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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섭이의 칼빵 교실 한쪽을 보니 정섭이가 문구용 칼로 교과서를 오려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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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섭이의 교과서 '칼빵' 사건

우리 속담에 '하던 지랄도 멍석 깔아주면 안 한다'는 말이 있다. 평소에는 시키지 않아도 잘 하던 일을 막상 하라고 떠받들어 주면 안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딴짓' 세계에 몰입하는 열다섯 살 중학생들은 누가 멍석을 깔아주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는다. 그들 나름의 독야청청 외길을 걸으며 평범한 일상에 기어이 한 줄기 뇌성벽력을 번쩍 내리치고야 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중학생들의 딴짓 이야기' 두 번째(첫 번째 이야기)는 정섭(가명)이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학기말 시험을 2, 3일 남짓 남겨둔 무렵이었다. 이미 나가야 할 진도도 다 마쳤고 시험도 며칠 안 남은 터라 학생들이 시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자습 시간을 준 바로 그 날. 학생들은 저마다 수업 시간에 공부한 교과서나 활동지 혹은 학원에서 받아온 기출 문제 자료 등을 읽거나 풀고 있었다. 정섭이만 빼고.

좀 소란스럽기는 했지만 시험 준비 분위기를 물씬 풍기던 교실 한쪽을 보니 정섭이가 무언가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게 보였다. 손에는 문구용 칼을 쥐었다. 벌써 여러 장의 종이가 책상 한 쪽에 잘려 나와 있었다. 다가가서 보니 문구용 칼로 교과서를 오려내는 중이었다. 교과서를 다 잘라내는 건 아니고 책의 가운데 부분을 타원형으로 잘라서 파내고 있었다. 이른바 '책 칼빵(칼로 손이나 신체에 상처를 내는 것은 이르는 은어)'. 책 속에는 타원형의 구멍이 이미 일정 깊이를 이루고 있었다.

정섭이는 내가 다가가서 책상 앞에 섰는데도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나를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오로지 온 정성을 다해 포를 뜨듯 한 장 한 장 종이를 잘라내고 있을 뿐이었다. 온전하고 순수한 몰입의 상태로 보였다.

"정섭아, 뭐 하는 거예요?"
"아~ 이거요? 여기를 필통으로 쓰려고요."
"필통이라고? 필통 없어요?"
"네, 아까 장난치다가 부서졌어요."
"그럼 이 책은 못 쓰게 되는데..."
"진도 끝났어요. 어차피 시험 끝나면 버릴 건데요, 뭘."

거기서 일단 우리의 대화는 멈추었다. 생각해보면, 이미 다 배웠고 어차피 버릴 교과서를 필통으로 재활용하려고 나름의 아이디어를 냈다는데 이를 덮어놓고 나무랄 수만도 없었다. 조금 더 물끄러미 정섭이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필통 용도로는 책이 너무 커서 어울리지도 않을 것 같고, 칼은 다칠 수도 있으니 넣어 두면 좋겠다고 말해 주었다.

정섭이도 생각이 바뀌었는지 아니면 나의 말을 지시나 명령으로 알아들었는지 다른 말없이 하던 일을 멈추고 칼을 책상 속으로 집어 넣었다. 그렇게 '교과서 칼빵' 사건 혹은 '교과서 필통 만들기 미수 사건'은 일단락됐다. 물론 정섭이가 필통으로 쓰겠다던 칼빵 교과서는 너덜너덜해진 채 바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정섭이의 이런 '딴짓'은 이전에도 종종 있었다. 지름이 15cm쯤 되는 동그란 거울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걸 보면서 웃다가 찡그리다가 혀를 날름거리다가 온갖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다거나, 운동장 어딘가에서 주워온 긴 나무 막대기를 교실에서 휘젓고 다니다가 선생님한테 걸려서 교무실로 끌려온다거나, 수업 중에 갑자기 큰 소리로 괴성을 지르거나 하는 등의 일이 잦았다.

그때마다 녀석은 너무도 태연자약했고 그걸 지켜보는 다른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은 혀를 내두르거나 어이 없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정섭이의 딴짓은 멈출 줄 모르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붉은 틴트로 찍은 입술 도장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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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희의 입술 벽화 벽에는 영희가 제 입술로 직접 찍어 무늬를 새긴 빨간 자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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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으로 접어들던 무렵, 아침 조례를 하려고 교실로 가고 있던 중이었다. 바로 옆 반 담임인 김 선생님이 영희(가명)를 교실 앞 복도에 세워놓고 꾸중을 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싶어 물었더니 김 선생님이 복도 벽을 가리켰다.

복도 벽에는 빨간 자국이 여러 개 나란히 찍혀 있었다. 처음에는 누가 그림을 그려놓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김 선생님의 말로는 영희가 제 입술로 직접 찍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새빨간 립스틱 아니 '틴트'를 듬뿍 발라서 복도 벽에 입술 도장 벽화를 찍고 다니다가 현행범으로 담임 선생님한테 딱 걸린 거였다. 속으로 '아이고!' 소리가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그리고 도대체 왜 이런 일을 벌였을까 하는 의문이 뒤따랐다.

그날 2교시가 영희네 반 수업이었다. 학생들이 활동지를 푸는 사이 잠깐 영희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오늘 아침에 왜 그랬어요?"
"외로워서 그랬어요!"
"외...롭...다고?"
"네!"
"그러니까 외로움을 입술 도장 벽화로 표현해 승화시켰다는 말이네?"
"빙고!"

