층, 5층을 올라갈 이유가 없어졌고, 각 층에 들어서있던 상가들은 하나 둘씩 문을 닫아야 했다. 그 해 1764개 점포 중 500여 개 점포가 문을 닫았다고 한다. 공간이 쇠락하자, 누군가의 삶도 쇠락의 길로 들어선 셈이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계속 쇠락할 수는 없다. 전성기만큼은 아닐 지라도 다시 한번 일어설 기회는 있는 것이다. 공간도 마찬가지. 지금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3층을 찾는 다면 진한 꽃향기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결국엔 꽃 상가들이 3층을 차지하게 됐다. 2,4층은 혼수 용품 가게들이, 5층은 2009년부터 강남웨딩컨벤션이 들어와 있다. 6층에서 8층까지는 아직도 죽은 공간으로 남아 있다.

무엇보다 옥상에 올라보고 싶었다. 그곳에 작은 정원이 펼쳐져 있다고 했다. 2011년 서울시 옥상녹화사업의 일환으로 1만 3000제곱미터 공간에 아담한 정원을 들여놓은 거란다.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 8층까지 둘러본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에 왔다. 읽은 대로 아담한 정원이 옥상 양 편에 마련돼 있었다.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작고 아담한 정원이었다.

옮겨진 기억은 각기 다른 공간의 기억을 갖게 되겠지

(조한 지음 / 돌베개 펴냄 / 2013.08 / 1만6000원)
▲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 (조한 지음 / 돌베개 펴냄 / 2013.08 / 1만6000원)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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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은 글을 이렇게 끝마치고 있었다.

"해질녘, 나의 오래전 놀이터였던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옥상의 정원에 서서 60년 후에도 이곳에 다시 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 본문 중에서

뜨거운 햇살이 내리는 오후, 나 역시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옥상 정원에 서서 저 멀리 보이는 남산 타워를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다 햇볕이 너무 뜨거워 그늘진 벤치에 앉아 잠시 쉬고 있으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기억을 좇지 않았다면 나는 절대 이 곳에 올 수 없었을 테고, 옥상에 문을 연 고깃집도, 옥상에 자리한 성당도 볼 수 없었을 거라고. 그런데 이제 더 중요해진 건 내 기억이었다. 처음에 이곳은 다른 이의 기억이 담긴 공간일 뿐이었지만, 이제 이 공간은 내 기억의 공간이 돼 버린 것이다.

책에서 조한은 강남 고속버스터미널뿐만 아니라, 홍대 앞 서교365, 인사동 쌈지길, 정동길, 충정 아파트, 윤동주문학관, 광화문광장 등등 본인의 기억이 담긴 공간을 찾아 여행을 하고 있다. 책을 읽은 이라면 나처럼 그의 기억을 좇아 한 번쯤은 걸음을 옮겨봐도 좋을 것 같다.

생소한 곳으로 걸음을 옮기든, 자주 가던 곳으로 가든, 분명 기존과는 다른 시선으로 그 공간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기억이 다른 이의 기억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옮겨진 기억은 각기 다른 공간의 기억을 갖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조한 지음 / 돌베개 펴냄 / 2013.08 / 1만6000원)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 - 건축가 조한의 서울 탐구

조한 지음, 돌베개(2013)


태그:#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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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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