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쥐는 물론이고 쥐에 관한 이야기나 사건이라면 나도 참 싫다. 그런데도 내게도 쥐와 얽힌, 좋지 않은 기억들이 아직 있다. 특별히 유년의 기억 중에서 쥐와 관련한 분하고도 서글픈 것들은 죽을 때까지 어쩌면 잊지 못할 것이다.

어려서 나는 꽤 큰 건물에 살았다. 아버지가 하시던 고등공민학교 건물이었는데, 단층이었지만 일반주택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건물이었다. 이 건물을 개조하여 우리 가족은 그 안에서 살았다. 그래 내 방에도 중천장이란 게 있었는데, 중천장과 지붕 사이가 상당히 너른 공간이었다. 이 공간을 쥐들이 무단으로 점거하고는 거기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우리는 쥐들이 침입을 하지 못하게 백방으로 손을 썼으나 쥐들의 집요한 공세를 막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쥐들의 일상을 매일 겪으며 살았다. 그들의 일상은 나의 일상생활에 큰 짐이었고 그들은 내게 원수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중천장 위를 걷거나 뛰어다녔으며, 그들의 온갖 소리를 받아내며 밤잠을 설쳐야 했다.

그들은 분뇨를 또한 내 머리 위의 중천장 안에서 해결했다. 그 매캐한 냄새를 나는 지금도 기억 속에서 떨쳐버리지 못한다. 이런 쥐들을 두고 보는 건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뾰쪽한 수가 없었다. 이사를 가거나 집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거나 하는 수가 있었지만 그때 우리 집 형편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쥐들의 집 아래에 억눌려 살았다. 참 안타깝고도 슬픈 기억이고 상처였다.

유년의 상처 하나를 꺼내놓으며, 쥐들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건 비겁하다. 쥐들과 함께 살아야 했던 건 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였다. 내가 안고가야 했던 가난의 문제였다. 쥐들이 내게 안겼던 문제는 나의 가난이 내게 안겼던 문제였다. 그리하여 유년 시절 내게 남겨진 쥐에 관한 좋지 않은 기억과 어두운 상처를 나는 현실로 인정하고 안고 살기로 하였다. 그것이 불편하면 하나씩 꺼내놓고 만지며 치유해 나가기로 하였다. <쥐들>(2005)이란 책을 읽어가면서 스스로를 치유해보겠다고 해 본 생각이다.

이 책은 우리가 쥐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쥐와 인간이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우리가 미처 몰랐거나 무심코 보고 지나쳤던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쥐가 인간에게 해로운 동물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전염병을 옮길 수도 있는 위험인자라는 것은 사실 두렵기까지 하다. 그러나 쥐가 인간에게 해롭기만 할 뿐인가? 인간이 만든 문명 세계가 빠르게 확장되면서, 그 부작용과 부산물들은 늘어갔다. 인간이 버린 음식물 쓰레기가 늘어가면서 쥐의 개체도 늘었다.

쥐가 늘어난 건 쥐에게서 찾을 문제가 아니라 인간에게서 찾아야 할 문제이다. 쥐가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더 심각한가 아니면 인간이 쥐에 대해서 보이는 살해 욕구가 더 강한가. 쥐의 폐해를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이들은 쥐를 일망타진해보겠다는 야망(?)을 한 번쯤은 가져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쥐는 인간에게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쥐의 생명력이, 지금까지 인간이 쥐를 없애버리려 했던 모든 시도들보다 더 강하다. 그래서 쥐는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이다.

문명 세계 안쪽, 인간의 주변에 살면서 인간이 버린 음식물 쓰레기를 먹고 사는 쥐가 생태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과의 관계를 떠나서 생각해보더라도 쥐는 엄연히 생태계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동물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인간이 쥐에 대해서 보이는 적대감과 살해 욕구는 지나치게 감정적이며 인간중심적이다. 쥐가 많아져서 생태계를 교란하는 일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그 원인을 오직 쥐에게 돌리는 것도 온당하지 않다. 쥐를 먹고 사는 뱀의 개체가 줄거나, 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생태계에 교란이 온다면, 그리고 거기에 인간의 책임이 크다면, 우리는 쥐를 탓할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로버트 설리번은 쥐를 살피면서 뉴욕의 역사를 동시에 살핀다. 뉴욕의 역사 또한 인간이 저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온 역사였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뉴욕의 시민들은 쥐를 끝없이 살해해 왔고, 뉴욕의 정치가들과 지도자들과 이들이 주도해 온 정치는 가난한 이들, 소수자들을 억압해 왔다. 그들은 끝없이 음식물 쓰레기를 양산해 내면서도 그것을 줄여보겠다고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이를 실천하지도 않았다. 쓰레기의 양과 비례하여 늘어가는 쥐들을 보며, 이를 화학약품으로 박멸하겠다는 발상과 실천만을 그들은 되풀이하였다.

그들이 쥐를 잡겠다고 뿌린 유독한 화학물질들은 결국 강과 바다로 흘러들어 인간의 몸을 파고들었을 것이다. 할렘에 사는 가난한 주민들과 히스패닉 등 소수자들을 대하는 뉴욕의 정치가들과 다수의 뉴욕시민의 모습을 이 책을 통해 접하면서 인간에 대한 비애감마저 느낀다. 페스트가 창궐하는 상황에서 이를 과학적으로 퇴치하여 공동체 성원을 한 사람이라도 지켜내려 하기보다는 끝까지 자기 잇속만을 챙기는 모습을 보는 것도 안쓰럽다.

