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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굳은 머리를 흔든다. 몇 년 전 일본 역사학자 스기야마 마사아키가 쓴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를 읽으며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스기야마에 따르면 '국가'와 '민족'은 역사의 생성물로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장·소멸한다. 국가와 민족이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확고한 민족이 존재한 다음 국가가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잘못이라고 단언한다. 대부분의 경우 국가가 먼저 세워지고 민족이 나중에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단군 자손' 식의 단일 민족관에 젖어 있던 나는 스기야마의 책을 통해 국가와 민족에 대한 새로운 통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문명 담론을 근원에서부터 비판

<조미아,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 책표지
 <조미아,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 책표지
ⓒ 삼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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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대학교 인류학 교수인 제임스 스콧의 책 <조미아,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을 읽으며 비슷한 경험을 했다.

'동남아시아 산악지대 아나키즘의 역사'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문명'과 '미개(야만)'에 관한 우리의 통념을 건드린다. 문명에 터를 잡은 국가주의 중심의 '주류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만든다.

내가 내놓는 주장은 중국을 비롯한 여러 문명들의 '야만', '날것', '미개'에 대한 담론을 해체한다. (중략) 이른바 '문명 담론'은 사람들이 경계를 넘어가 자발적으로 야만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결코 좋게 여기지 않았고, 그러한 사람들에 오명을 씌우고 '종족화' 작업을 시도했다. 종족성과 '부족'은 정확히 세금 징수와 주권이 끝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탄생한 것이다. (17쪽)

저자가 미개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뒤엎기 위해 할애한 분량은 700쪽이 넘는다. 그 방대한 지면은 동남아시가 국가의 강압적인 '국가 만들기' 프로젝트를 통해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벗어나려는 이유를 파헤치는 전반부(2~4장)와 경제활동, 사회조직, 구술문화 등을 중심으로 국가로부터 벗어난 이들이 꾸려간 삶을 조망하는 후반부(5~8장)로 나뉜다.

책의 주인공은 '조미아(Zomia)'로 불리는, 동남아시아 일대 고산 지역에 거주하는 산악 종족이다. 조미아는 인도-방글라데시-미얀마 국경 지역의 티베트-버마어족 계열 고산족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다. '동떨어져 있다'는 뜻으로 산에 살고 있음을 함축하는 '조'와 사람을 뜻하는 '미'가 결합된 말이라고 한다.

지리적으로 베트남 중부 고원에서 시작해 대륙 동남아시아 5개국(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미얀마)과 중국의 네 지방(윈난, 구이저우, 광시, 쓰촨 성 일부)을 가로지르며 인도 동북부까지 뻗어 있는 해발 3000미터 이상의 고지대가 조미아 권역이다. 이곳은 넓이가 250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데, 종족과 언어 배경이 다양한 1억 명가량의 소수종족들이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뒤처지고 단순하고 야만적인 사람들이 점차 선진적이고 우수하고 더 번성한 사회와 문화에 흡수된다고 보는 문명 담론을 근원에서부터 비판한다. "평지 국가의 문명 담론은 '국가 내부에서 지배를 받으면 문명, 그렇지 않으면 원시'라고 자기 편의대로 갖다 붙인 것"(45쪽)일 뿐이다.

저자가 보기에 대부분의 역사에서 국가 내부나 바깥, 또는 그 중간 지대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하나의 '선택'이었다. 민족적·종족적 정체성마저도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으로 규정한다. 저자가 변방 거주, 물리적 이동성, 화전 경작, 유연한 사회구조, 비정통 종교, 평등주의, 문맹, 구술 문화 등 산악민들을 낙인찍는 말들이 문명에 뒤처진 원시의 표식이 아니라고 보는 까닭이다.

변방은 대부분 도피 공간이거나 '파쇄 지대'였다. 그곳은 국가 형성의 여파로 그리고 국가에 맞서다 튕겨 나온 인간 조각들이 마구 쌓여 종족과 언어가 어리둥절할 정도로 복잡해진 지역이 되었다. (43쪽)

저자에 의하면 조미아는 '국가 효과', 곧 평지 국가 만들기와 팽창의 효과이다. 국가와 그 결과인 파쇄 지대(조미아)를 서로 충분히 이용하며 기대고 있는 관계로, 서로 문화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보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국가 만들기를 수탈의 공간을 만드는 작업으로서, 사람들을 억압하기 위해 기획되었다는 점을 반영하는 산물로 보는 배경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국가라는 괴물을 길들이는 도구, 조미아

최근 조미아는 세계 지역 연구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현대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서 자유의 미래가 국가라는 '괴물(Leviathan)'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길들이는 힘겨운 작업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저자의 논점도 이와 관련돼 보인다.

