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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낮 12시 쯤, 휴대 전화가 울렸다. 박형집(64)씨였다. 그는 "요즘 내가 안 보여 포기했을 것으로 생각할까봐 전화를 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돌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안 보였는지 여부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전화로 "아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울 겁니다, 제발 잊지만 말아주세요"라고 했다. 목소리에는 처절함이 묻어 있었다.

아들 명예 회복 위해 3년째 1인 시위하는 아버지

지난 2004년 울산 삼성SDI 사내하청업체인 KP&G에 입사해 10개월가량 일하다 2005년 11월 29일 급성림프구성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박진혁씨의 아버지 박형집씨가 삼성SDI 울산사업장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지난 2004년 울산 삼성SDI 사내하청업체인 KP&G에 입사해 10개월가량 일하다 2005년 11월 29일 급성림프구성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박진혁씨의 아버지 박형집씨가 삼성SDI 울산사업장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다
ⓒ 삼성일반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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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집씨는 10년 전인 지난 2005년 하나 뿐인 아들을 잃었다. 당시 아들의 나이는 28세 청춘이었다. 아버지는 장례를 치른 후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아들이 짧은 생을 마감한 이유를 짐작하게 됐다.

이후 아버지는 2012년부터 3년째 아들이 사내 하청 업체에서 일하던 울산 울주군 삼성SDI 울산 사업장 앞에서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두 차례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이 시위를 두고 회사 측으로부터 고발을 당한 그는 경찰과 검찰을 거쳐 결국 '기소 유예' 처분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최근 2주간 1인 시위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부인이 아파 병원에 함께 다니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박형집씨는 지난 2주간 시위를 하지 않은 것을 두고 사람들이 '혹시 포기했나'라고 생각할까봐 전화를 했다고 한다.

박형집씨의 외동 아들 고 박진혁씨는 군대를 제대한 후 얼마 되지 않은 지난 2004년 부산에서 일자리를 찾아 울산으로 왔다. 첫 직장은 현대자동차 하청 업체. 얼마간 일하던 아들은 적성에 맞지 않자 새로 일자리를 얻었다. 그곳이 바로 울산 울주군 삼남면에 있는 삼성SDI 울산 사업장. 역시 사내 하청업체(KP&G)였다. 아들은 이곳에서 브라운관에 들어가는 마스크 트리클린자동화 세척 작업을 했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아들은 휴일이면 집에 와 부모님과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아버지는 열심히 일하는 아들이 대견스러웠다. 이렇게 하청 업체에서 10개월 가량 일하던 아들은 어느 날 "자꾸 힘이 없고 식은땀이 난다"고 아버지께 호소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목에 뭔가 볼록하게 생긴 것이 이상해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하지만 큰 병원으로 갈 것을 권유하는 의사의 말에 집에서 가까운 부산 동아대병원을 찾았다.

2005년 2월, 진단 결과 아들은 '급성림프구성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박형집씨는 "백혈병 진단을 내린 의사도 '유전적인 것도 아니고 이상하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군에서 제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하청 업체지만 입사할 때 두 곳에서 신체 검사를 받았을 때도 아무 이상이 없었기에 갑자기 발병한 백혈병이 믿기지 않았다.

병원에서 7개월간 항암 치료를 받던 아들은 결국 2005년 11월 29일 사망했다. 박형집씨는 "아들이 눈을 감기 전 너무 억울해 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제발 잊지만 말아주세요"

아들은 하청 업체에 병가를 내고 치료를 받았고, 병가 기간이 끝나 건강보험도 지역보험으로 변경했다. 아버지는 "삼성 같은 큰 회사에서 치료비 지원도 안 해주는 것이 의아하다"고 했지만 아들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럴 것"이라고 했다. 투병 기간 오히려 하청 업체에서 사직서를 받으러 왔을 때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아버지는 당시 회사 관계자에게 "아들이 아파 미안하다"고 했다.

아들을 떠나보낸 후 몇 년간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지난 2008년 인터넷을 둘러보다 아들처럼 일하다 백혈병을 얻은 사례들을 발견했고, 수소문 끝에 이들을 돕는 '반올림'이라는 단체를 찾았다. 이어 반올림과 삼성일반노조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는 지난 2012년부터 삼성SDI 울산사업장 앞에서 죽은 아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그는 아들의 산재를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며 근로복지공단에 제소했지만, 올해 초 항소에서도 기각판정을 받았다(관련기사 : 역시나... 삼성SDI 백혈병도 산재 '불승인'). 그는 "근로복지공단이 '일한 기간이 짧고 조사가 제대로 안 된다'는 기각 이유를 들었는데, 산재가 일한 기간이 짧다고 해서 발생하지 않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박형집씨는 "억울하게 저 세상으로 간 아들이 있는데, 내가 무엇인들 못하겠나"며 "반드시 아들의 명예를 회복할 것이다, 제발 잊지만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한편 삼성SDI 울산사업장에서 근무했거나 근무 중인 노동자 중 18명이 암과 백혈병 피해자로 확인됐다. 이중 6명은 이미 사망했고 이들 외에도 뇌질환, 심장질환, 신장질환, 돌연사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도 현재 파악된 것만 10여 명이다(관련 기사 : 삼성SDI 울산공장, 암·백혈병 18명 확인... 6명은 사망).

그동안 삼성전자 백혈병 문제에 가려져 있던 삼성SDI 백혈병 문제는 지난 2013년 2월 21일 사망자 유족들과 삼성일반노조, 반올림, 울산인권연대, 울산지역노동자건강권대책위의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울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 작성 글에 한 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태그:#삼성SDI 울산사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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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 일간지 노조위원장을 지냄. 2005년 인터넷신문 <시사울산> 창간과 동시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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