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포스터

영화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포스터 ⓒ 롯데엔터테인먼트


<터미네이터>는 냉전의 유산인 핵무기의 두려움이 짙게 드리운 디스토피아 세계관과 <할로윈> <13일의 금요일> 같은 슬래셔 무비에서 빌린 느낌이 강한, 포기하지 않는 살인마가 시간 여행과 로봇이란 SF적 설정과 만났던 영화다. 이들 요소는 추격과 생존이 맞물리는 단순하면서 강렬한 서사에 잘 녹아들어 엄청난 몰입으로 관객을 빠져들게 하였다.

<터미네이터>에서 가장 강한 인장은 특수효과의 거장 스탠 윈스턴과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창조한 T-800이 새겼다. 실로 무시무시한 살인 기계 T-800으로 분했던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당대 최고의 스타로 만든 <터미네이터>는 <블레이드 러너> <이티> <백 투 더 퓨쳐> <로보캅> 등과 함께 1980년대를 대표하는 할리우드 SF 영화로 이름을 올렸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제임스 카메론이 연출을 맡았던 <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은 액체 금속으로 이루어진 T-1000을 선보이며 CG 기술의 혁명을 성취했다. 전편에서 나약했던 사라 코너가 강인한 여성 전사로 바뀌고, 1편에서 악당이었던 T-800이 선한 역할로 변모하는 등 캐릭터의 반전을 시도한 속편은 전편에 버금가는, 또는 전편을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시리즈의 창조주인 제임스 카메론이 하차한 <터미네이터 3 : 라이즈 오브 머신>은 여성 로봇 T-X를 등장시키고, 물량 공세를 퍼부으며 오락적인 면을 부각시켰다. 풍성한 볼거리에 비해 이야기는 새로움과 거리가 멀었다.

심판의 날이 일어났던 3편 이후를 다룬 4편 <터미네이터 : 미래 전쟁의 시작>은 시리즈에서 반복되던 추격과 생존의 서사를 벗어나, 이야기의 다른 진로를 모색했다. 그러나 로봇이 등장하는 전투 장면은 <트랜스포머>의 기시감이 농후했고,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빈자리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리즈의 생명력은 사라져 갔다.

 영화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한 장면

영화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시리즈의 5편 격인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4편 다음의 이야기를 이어갈 것인가, <에이리언> 시리즈처럼 인물과 설정을 가져와 다른 화법으로 이야기를 전개할 것인가라는 갈림길에서 의외의 돌파구를 찾았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1편과 2편의 시간대를 가져오되 여기에 균열을 가한다. 그리고 시리즈의 본질이 T-800(아놀드 슈워제네거)임을 강조한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터미네이터>에서 터미네이터와 카일 리스가 1984년으로 보내지기 직전 상황인 2029년, 인간 저항군의 리더 존 코너(제이슨 클락 분)가 스카이넷을 무너뜨리는 전후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스카이넷은 존 코너의 탄생을 막기 위하여 1984년으로 터미네이터 T-800을 보내고, 기계의 음모를 저지하기 위하여 카일 리스(제이 코트니 분)도 뒤따른다.

1984년에 도착한 터미네이터를 '팝스'(아놀드 슈워제네거 분)란 애칭으로 불리는 터미네이터와 사라 코너(에밀리아 클라크 분)가 함께 공격하는 순간에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1편과 2편의 이야기에 다른 이야기를 덧붙이는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서사 방식은 <백 투 더 퓨쳐 2>가 <백 투 더 퓨쳐>의 시간에 다른 상황을 겹치게 했던 묘사를 연상케 한다. 1편에서 보여준 장면과 2편에서 활약했던 액체 로봇 T-1000(이병헌 분)은 어떨 때엔 똑같이, 때론 다른 묘사로 표현된다.

이번에도 명대사 "I'll be back(아윌 비 백)"은 적재적소에서 웃음을 자아낸다. 2편에서 스카이넷의 초석을 만들었던 마일즈 베넷 다이슨 박사의 아들인 대니 다이슨(다요 오케니이 분)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다. 2편의 감독판에서 나왔던 터미네이터의 어색한 웃음은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난 2편의 엔딩 장면도 눈길을 끈다.

2029년과 1984년에 이어서 심판의 날이 일어났던 1997년으로 가지 않고, 예상치 못했던 시간대인 2017년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는 과정에서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전편에서 형성한 인물 관계를 역전시키는 독창성을 드러낸다. 2편에서 유사 아버지로 기능했던 터미네이터의 역할은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에서 사라 코너와 팝스의 관계에 이식되었다. 팝스, 사라 코너, 카일 리스가 새로이 형성하는 가족 관계는 시리즈의 차가운 정서에 온기를 듬뿍 가미한다. 2편에서 인간과 접촉하며 따뜻한 심장을 얻은 터미네이터는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에서 한결 더 심장의 박동수를 높인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한 장면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여러 시간대를 거치는 구조라 복잡하게 느낄 수도 있다. 걸작의 반열에 오른 1편과 2편에 덧칠을 가하는 상황이기에 어떤 이가 후속편을 만들어도 부족함은 클 수밖에 없다. 예전에 출연했던 린다 해밀턴, 마이클 빈, 에드워드 펄롱 등이 내뿜던 아우라에 비해 새로운 배역의 존재감은 초라한 것도 사실이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이런 한계를 영리하게 극복했다. 1편과 2편의 시간대를 과감하게 부수면서 매듭을 풀어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터미네이터>의 세계에서 존재할 수 있는 터전을 일구었다. 세월의 흔적이 깊이 새겨진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외모에 CG를 가하지 않고 활동할 정당성도 확보했다. 1~4편이 구성한 2029년이란 예정된 시간과 존 코너를 벗어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자유로이 쓸 수 있는 토대도 마련했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노력에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내가 만든 1, 2편을 존중해주었다. 3편이라 부를 만하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터미네이터>의 판권은 2019년 제임스 카메론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때까지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2편의 후속편을 만들 예정이다. 물론 흥행한다면 가능한 여정이다. 영화에서 터미네이터는 "넌 사라진 타임라인 속 유물에 불과해"라는 핀잔을 듣는다. 터미네이터는 "늙었지만, 쓸모없진 않다"고 응수한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와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비록 터미네이터가 늙었지만, 쓸모가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새로운 미래 전쟁은 이제 시작했다. 그리고 터미네이터의 "I'll be back"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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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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