설리반은 그런 비정한 역사의 현장에서 뒤꼍으로 사라져간 쥐들과, 역사의 조명을 받지 못하고 사라진 사회적 소수자들과 약자들을 이 책을 통해 작심하고 조명한다. 그리고 그의 작업은 상당부분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쥐들은 인간의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으며, 풀뿌리 민중들은 권력과 그 권력이 행사하는 폭력에도 굽히지 않고 자기 존중감과 자기결정권을 확보해 왔다고 그는 이 책에서 부각시킨다.

쥐들이 살아남은 것은 그들의 타고난 생존본능 덕택이며, 약자인 인간이 억압의 역사에서 살아남은 건 단합된 군중의 힘을 보이며 조직화된 정치운동으로 투쟁한 결과라고 그는 강조한다. 쥐와는 달리 인간에게는 노동조합이나 세입자 조합, 직업인 협의회 등을 조직하여 불의에 맞서 싸워 자신들의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싸움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활동가들의 역할이 컸다고 설리반은 강조한다.

페스트가 창궐하던 시기 뉴욕의 정치계와 사업계, 언론계의 부패상을 이 책이라는 창문을 통해 들여다 볼 수 있는 것도 읽으면서 얻는 재미있는 일들 가운데 하나다. 페스트라는 치명적인 질병에 대처하는 뉴욕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언론들의 모습은 절망적이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견, 그리고 자기 잇속만을 챙기는 모습 또한 참아내기 어렵다.

그 상황 속에서 피해를 고스란히 안고 고통을 겪던 소수자들과 약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차라리 민망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지금 여기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메르스의 공포를 하루하루 겪으면서도 일상을 떠날 수 없는 시민들이 있는가 하면, 병원의 이익을 위해서는 모든 정보를 차단하는 병원들과 이를 눈감아주는 권력자들과 이들을 두둔하는 언론들이 아직 우리 가까이에 있다. 뉴욕의 이야기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이야기다.

인간이 쥐보다 나은가? 이는 어쩌면 수사적 모순이다. 둘은 비교할 대상이 아닌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가 쥐와 인간을 비교하거나 인간을 쥐에 빗대어 본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가 "인간이 쥐"라는 문학적 표현을 굳이 쓴 이유는 무엇일까. 쥐의 모습에서 사회적 약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을 그는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의 억압하는 것을 쥐의 이야기를 통해서 설리반은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인간이 쥐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을 뿐 악행의 정도를 따진다면 인간이 쥐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메시지를 그는 또한 들려주고 있다.

쥐의 존재를 두고 인간이 쥐에 대해서 갖는 반감은 지나치게 감정적이며 피해망상일 뿐이다. 쥐가 인간을 간섭하고 방해한다 하더라고 쥐를 그렇게 싫어하고 무자비하게 학대하고 죽일 권리가 인간에게는 없다. 다만 쥐보다 인간이 힘이 세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에게 끝없이 살육 당했으면서도 살아남은 쥐와 인간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것은 인간에게 해로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들 이야기는 그 자체로 쓰면 될 것이지 왜 하필 쥐를 끌어와 인간을 이야기하는가, 라고 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도전적으로 묻기보다는 이렇게 묻는 편이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인간은 쥐보다 훨씬 건실하게 사는가. 인간은 쥐보다 공동체적이며 다른 사람이나 다른 존재를 배려하며 사는 종인가? 쥐는 인간이 없애버려야 할 종인가? 인간과 쥐, 둘 중 지구라는 행성에서 먼저 사라질 존재는 누구(또는 어떤 것)일까? 그리고 둘 중 지구별을 위해 먼저 사라져야 할 종이 어떤 종인가, 라고 질문한다면, 우리, 만물이 영장이라는 인간은 어떠한 답을 내놓을까?

"현재의 쥐가 작다고 해서 미래의 쥐 역시도 작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쥐가 작아진 것은 환경과 맞물린 적응의 결과이지, 쥐는 무조건 작아야 한다는 숙명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쥐의 조상 중 하나인 포베로미스 패터르소니(Phoberomys pattersoni)도 이들에는 못 미치지만, 몸 길이 2.5m에 무게는 700kg에 달하는 거대한 덩치로 자라났다.(....) 현재의 쥐가 작다고 해서 미래의 쥐 역시도 작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쥐가 작아진 것은 환경과 맞물린 적응의 결과이지, 쥐는 무조건 작아야 한다는 숙명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천적이 사라진 생태계에서 쥐들끼리의 경쟁을 통해 거인증을 가진 쥐가 출현할 가능성 역시 매우 높다.."(이은희, '거대 쥐가 생태계를 습격한 사연' 매일경제, 015.03.18 치)

이 책의 끝부분에서 설리반은 쥐들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그(쥐구멍) 아래서도 엄연한 삶을 살아가는 생명체의 풍성한 활기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좋거나 싫거나 그것이 사실이다(371 쪽)." 쥐는 쥐다. 쥐들도 생명이며, 지구별의 소중한 생태계의 일원이다. 그들은 인간이 살아있는 한 인간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어쩔 것이냐?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긍정하는 편이 인간의 정신건강에도 좋지 않겠는가. 그들이 주는 피해를 최소로 줄이면서 그들과 공존할 수 있는 방법들을 지혜롭게 찾아가는 것이 인간의 길일 것이다. 인간의 문제를 쥐들에게 돌려버리는 인간의 자기중심과 책임 회피의 습성도 이참에 내려놓고 가자.

덧붙이는 글 | 로버트 설리번, 문은실 옮김, 쥐들, 생각의 나무, 2005



쥐들

로버트 설리번 지음, 문은실 옮김, 생각의나무(2005)


태그:#쥐, #쥐의 천적, #거대 쥐, #쥐는 인간이다, #사회적 약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나는, 말이 사물을 올바로 담아낼 때까지, 사물들을 올바로 이끌어 낼 때까지 말과 처절하게 대면하려 한다. 말과 싸워서, 세상과 싸워서, 자신과 싸워서 지지 않으려 한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