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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 마디 책 표지
ⓒ 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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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안을 떠나 어디로 갈지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그는 베이징에 가서 다른 사람을 도와 건축현장에서 차를 몰게 되었다고 대충 둘러댔다. 차오칭어는 팡리나가 일을 낸 것을 알고 있었고 뉴아이궈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것도 알고 있었다. 뉴아이궈는 차오칭어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하지 않았고 그녀도 굳이 들춰내지 않았다. 이렇게 서로 아픈 부분을 들춰내지 않은 것을 보고서 뉴아이궈는 차오칭어가 과연 엄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 179p

​"문학은 한 민족과 다른 민족들 사이의 차이를 쓰는 것이다"

소설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 마디>의 작가 류전윈의 말이다. 그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세계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서로 같다는 것을 알아야 세계가 다른지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 문학이란 나와 남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며 나와 남의 단위는 곧 민족이다.

<고향의 국수와 꽃>, <말 한 마디 때문에> 등의 작품으로 명성을 얻은 류전윈은 평생토록 중국적 관점에서 중국인의 삶을 다룬 작품을 썼다. 특히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는 중국인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냈고 이 과정에서 중국 신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아시아에서 지난 5월 펴낸 신작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 마디>도 이러한 연장선 위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전작 <말 한 마디 때문에>의 2부 겸 스핀오프 격 작품이기도 하다.

소설은 뉴아이궈라는 인물의 관점에서 펼쳐진다. 그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멀리서 보면 더없이 평범하고 가까이서 보면 한없이 특별한 삶을 살았다. 어린 시절 친구와 진한 우정을 나누고 군에 입대하며 고향을 떠나서 있다가 제대 후에는 누나의 주선으로 결혼을 한다. 아내와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하던 차에 아내가 바람이 난 것을 알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심난하던 와중에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일자리를 구하지만 그곳에서 사귄 친구의 아내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도망치듯 고향으로 돌아온다. 다시 찾은 고향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뉴아이궈는 우연한 계기로 어머니의 고향 옌진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예기치 않은 깨달음을 얻는다.

뉴아이궈가 펑원슈에게 했던 말도 역시 취중에 한 말이었다. 하지만 몇 사람의 입을 거치면서 말짱하게 깨어있는 상태에서 한 말이 되어버렸었다. 이 말은 다시 몇 사람의 입을 거쳐 뉴아이궈의 귀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뉴아이궈가 손에 칼을 쥐고 사람을 죽이려 했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샤오쟝의 아들이나 팡리나를 죽여야 할 것이 아니라 펑원슈를 죽여야 할 것 같았다.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친구에게 털어놓았더니 친구가 이를 폭로하는 바람에 자신이 했던 말이 모두 칼이 되어 반대로 자신을 찌르려고 달려들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런 말들을 자신이 했었던가? 했었다. 이런 의미였나? 이런 의미였다. 또 이런 의미가 아니기도 했다. 하지만 더 이상 해명할 방법이 없었다. 시간이 변하고 장소가 변하면 사람도 변하기 때문이다. 말이 몇 가지 통로를 거치면서 뉴아이궈가 사람을 죽이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살인한 것보다 더 악독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말이 독한 것은 바로 이런 데에 있었다. - 169p

소설은 어린 시절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주인공 뉴아이궈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보여준다. 아울러 이야기 중간중간 뉴아이궈의 어머니 차오칭어의 이야기를 삽입한다. 그녀가 어린 나이에 유괴되어 친위안으로 팔려오고 새로운 가정에 적응해서 결혼까지 하는 과정을 곁가지로 보여주는 것이다. 차오칭어가 고향인 옌진을 잊지 못하고 잃어버린 아버지 우모세를 찾으려 했던 과정도 그려진다.

이야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뉴아이궈는 그가 만나본 적 없는 외할아버지 우모세와 유사한 삶의 경로를 거친다. 아내를 잃고 거짓으로 그 아내를 찾는 척 연기하며 외지를 떠도는 것부터가 그렇다. 이를 통해 소설은 뉴아이궈의 이야기에서 어머니 차오칭어의 이야기가 되었다가 다시 우모세의 이야기가 된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조손은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 한몸이 되고 결말부에 보여진 뉴아이궈의 결심에 따라 마침내 한 걸음을 내딛게 된다.