너무도 해맑은 표정으로 손가락 권총까지 쏘며 '빙고'라고 대답하는 영희 앞에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외-로-워-서, 복도 벽에 빨간 입술 자국을 새겨 넣은 열다섯 살 여중생의 고독한 예술혼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선생이 되고 말았다.

<분홍립스틱>이라는 대중가요 가사에 "오늘 밤만은 그댈 위해서 분홍의 립스틱을 바르겠어요. 그대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분홍의 입술 자국 새기겠어요"라는 표현도 있고, "내일이면 잊으리. 꼭 잊으리. 립스틱 짙게 바르고~" 그렇게 시작하는 유명한 가요도 있다. 그런데 영희가 학교 복도 벽에 새겨놓은 입술 도장은 "그대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입술 자국"도 아니었고 "내일이면 잊으리. 꼭 잊으리"라며 이별을 예감하고 짙게 바른 립스틱도 아니었다. 외로움이 너무 깊어 연애에 목마른 이팔청춘 중딩이 저지른 한바탕 구애의 몸부림, 바로 그것이었다.

그날 복도 벽에 남긴 입술 자국을 지우느라 영희는 혼쭐이 났다. 하지만 사랑을 갈구하는 불타는 창작욕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며칠 후 다른 반에 수업을 하러 갔는데 교실 뒤 벽에 크고 붉은 꽃 한 송이가 그려진 것을 발견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꽃을 닮은 입술 자국. 누구의 흔적이냐고 학생들에게 물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영희의 이름을 댔다. 점심 시간에 놀러 왔다가 흔적을 남기고는 절대로 손대지 말라며 투명한 테이프로 코팅까지 해 두고 갔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병도 아주 깊은 중증이다. 곳곳에 유혹의 흔적을 남겨 사랑을 찾으려는 지독한 열병. 불타는 사랑을 말릴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영희야, 벽이랑 뽀뽀하는 건 좀 다시 생각하면 안 될까요?

오리는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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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등분 된 오리 필통 명진이는 과학 시간에 숙제를 안 해 와서 과학 선생님에게 심하게 꾸중을 듣고 기분이 상했고 화풀이로 오리 모양의 헝겊 필통을 세 조각으로 찢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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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수업이 무르익을 무렵. 무심코 왼쪽 맨 끝 분단 제일 앞줄(교탁 바로 아래와 더불어 교사의 시선이 자주 놓치게 되는 사각지대다)에 앉은 명진(가명)이의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성능 좋은 줌 렌즈로 확대한 듯 책상 위에 펼쳐진 장면이 클로즈업 됐다. 명진이의 책상 위에는 때가 절어 거뭇하게 변하긴 했지만 아직은 노란색을 잃지 않은 오리 모양의 천 조각이 찢어진 채 놓여 있었다. 칼질의 흔적도 선명했다. 명진이가 필통으로 쓰던 것이라는 걸 한눈에 알았다.

헝겊 오리는 마치 진짜 오리를 손질한 듯 '머리-내장(솜뭉치)-천 조각'의 세 부위로 나뉘어 책상 위에 차례대로 펼쳐져 있었다. 명진이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그...냥...요."
"그냥?"
"예. 그냥... 아까 수업 시간에 선생님한테 혼나고 그래서..."

그러니까 이전 과학 시간에 숙제를 안 해 와서 과학 선생님에게 심하게 꾸중을 듣고 기분이 상했고 화풀이로 오리 모양의 헝겊 필통을 찢어버렸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곤충을 해부하듯 필통을 머리-가슴-배 아니 머리-내장(솜뭉치)-가죽으로 삼등분 해놓은 것을 보니 뜨악했다. 분노의 감정을 이토록 거칠게 드러내고, 수업 시간이 바뀌었는데도 그걸 책상 위에 가지런히 펼쳐놓는 상황이 자주 있는 일도 아니어서 걱정이 되었다.

이젠 삼등분으로 찢어놓은 필통 조각을 치웠으면 좋겠다고 하려다가 먼저 명진이의 분노를 좀 더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일단 그냥 두고 수업을 이어갔다. 쉬는 시간에 따로 불러 이야기를 해 볼 생각이었다.

시간이 지나 수업을 마치기 10여 분 쯤 남았을 때 명진이가 그 조각들을 주섬주섬 집어서 책상 속으로 넣는 게 보였다. 교실 뒤편에 있는 쓰레기통에 넣어도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냉큼 그렇게 하고는 자리로 돌아와 앉으며 씩~ 웃어 보인다. 제 딴에도 자신의 행동이 좀 불편했다는 걸 그렇게 어색한 웃음으로 보여준 것이다. 분노한 마음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듯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 수업 후 따로 명진이를 부르지 않았다.

자신의 여러 가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스스로도 불편하고 다른 사람을 더욱 놀라게 하는 '딴짓'으로 해결하(려)는 중학생들이 제법 있다. 그 감정의 종류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 '딴짓'에 바로 냉정한 지적이나 벌칙을 들이대기보다는 조금만 시간을 주거나 지켜봐 주는 것만으로도 '딴짓'은 시행착오를 동반하는 성장의 교훈이 되기도 한다. 중학생들의 '딴짓'은 자주 엉뚱하고, 때로는 위험하지만 그 모두는 격렬하고 절실한 성장의 과정인 셈이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