저자의 기본 입장은 조미아가 국가라는 괴물을 길들이는 데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사회는 북대서양의 사유재산 모델과 국민국가 모델이라는 두 개의 표준화 모델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는 사유재산에 의해 생겨난 부와 권력의 엄청난 불평등에 맞서서 그리고 국민국가에 의해 그 어느 때보다도 깊숙이 파고든 규율에 맞서서 싸우고 있다. 존 던이 밝히고 있듯이,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망적으로 자신의 안위와 번영을 지배자들의 솜씨와 선의에" 맡기게 됐다. 그리고 국가라는 괴물을 길들이기 위해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허약한 단 하나의 도구는 (고대 그리스에서 비롯된) 또 다른 북대서양 모델 대의제 민주주의이다. (546쪽)

저자가 주목하는 조미아는 "국가와 '문명'을 빚어 낸 원시적·근원적 '자원'"(550쪽)이 결코 아니었다. "벼농사 이전, 도시 이전, 문자해득 이전, 평지 신민 이전의 사람들"(564)이라는, 산악민의 특징에 관한 서술은 평지적 상상의 지평에서 평지 엘리트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허상'이다.

산악민들을 낙인찍는 그런 특징은 국가를 회피하는 사람들이 자율성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북돋우고 완벽을 가하려는 특징들이었다. 그 평지의 상상력은 잘못된 역사를 갖고 있다. 산악민들은 결코 어느 시점 이전의 사람들이 아니다. 사실 그들을 관개 벼농사 이후, 정주 이후, 신민 이후, 심지어 문자해득 이후의 사람들이라고 보는 쪽이 더 올바른 이해이다. 장기 지속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국가의 손아귀에 벗어나 있으면서 국가의 세계에 적응해 온 사람들의 반작용적·의식적 비국가성을 상징한다. (565쪽)

2014년 4․16 세월호 참사와 2015년 메르스 창궐 사태를 겪으면서 '국가란 무엇인가'를 묻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기존의 틀에 박힌 국가 이미지가 사람들을 '배신'했다고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3만 달러에 육박한다는 국민소득을 허랑하게 여기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국가 브랜드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 사이먼 앤홀트가 만든 '좋은 국가 지수'라는 게 있다고 한다. 과학기술, 문화, 국제평화와 안보, 번영과 평등 등 7개 항목별로 5개 지표를 적용해 산출하는데, 최근 평가 결과 한국은 47위였다. 케냐, 과테말라, 가나 등 아프리카·남미 대륙의 '가난한' 나라들보다 낮은 순위라고 한다.

'좋은' 국가의 품격을 어떻게 상상해야 할까. 부제에 있는 '아나키즘'을 출발점으로 삼을 만하다. '지배자가 없다'는 뜻의 그리스어 'anarchos'에서 유래한 '아나키즘'은 흔히 알고 있는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무강권주의(無强權主義)'에 가깝다. 권력이 집중되어 '괴물'이 돼버린 국가에 대한 비판 정신이 깔려 있는 것이다.

'좋은' 국가의 품격이나 조건은 국가에 관한 기존의 상투적인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 국가에 관한 관성적인 사고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국가', '국가 이후의 국가'를 상상해 보아야 하는 이유다. 조미아라는 '비주류, 비국가'의 세계를 다룬 이 책을 유용한 안내자로 활용해보기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조미아,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제임스 C. 스콧 지음, 이상국 옮김 / 삼천리 / 2015. 6. 5. / 703쪽 / 3,5000원)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조미아,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 - 동남아시아 산악지대 아나키즘의 역사

제임스 C. 스콧 지음, 이상국 옮김, 삼천리(2015)


태그:#조미아, #제임스 스콧, #야만, #문명,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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