세 사람이 먹은 음식은 양육탕과 샤오빙이었다. 뉴아이쟝과 뉴아이샹은 몇 술 뜨다가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뉴아이궈는 창저우에서 친위안으로 오느라 사흘 동안 바삐 움직인 데다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 못했다. 이제 눈앞에 친위안의 음식을 대하고 보니 너무나 맛있어 허겁지겁 샤오빙 다섯 개를 먹어치우고 커다란 사발에 가득 담긴 양육탕을 깨끗이 비웠다. 온몸에 땀을 흘리면서 정신없이 먹어댔다. 순간 차오칭어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고 한 달 동안 음식을 넘기지 못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반면에 자신은 음식이 너무 맛있어 단숨에 샤오빙 다섯 개와 커다란 양육탕 사발을 깨끗이 비웠다는 걸 생각하니 송구스런 마음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빈 그릇을 두 손으로 받쳐 든 채 그는 하염없이 울었다. - 217p

'옌진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라는 부제엔 독특한 의미가 담겼다. 소설은 원치 않게 고향을 등진 외할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또 다른 고향 친위안을 떠나 외지를 떠돈 뉴아이궈의 삶을 다룬다. 그리고 이들의 삶은 돌고돌아 마침내는 옌진을 찾은 뉴아이궈가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되며 마쳐진다. 작가는 이로부터 3대를 이어져 내려오는 어떤 동질성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결국 자신의 뿌리를 찾고 나서야 얻어지게 되는 것이다. 흔히 류전윈을 중국 인민들의 삶을 가까이서 그려낸다는 이유로 사실주의 작가로 분류되는데 그의 이면에는 사실적이고 합리적이기보다 민족적이고 지역적인 이념이 더욱 많이 들어있는 것을 본다.

중국은 지난 30여 년간 세계 어느 나라보다 급격한 격변기를 겪었다. 그전까지 2억 명 정도이던 도시 인구가 전체인구의 절반이 넘는 7억 명까지 폭증하기도 했다. 거부하기 어려웠던 산업화와 이촌향도의 흐름에 따라 농촌사회는 점차 해체되기 시작했고 고향을 떠난 사람 가운데 상당수가 파편화되고 고독한 삶을 살아가기도 했다. 오늘날 중국의 성장은 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중국 현대소설에 익숙하지 않아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다. 상황묘사와 인물의 대사가 서로 다른 장에서 중복되는 부분이 그러했는데 각기 다른 단편을 장편으로 묶은 이후 탈고를 거치지 않은 상황이 아니라면 어떠한 의도에서 이렇게 썼을까 싶어 의문이 들기도 했다.

더불어 작가의 문장이 잔잔하면서도 감상적이어서 순간 울컥하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 부분도 종종 있었다. 이에 대해 옮긴이는 '습관적 표현들이 가져다주는 수사적 소박함'이라고 적었는데 이러한 표현방식이 소설의 내용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독특한 인상을 자아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소설의 초반 뉴아이궈와 펑원슈의 아버지가 어떻게 절교를 하게 되었는지를 묘사한 부분이 압권이었다고 생각한다.

사방은 온통 칠흑같이 깜깜했지만 낮에 땅을 갈던 트랙터는 이제 밤을 갈고 있었다. 전방의 어둠이 대낮에 등 뒤로 갈아엎어졌던 진흙처럼 두 개의 라이트에 의해 양쪽으로 갈라져 뒤집혔다. 어둠은 갈수록 더 많아졌지만 갈아엎어진 만큼 줄어들었다. 차오칭어는 어둠을 두려워했지만 커다란 라이트가 어둠을 갈아엎고 있고 옆에는 허우바오산이 있어 괜찮았다. 그녀는 앞만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116p

책을 읽으며 가장 불편했던 건 지나치게 많은 오자였다. 가뜩이나 중국식 이름과 지명이 많이 나오는 데다 등장인물도 적지 않은 소설인데 두세 장마다 하나씩 등장하는 오자까지 있다 보니 어지럽게 느껴졌다. 한 명의 직원이라도 제대로 교열을 보았다면 이러한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인데 하는 생각을 하니 왈칵 짜증이 치밀었다. 나름대로 뛰어난 부분이 많은 작품을 번역해 소개하면서 수두룩한 오자를 방치하는 건 최소한의 임무도 방기한 무성의한 태도가 아닌가 싶다. 다음 판본에서라도 출판사 측이 신경을 썼으면 하고 바란다.

건량을 나눠 먹은 두 사람은 또다시 버스 정거장에 있는 홰나무 아래 앉아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차가 한 대 들어왔지만 차오칭어는 타지 않았다. 그 다음 차가 들어왔는데도 차오칭어는 타지 않았다. 그러자 라오차오의 아내가 말했다.
"처음에 널 샹위안현으로 시집보낼 때는 너무 멀게만 느껴졌는데 이제는 먼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차오칭어가 말했다. "왜요?"
"길이 머니까 내가 이렇게 널 배웅할 수 있잖니." 그러고는 한 마디 덧붙였다. "너를 만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고서야 이렇게 많은 얘기들이 생각난 것과 마찬가지지."
마지막 시외버스가 떠나려고 하자 차오칭어는 그제야 차에 올랐다. 차에 올라 차장 밖을 내다보니 텅 빈 정거장에 엄마 혼자만 남아 지팡이를 짚은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차오칭어의 눈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 226p

덧붙이는 글 |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 마디>(류전윈 지음 / 김태성 옮김 / 아시아 / 2015.05. / 1만3천500원)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 마디

류전윈 지음, 김태성 옮김, 도서출판 아시아(2015)


태그:#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 마디, #아시아, #류전윈, #김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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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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